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자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지음, 서상국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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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알라딘 동지 잠자냥님께 쌩유를. 아마 잠자냥님이 <여행가방>의 친절하게 덧글을 달아 주시지 않았다면, 난 아마 세르게이 도블라또쁘의 책은 한국에 달랑 한 권만 있는 줄 알았으리라. 그리고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추천해 주신 <외국 여자>를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일단 분량부터 마음에 들었다. 아주 가뿐했다. 더더욱 읽기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가끔은 이런 불량식품 스타일의 책들도 읽어야 제 맛이지.

 

<여행가방>에서도 말했지만, 세르게이 도블라토프가 추구하는 쏘비에트 리얼리즘은 소련의 스타일이 되어 버린 진지하고 엄숙하고 무언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충만한 체제 비판적인 그런 글들이라는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블라토프 동지는 그런 고리타분한 편견에 핵펀치를 날린다. , 도블라토프의 아버지가 유대인이고 어머니가 아르메니아인이라고 하는데 인종적 분류는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하다. 유대인은 모계로 전승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긴 나의 가계도 잘 모르는 판에, 외국 사람까지.

 

소설 <외국 여자>외국 여자는 바로 주인공 마루샤 타타로비치다. 이 여성은 쏘비에트 체제의 수혜를 잔뜩 받은 소위 특권층이라는 노멘클라투라 출신이다. 아버지는 공장장에 어머니는 무슨 디자이너였지 아마. 그러니 쏘비에트 체제에서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는 그런 존재였다. 학교에서도 인기 만점이었고, 학교와 직장 모두 원하는 것을 얻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마루샤의 연애사업은 그닥 성공적이지 않았다. 첫 애인인 라지카라는 녀석은 프롤레타리아 유대인이었고, 마루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마루샤는 장군의 아들 디마와 결혼했는데,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은 당근 실패로 끝났다. 너무 바른 싸나이였던 디마의 무심함에 질린 마루샤는 가능한 모든 이들과 바람을 피운다. 두 번째 결혼은 유명 가수 브로니슬라프 라주달로프와 했는데, 가수의 바람기 때문에 결국 아들 료부시카만 덜랑 남기고 역시 실패로 끝났다. 마루샤가 죽겠다고 협박하자, 브론카는 물 속 가장 깊은 곳을 알려 주겠다는 노래로 화답한다. 끝내 주는 커플이 아닌가!

 

, 소설은 미국으로 이주한 마루샤네 동네에 사는 러시아 사람들에 대한 묘사로 시작했지 아마. 108번가에 사는 러시아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하면서도 또 동시에 이질적이기도 하다. 뉴욕의 케이타운 같다고나 할까. 뉴욕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햄버거 대신 케이타운에서 순댓국을 한 사발 먹고 구겐하임 뮤지엄을 찾았던 시절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어디 사나 다 마찬가지인가 보다.

 

문제는 마루샤의 친구이자 작가의 페르소나가 분명한 작가세르게이 도블라토프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이다. 모국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망명이나 이민을 떠난 작가에게 그것은 언어적 사망 선고라는 것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롤리타>의 나보코프 같은 대작가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일 따름이다. 모국 소련에 창작의 자유는 없는 대신 독자들이 있었지만,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는 창작과 출판의 자유는 보장되었지만 정작 예의 문학을 소비할 독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바로 문제였다. 오호 통재라.

 

소련에 남아 살아도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었던 마루샤는 아무 생각 없이 라지카와 결혼한 뒤, 아들 료부시카와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의 퀸즈에서 마루샤 모자는 1도 모자라지 않는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아무리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조국에서 잘 나가던 이들도 모두 미국식 자본주의 앞에서는 조금 더 평등했다. 아니 평등하다 못해, 누가 돈을 더 많이 버느냐가 최우선하는 가치가 되었다. 쏘비에트식 평등주의에 물들어 있던 이들에게, 돈벌이에 혈안이 된 미국의 살벌한 경쟁이 달가울 리가 있나 그래. 특권층으로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이 산 마루샤의 추락은 예상한 대로 그대로 진행된다.

