종말 문학 걸작선 1
스티븐 킹 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조지훈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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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종말의 시대는 오래전부터 매혹적인 문학 소재였다. 그래서 많은 장르 소설 작가들이 앞 다투어, 지구 종말과 인류 멸망 이후의 어떤 세계가 펼쳐질 지에 대해 수많은 작품을 발표해 왔다. 이번에 황금가지를 통해 선보이는 <종말 문학 걸작선>에서는 거장 스티븐 킹의 단편을 비롯한 모두 22편의 지구 종말을 주제로 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지구 종말이 다가왔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에 이 소설 선집의 키포인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건 바로 생존이다. 인류는 진화 단계에서, 어떤 식으로 생존에 집착해왔다. 후손에게 자신의 유전인자를 물려주고,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인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간단하게 말해서, 지구에 종말이 닥쳐와도 인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마저 사라진 종말시대에 진짜 동물을 본 기계 인류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유기물이 아닌 무기물로 생존하고, 자유자재로 재생이 가능한 시기에 구시대의 유물로 등장하는 개의 존재는 그들에게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에서 파올로 바시갈루피는 신인류에게는 없는 다른 생명체와의 교감의 중요성을 슬쩍 내비친다. 거창하게 왜 우리에게 종의 다양성이 필요한가를 말하기보다 종말 이후의 삭막한 지구의 현실을 통한 우화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모티프를 얻었다는 <빵과 폭탄>에서는 나와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법에 대한 M. 리케르트의 사고를 엿볼 수가 있다. 9-11 사건 이후, 전 미국을 휩쓸었던 반 이슬람 분위기에 대한 냉소적 시선을 아이들 사이의 갈등으로 풀어내가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웜바이러스 때문에 순식간에 지구의 시스템이 파괴되는 과정을 그린 <시스템 관리자들이 지구를 다스릴 때>에서는 저자 코리 독토로의 네트워크 환경에 대한 전문적 지식에 감탄했다.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를 잃은 주인공 펠릭스(역설적으로 주인공의 이름이 “행운아”라니!)는 인류 삶의 터전인 지구와 가족이 붕괴되는 과정을 목격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문명의 보존과 재건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전통적인 오프라인 관계 상실의 시대에, 네트워크로 연결된 공동체의 생존 방식에 대한 작가의 문제제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들이 어쩌면 작가들이 나중에 그 외연을 확대해서 장편으로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희미하나마 보이는 희망의 끈이 인상적이었다.

<종말 문학 걸작선> 첫 번째 권에 실린 소설 중에서 역시 가장 관심을 끄는 작품은 1번 타자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작가 스티븐 킹의 <폭력의 종말>이었다. 프리랜서 작가인 하워드 포노이의 마지막 원고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작가의 천재 동생 바비 포노이가 어떻게 인류를 종말로 이끌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다.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드러낸 바비는 인류의 폭력성과 비열함에 절망하고, ‘특수한 물’의 심판을 내린다. 문제는 그의 극단적 치료제가 가진 부작용이었다. 선의가 언제나 좋은 결과를 가져 오는 건 아니라는 방증이다.

스티븐 킹의 단편을 보고 나서 바로 미국 케이블 채널인 TNT에서 제작된 동명의 텔레비전 영화를 구해서 봤는데, 원작을 그대로 구현한 콘텐츠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큰 차이점은 원작에서는 주인공 하워드가 바비의 전동타자기로 기록을 남기는 것으로 나오는데, 텔레비전 영화에서는 비디오카메라로 좀 더 비주얼적인 측면을 다룬다는 점 정도. 나머지는 정말 환상적으로 원작을 재현해내는데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종말 문학 걸작선>을 읽고서 두 가지 아쉬운 점을 말하고 싶다. 하나는 존 조지프 애덤스가 “들어가는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아포칼립스 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좀비 창궐과 외계인의 지구 정복이라는 소재의 글이 빠진 것이다. 후자는 차치하고서라도,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지구 문명이 파괴되고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와의 사투야말로 종말 문학 중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아쉽기 짝이 없다. 두 번째로는 책의 곳곳에서 보이는 오탈자와 아귀가 맞지 않는 전후관계 설명이다. 책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교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좀 엉뚱한 질문이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에도 문학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기 위해선 문학의 생산자와 소비자인 인류가 꼭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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