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옹색했다. 심지어는 빈 깡통 하나 구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ㄷ’자 모양으로 늘어선 우리 시골집은 당시 우리 동네에선 중류 이상으로 꼽혔는데,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앞채를 팔고, 사랑채는 가짜꿀 만드는 젊은 부부에게 월세를 주고, 우리 식구는 방 두 개짜리 가운데 토막에 살았다. 아랫방엔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내 막내동생이 기거하고 웃방엔 작은누나와 내가 살았다. 안방과 웃방 사이엔 사람이 들락날락할 만한 구멍을 냈다. 어머니가 자리를 잠시 비웠을 때 웃방의 우리가 안방으로 잽싸게 건너갈 수 있는 특수 장치였다.
나는 안방으로 건너가는 게 싫었다. 안방에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병들어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싫어서가 아니라 어린 마음에도 오줌 썩는 냄새가 너무 지독했기 때문이다. 요강으로 받아낸 똥은 담장 밖에 있는 밭 가장자리로 버리곤 했지만 정작 오줌 처리가 더 큰 문제였다. 처음에는 작은 오줌깡통에 받아낸 걸 뒷마당 빨래터 물 내려가는 쪽으로 버리면서 동시에 우물물을 퍼서 그 위에 끼얹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아버지의 오줌은 그냥 안방 뒷문을 통해 우물가 쪽으로 휙 뿌리는 방법으로 굳어졌다. 신발을 신고 우물가 곁으로 몇 발짝 걸어가 거기다 버리고 물을 끼얹는 일이 점점 귀찮아진 탓이었다. 따라서 우리집 뒤뜰은 1년 내내 오줌냄새로 찌들어갔다. 특히 오줌 받는 깡통을 자주 새것으로 갈아대질 못해 깡통 안팎엔 온통 진초록색 이끼 같은 게 끼었고 거기서 풍겨나오는 냄새는 사람을 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아직까지 아버지의 오줌깡통 냄새보다 더 지독한 악취를 맡아본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아버지는 왼쪽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의 신체 불구자였지만 정신만은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이 멀쩡했다. 말도 큰 불편 없이 구사할 수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언어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는 데도 단 한번도 나한테 무슨 당부말씀 같은 걸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소한 ‘영남아, 내가 이렇게 누워 있다고 너까지 기죽으면 안 된다. 꿋꿋하게 잘 살아라’라든가, ‘영남아, 서울에 누구누구를 찾아가 조승초 아들이라고 하면 무슨 얘기가 있을테니 부끄러워 하지 말고 찾아가보아라’ 정도의 당부같은 걸 해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구질구질한 말은 아예 입에 담지도 않았다.
‘금연’글씨와 성경책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고 나도 아버지 앞에서 미주알고주알 서울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누나 집에 얹혀 사는 게 어쩌구저쩌구 하는 얘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꺼낼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한테는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잘해내리란 확신이 있었을 테고 나한테도 어쨌거나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버지의 기대 이상으로 잘해낼 자신이 있었고 또 잘해내고 있었다.
고등학교때 우리 학급에는 의외로 아버지 없는 친구가 몇 명 있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아버지 없는 친구들이 무척 측은하게 느껴졌다. “왜 쟤네들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없는 걸까? 내 아버지는 아직도 살아 계신데…” 하면서 말이다. 병석에 누워 계셨지만 아버지는 내 삶의 기둥이었다.
자신이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또 자식들에 대해서 단 한마디의 불평도 없으셨던 아버지, 단 한 번도 뭐가 먹고 싶다는 얘기조차 입 밖에 꺼낸 적이 없는 내 아버지는 그렇게 하염없이 열세 해나 누워 계시다가 어느 겨울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의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눈을 뜬 채 누워 계시다가 단지 눈만 감았고 그후로 눈을 못 떴을 뿐이다. 아무것도 남긴 것 없이 오로지 성경 한 권과 오줌깡통 하나만 달랑 남겨놓고 말 그대로 눈을 감으셨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머리맡 풍경을 훤히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병들어 눕자 그의 머리맡에는 세 가지 새로운 물건이 등장했다. 첫째는 머리 위쪽 벽 흰 종이에 빨간 크레용으로 아버지가 한문 추사체로 멋지게 써놓은 ‘금연’이라는 표어였고, 둘째는 작은 오줌깡통이었으며, 셋째는 옆이 빨간색으로 칠해진 성경책 한 권이었다.
병석에 눕자 그토록 좋아하던 술은 자연적으로 끊게 되었는데 아마도 담배는 끊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하여간 아버지가 담배를 끊은 뒤에도 ‘금연’이라는 표어는 몇 해 동안 더 붙어 있었다. 오줌깡통은 병석에 눕자마자 자동적으로 등장하게 된 요긴한 도구였다. 문제는 성경책이다.
우리집에서뿐만 아니라 박천 조씨 대대로 내려오는 인물 중에 주일날 교회 안 나가는 사람은 오로지 조승초씨, 바로 내 아버지뿐이었다. 아버지는 그의 부인 김정신 권사님이 죽을 때까지 의지했던 주님(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또 다른 주님(술)을 더 선호해서 구태여 교회보다는 대폿집을 더 잘 나가셨다. 당신 스스로는 한사코 교회를 안 나가도 처자식들이 교회에 나가는 건 전적으로 지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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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인가. 또 있다. 시골엔 닷새마다 장이 서는데 장에 가면 반드시 식구마다 하나씩 양잿물덩어리를 사와야 했다. 빨래를 삶을 때 꼭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양잿물이 꼭 부서진 차돌멩이처럼 생겼다. 우리의 두목님은 해가 서산에 지는 파장녘이 되면 ‘꼬붕’들에게 돌멩이를 주워오게 했다. 그리고는 그걸 양잿물덩어리처럼 깨서 갱지로 포장까지 하고 지푸라기 한 가닥으로 질끈 묶어 진짜와 똑같이 만든 다음 길 위에 드문드문 흘려놓도록 시켰다. 그러면 장에 갔다 오는 사람들이 ‘이게 웬떡이냐’ 하고 슬금슬금 집어 가는 것이었다.
