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장하지 말라”
갑자기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직하던 음성이 좀 올라갔다.
“제가 예전엔 영화감독이 아니었나요? 눈물겨운 성공 스토리, 신파 드라마 억지로 만들지 마세요.”
모 방송국에서 김 감독의 생애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제안해온 것이다. 그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른 성공 스토리로 자신을 포장하는 게 너무도 싫다고 했다. 그는 “어릴 적에 이사와 서울 근교에서 살았고, 공장에 있을 때도 능력을 인정받았고, 해병대에서도 하사관으로 ‘지휘’를 하는 위치였고, 프랑스에도 내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서 갔다”며 “지나치게 왜곡된 나의 과거가 관객들로 하여금 내 영화에 대해 왜곡된 시선을 갖게 한다”고 했다.
자연스레 화제가 ‘감독 김기덕’에서 ‘인간 김기덕’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어릴 적 부모님께서…”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그는 “우리 부모님은 좋은 분들”이라며 말을 잘랐다.
김 감독의 아버지 콤플렉스는 널리 알려져 있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 두려웠다. 완고한 절대군주의 그 천둥 같은 목소리. 나는 그 앞에서 문을 열고 닫는 것조차 망설여졌고 밥 한 숟가락 넘기는 것도 불편했다. ‘이놈의 새끼 커서 뭐가 될래?’ 아아, 나는 그 흔해빠진 야단 소리를 견디지 못했다. 그러기엔 난 너무 연약했다. … 난 아버지가 집을 비우는 때가 제일 행복했다. 아버지를 피해 달아날 수 있었던 유일한 공간인 화장실을 난 참 좋아했다(‘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에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그는 초등학교 시절 낙서를 한다고 아버지한테 피가 날 때까지 종아리를 맞은 적도 있다. “공부하지 말고 기술을 배워 공장장이나 되라”는 아버지 엄명에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에 취직했다.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것도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버지를 미워할 수도, 피할 수도 없었어요. 아버지 역시 피해자였기 때문이죠. 아버지는 지금도 6월25일이 되면 국무총리에게 ‘6·25 때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총알을 맞았고 아직까지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산다. 이제라도 보상을 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요. 수십 년째 보냈지만 ‘근거 없다’는 답신만 날아오죠. 아버지는 국가로부터 받은 상처와 분노를 자식들에게 푼 것 같아요.”
아버지의 삶이 영화 ‘수취인불명’의 모티브가 됐다. 영화에서 지흠과 그의 아버지가 바로 김 감독 부자의 자화상이다.
“아버지에게 학대받았다고 했던 제 말들이 아버지께 너무나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아버지 밑에서 굉장히 억눌렸던 건 사실이지만 학대라고 볼 수는 없어요. 아버지는 저를 사랑했으니까요. 지금은 제가 유명한 영화감독이 된 걸 무척 자랑스러워하세요. ‘김기덕 감독 알우? 걔가 내 아들이야. 어휴 그놈의 새끼, 내가 많이 때리고 잘 가르치지도 못했는데…’라면서.”
-아버지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는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폭력성을 지니셨다면 어머니는 포용성을 지니셨어요. 최후의 승자는 늘 어머니셨죠. 제게 어머니는 언제나 한없이 품어주는 존재였어요. 전 아버지와 어머니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제 영화도 그래요. 공격성뿐 아니라 어머니의 품 같은 따뜻함도 지녔죠. 그런데 지금 두 분 다 몸이 좋지 않으셔서 걱정이에요.”
‘살면서 만든 영화’
해병대에서 전역한 1990년 초, 그는 자신이 다시 공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는 무작정 파리행 비행기에 오른다. 부랑자들이 웅크리고 있는 센 강가에서 첫날밤을 보낸 그는 야생동물 같은 동유럽, 아랍 친구들을 만나 연원을 알 수 없는 동질성에 끌려 친구가 됐다. 그들을 따라 지중해와 접한 남프랑스로 간 김 감독은 그곳에 화실을 얻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배낭에 짊어지고 유럽 10여개 나라를 돌면서 전시회도 열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 자체가 큰 행복이었다. 그렇게 3년여를 보내고 1993년 귀국했다.
영화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그가 쓴 시나리오 ‘무단횡단’이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 대상을 차지하면서부터다. 그에게 1500만원의 상금을 안겨준 이 작품은 아쉽게도 제작사의 사정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 무렵 성수대교 근처에 살던 그는 한강 다리 밑에 모여 사는 부랑자들을 자주 목격했다. 또 거기서 자살하거나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이 한강철교 교각에 써놓은 ‘유서’들을 읽었다. 부랑자들이 여자를 집단으로 강간하고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자료들을 모아 시나리오를 써 무작정 영화사로 찾아갔다. 시나리오를 읽어본 영화사 사장은 “시나리오를 팔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직접 영화를 찍고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사 사장은 황당해했다. 그때까지 김 감독은 전문적인 영화 공부는 고사하고 영화 찍는 현장에도 한번 가본 적이 없었다. 1주일간 승강이를 벌인 끝에 결국 영화사 사장이 항복하고 말았다.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 ‘악어’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후 그는 8년 동안 10편의 영화를 만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