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 오가와 요코 컬렉션
오가와 요코 지음, 권영주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예전에 체스도 둘 줄 모르면서 순전히 귀엽다는 이유로 심슨 가족이 체스 판의 말로 등장하는 체스 판을 산 적이 있다. 같이 살던 친구와 체스에 취미를 붙여 보려고 한동안 체스 두는 법을 배우곤 했는데, 끈기가 없어서인지 만날 같은 상대를 상대하다 보니 재미가 없어져서인지 금세 그만둬 버린 것이 나의 체스에 대한 유일한 기억이다.

우리에게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유명한 오가와 요코의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로 다시 체스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어느 한가한 휴일 오후, 이 책과 그동안 읽고는 있었는데 미처 읽지 못한 세 권의 책을 들고 카페로 향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바깥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커피향이 그윽하게 밴 카페에 들리는 적당한 소음과 BGM으로 깔린 재즈 음악을 들으며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를 읽기 시작했다.

일본 작품이 분명한데도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에는 이 아름다운 소설의 배경이 일본인지 아니면, 서구의 어느 조용한 고장인지 알 방법이 없다. ‘리틀 알레힌’이라는 이름의 주인공 소년의 이름도 알 수가 없다. 천재 체스 플레이어 소년은 체스 판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는 우직한 말의 상징처럼 그렇게 다가온다. 조실부모하고 가구 수리를 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소년은 입술이 달라붙은 채 태어난다. 정강이 살을 이식한 수술로 입이 튼 소년, 당연히 말수가 적고 주변에 친구도 없다.

아, 아니다 소년에게는 백화점 옥상에 올라갔다가 너무 커서 내려올 수 없게 된 코끼리 인디라와 좁은 틈에 갇혀 죽었다는 전설의 미라가 있다. 어쩐지 그의 주변에서 죽음의 그늘이 떠날 줄을 모른다. 아,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 소설은 호러 엽기 소설은 아니니까. 게다가 어느 날 학교 수영장에서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버스 운전사 아저씨를 발견한 소년, 해초처럼 너풀대던 그의 겨드랑이 털이 유난히 떠오른다. 그날 이후, 소년은 그의 입술 주변에 돋아난 솜털로 그를 괴롭히던 소악당들로부터 해방된다.

버스를 개조한 트레일러에서 살면서 간식을 즐기던 마스터로부터 소년은 체스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 마음을 둘 곳이 없던 소년은 8X8 반상의 세계에 그만 홀딱 반해 버린다. 체스 세계의 SCV 같은 존재인 폰(pawn)을 제 이름으로 한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마스터에게 한 수 한 수 배우는 즐거운 나날들이 계속된다. 세상 무엇보다 체스 두는 도중에 간식을 즐기던 마스터가 심장마비로 죽고 나자, 비로소 소년은 홀로서기에 나선다. 스승의 죽음과 제자의 홀로서기라는 신화의 전형을 소설은 그대로 재현한다.

체스를 사랑하는 재력가 노파 영양의 도움으로 체스 두는 인형 리틀 알레힌으로 소년은 체스의 바다에 뛰어든다. 체스 판에서 상대에 맞서기보다 체스 판 밑으로 기어 들어가 체스의 바다를 헤엄치기 좋아하는 소년의 환상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코끼리 인다라의 꼬리를 잡고 흑백의 체스 무늬가 들어간 고양이 폰을 왼손에 앉은 소설의 표지 그림이 완벽하게 이해됐다.

체스를 위해 자신의 몸집까지 줄여 가면서 체스에 몰입해서 손끝으로 이야기하는 어느 소년의 이야기는 경이로웠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천명관 작가의 <고래>가 떠올랐다. 그 소설에서도 아마 박제된 코끼리 이야기가 나왔지. 현실 세계와 조금은 얼토당토않은 환상이 겹쳐지는 교차점이 조금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온통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체스 기보를 통해 실존을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불완전한 존재는 그래서 기록을 좇게 되는 것일까. 비록 그것이 주관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삶의 고갱이가 농축된 체스 무대를 배경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던 리틀 알레힌의 최후에는 유려한 비장미가 흐른다. 실존했던 체스 계의 그랜드마스터 알렉산드르 알레힌의 죽음처럼 소설의 주인공 역시 선구자의 길을 따른다. 그렇게 반하(반하의 시인, 리틀 알레힌의 짧았지만 치열한 삶의 궤적을 따르는 문학 여행은 조용하게 막을 내린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바로 리틀 알레힌과 그의 조수 미라의 ‘체스 기보 편지’였다. 인형 속에 들어가 수를 두던 소년을 위해, 대신 기보를 기록하고 말을 처리하던 미라와 헤어져 산 위의 요양원에 올라가 있던 소년은 미라에게 단 한 줄의 체스 기보로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곤 했다. 그리고 편지는 보내는 순간부터 기다리던 미라의 답장에 적힌 기보를 보고 기뻐하던 주인공의 그 순수한 감정에 대한 묘사는 정말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아직 오가와 요코의 대표작인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어 보진 못했지만 왠지 이 작품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시간 내서 영화로 먼저 이 작품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를 안고 코끼리와 헤엄치다>를 영화로 만들면 소년의 환상 부분이 어떻게 표현될지 못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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