 

그렇게 버거운 이방인으로서의 살이에 지친 마루샤는 자본주의 본고장에서 암약하는 조국의 KGB 요원들에게 포섭되어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미 자본주의에 물들어 외국 여자가 된 마루샤에게 쏘비에트 조국은 그렇게 만만하게 응대하지 않았다. 조국의 대리인들인 KGB 요원들은 마루샤에게 반성문인지 논문인지를 요구한다.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 같은 반체제 인사라면 당연 씨도 먹히지 않는 수작에 거창한 방식으로 대응했겠지만,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이민길에 오른 마루샤는 그런 KGB 공작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흘려버린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미주 공연에 나선 브론카의 공연을 찾기도 하고, 그런 마루샤를 질투하는 바람둥이 라파 곤잘레스의 질투를 사기도 하는 마루샤의 좌충우돌 미국 생활기는 계속된다. 결국 그렇게 속을 썩이던 라파와 결혼에 골인하게 되는 마루샤. 소설에서 이기적인 조지아인들이 아름다운 여자들을 모두 다 차지한다고 하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이는 명백하게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과 비밀경찰 엔카베데(NKVD)의 수장이자 스탈린의 멍멍이로 불렸던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를 겨냥한 냉소적 비판이다. 그 둘이 활개를 치던 시절, 이런 글을 썼다면 도블라토프는 당장 총살형 아니면 시베리아 종신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도블라토프는 이국땅에서 고유의 정체성을 잃고 살게 된 신산한 이민자들의 삶이라는 층위에 바스락거리는 페이스트리 같은 망명 작가 세르게이 도블라토프의 어떤 모습들을 고명처럼 얹었다. 밀푀유 같은 맛이라고나 할까? 어떤 이유로 그곳에 흘러들었건 간에, 그들 모두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여행가방에 자신의 과거를 바리바리 싸서, 물 건너온 이들을 맞이한 미래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성공한 이들의 이야기들보다 그렇지 못한 따라지들의 이야기가 더 매력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읽을수록 더 땡기는 맛이다. 잘 버무렸다.


[뱀다리]



우연히 도플라토프의 사진이나 검색해 보려고 하다가 2018년에 나온 영화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이런 영화들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구나.


이 작가의 삶은 영화로 만들어질 법도 하다 싶었는데, 내 생각에 앞서 아예 영화로 만든 이가 다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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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7-19 22: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행가방> 오는 중요.
내일 온대요^^
품절이라 중고로.. 알려주신대로!
언제 읽고 올리게 될지는 모르지만.ㅎㅎ

레삭매냐 2021-07-19 23:26   좋아요 4 | URL
일단 사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또 언제 구할 수 있을 지
모르니깐요. 읽는 건 천천
히 가셔도 됩니다, 넵.

독서괭 2021-07-19 23: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우와 책 구해서 읽는 속도가 엄청나시네요. 여행가방 리뷰 본지 얼마 안 됐는데..!

레삭매냐 2021-07-20 00:19   좋아요 5 | URL
<여행가방>이 넘 재밌어서
다 읽고 나서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빌려다 어제 출근길
버스에서 다 읽었답니다.

다른 책(보존지구)도 빌려다 읽을라구요.

미미 2021-07-20 00: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리 말씀하시니 안 담을 수가 없네요! <여행가방>도 <외국여자>도 쏙😊

레삭매냐 2021-07-20 00:21   좋아요 4 | URL
<우리들의>라는 책도 있는데
그 책을 소장 도서관이 이달
부터 리모델링에 들어가는
바람에 내년에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행가방> <외국 여자> 모다
모다 재밌습니다.

새파랑 2021-07-20 00: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품절이군요 ㅜㅜ 글이 아주 흥미 만땅이네요. 러시아는 역시 KGB, 보드카, 그리고 시베리아~!!

레삭매냐 2021-07-20 07:25   좋아요 5 | URL
지만지에서 나온 <외국 여자>는
시중에서 구하실 수 있고,
뿌쉬낀하우스에서 나온 <여행가방>
은 품절이랍니다.

로씨야는 역시 KGB-보드까 그리고
싸이베리아로 귀결된다는 말쌈,
핵심이네요.

바람돌이 2021-07-20 01: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처음 들어보는 작가! 세상에 읽을 책은 정말 널리고 널렸습니다. ^^ 그동안 잘 지내셧죠? 좀 오랫만에 들어왔어요. ^^

레삭매냐 2021-07-20 07:25   좋아요 4 | URL
웰컴 백입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세상에 책은 정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
같습니다.

잠자냥 2021-07-20 09:3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잘 읽으셨군요! 정말 피식피식 약간 헛웃음 나오는 작품이죠? 도블라토프의 참맛을 아는 독자 분이 또 한 명 나타난 것 같아 기쁩니다. (내가 왜;; ㅋㅋㅋㅋ)
전 얼마전에 중고로 <우리들의>가 나왔기에 덥석 구매했어요.
<여행가방> 그 책은 아주 오래전 사 읽고 갖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품절, 레어템이 되니까 왠지 볼때마다 더 흐뭇? ㅋㅋㅋㅋ
<수용소>나 <외국여자>는 지만지 책이 좀 비싸서리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고요. ㅎㅎ

레삭매냐 2021-07-20 10:50   좋아요 4 | URL
피식피식 헛웃음이야말로 도블라토프
작가의 맛이 아닌가 싶습니다.
피식스~

도블라토프의 책들이 대중적이지
않아 더 찾아 보는 재미가 있네요.

지만지 책들은 왜 이렇게 비싼지
모르겠네요. 희귀한 작가들을 번역
해서 그런지 어쩐지...

잠자냥 2021-07-20 09:4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자살하겠다는 아내에게 불러준 이 노래 진짜 웃기지 않습네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대가 만일 강으로
빠져 죽으러 갈 것이면,
내게 안녕을 고하러 와 주오.
내가 그대와 함께 강으로 가서
가장 깊은 곳을 가르쳐 주리다. (56쪽)

레삭매냐 2021-07-20 10:55   좋아요 4 | URL
그렇지 않아도 잠자냥님의 리뷰를
보고 기대하던 시퀀스였는데
역시나 빵빵 ~ 터졌습니다.

로씨야식 유머?

mini74 2021-07-20 22: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댓글도 내용도 홈쇼핑 매진임박보다 더 혹하게 하는 ㅎㅎㅎ 러시아소설 은근히 매력있고 재미있는거 같아요. 이름은 낯설지만 ㅠㅠ

레삭매냐 2021-07-21 06:05   좋아요 2 | URL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그동안 도끼 선생이나 톨스
토이의 엄근지 모드에 질려서...
로씨야 소설들을 멀리 하였으나
도블라토프를 통해 그렇지 않은
작가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답니다.

이달에는 에밀 졸라가 아니라
도블라토프로 급변경했네요 ㅋ

초딩 2021-08-06 17: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2관왕 축하드려요~

레삭매냐 2021-08-14 10:35   좋아요 0 | URL
아이구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1-08-06 18: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레삭매냐 2021-08-14 10:35   좋아요 0 | URL
부랴부랴 책 사들이고
있답니다.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08-06 18: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2관왕 완전 축하드려요~!!

레삭매냐 2021-08-14 10:35   좋아요 1 | URL
앗 한 개가 아니었군요 :>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8-06 19: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행가방도 받았고, 덕분에 재밌는 독서!
축하도 드려요^^

레삭매냐 2021-08-14 10:35   좋아요 0 | URL
졸라 읽는다고 하고선
다른 작가로 ㅋㅋㅋ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1-08-06 20: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레삭매냐 2021-08-14 10:3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 달에는
뽀나스를 더 주셨네요.

하나의책장 2021-08-14 02: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레삭매냐 2021-08-14 10:3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thkang1001 2021-08-14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 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