어릴 적 내 아버지에 관한 단편적인 기억들은 여기서 끊긴다. 더 이상 진도가 안 나간다. 달걀 한 꾸러미를 훔쳐서 도망친 놈을 장마당까지 따라갔다가 쓰러졌는데, 그 자리에서 완전 반신불수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원망하랴 하늘을 원망하랴. 이렇게 전반부 이야기는 그런대로 익사이팅했다. 그러나 이후 후반부의 얘기는 단출하기 그지없다. 한 자세로 쭉 간다. 죽는 날까지 말이다. 한도 끝도 없이 안방 아랫목이나 마루 위 혹은 앞마당 가마니때기 위에 누워 계시거나 쭈그리고 앉아 계신 모습.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우리집에는 가난이 태풍처럼 몰아쳤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그냥저냥 집에서 뭉그적거릴 수가 있었지만 고등학교 때는 달랐다. 아버지가 누워계신 집에 더 이상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가난을 피해서 큰누님과 형이 먼저 가 계신 서울로 밀려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혈혈단신 서울 가는 기차에 올라탔고 그 후 누나가 세들어사는 집에 얹혀서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시골 깡촌놈에서 하루아침에 일약 도시소년으로 변한 것은 분명 피치못할 사정으로 그리된 것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전화위복이었다. 깡촌놈에서 서울 유학생(?)으로 신분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가면 서울에서 왔다는 것이 여학생 사이에서 여간 큰 화제가 아니었다.
삽교면 두리2구 642번지
서울 생활은 물론 고생이 막심했다. 그때는 누구나 다 고생할 때였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고생이라고 느낄 줄 몰랐다. 따라서 나는 단 한번도 나를 고생하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다. 나는 그냥 서울에서 묵묵히 고등학교에 다녔다. 아쉬울 것도 없었다. 시골에 두고 온 병든 아버지나 아무 대책 없이 아버지 똥오줌을 손수 갈며 시중을 드는 어머니, 또는 혼자 남아 있는 내 동생 영수를 안타깝게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사는 게 내 팔자려니 했다. 나는 선천적인 낙천주의자였다. 다만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은 나를 너무나 들뜨게 했다. 아버지가 보고 싶거나 식구들이 보고 싶어서 그랬다기보다는 시골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랬다. 서울에서 대학까지 다니는 동안 최고의 기쁨은 방학 때 기차 타고 시골에 내려가는 것이었다.
나는 요즘도 명절 때 사람들이 시골 내려가는 기차표를 구하기 위해 서울역 광장에 구름처럼 모여 있는 광경을 TV같은 데서 보게 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건 결코 남 얘기가 아니었다. 그 옛날 나도 그런 인파에 섞여 있었다. 충청도 삽다리 정거장까지 가는 기차표를 손에 넣었을 때는, 아! 그때 나는 정말 세상을 정복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한테도 정말 더럽게 가난할 때가 있었다. 시골 가는 3등열차에 올라타면 나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무조건 난간 계단에 웅크리고 앉아 대여섯 시간을 그대로 갔다.
온종일 석탄먼지 같은 걸 뒤집어쓰고 거지 깍정이 같은 몰골로 삽다리역에 내려 낯익은 면사무소 앞 동네 장터 초등학교 옆에 붙어 있던 ‘충남 예산군 삽교면 두리2구 642번지 조승초씨’댁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면 앞마당 가마니때기 위에, 겨울이면 안방 남루한 이불 위에 쭈그리고 앉아 계시거나 드러누워 계시거나 늘 똑같은 장면이었다.
내가 느닷없이 아버지 앞에 나타나면 아버지는 금방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파리하던 얼굴빛이 순식간에 빨간색으로 변할 때는 ‘저러다 어떻게 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아버지는 불편한 얼굴 근육을 움직이며 빨개진 얼굴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하셨다. 그 흔한 대사, 말하자면 “아버지 그 동안 별고 없으셨어요?”라든가 “아들아 고생 많았지”라든가, 뭐 이런 따위의 대사가 일절 없었다. 어머니는 옆에서 흘러내리는 눈물 콧물만 훔치셨다.
대사가 삭제되었거나 몰수된 가족상봉에서 단지 아버지의 얼굴 빛깔만 빨갛게 달아올랐다는 건 나를 좋아했거나 사랑했다는 걸 훌쩍 넘어 당시 아버지의 유일한 기쁨이 서울서 내려오는 넷째아들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는 뚜렷한 증거다.
안방의 오줌 썩는 냄새
아무 말도 없이 마주보고 있는 게 괜히 서먹해서 나는 얼른 “아버지, 나 준묵이네 다녀올께” 하고 한마디 던지고 휑하니 친구네로 달려가곤 했다. 그때는 이메일도 휴대전화도 없는 총체적 교통두절의 시대라 그저 얼굴을 들이밀고 ‘나 왔다’ 하면서 나타나면 ‘너 왔냐? 은제 왔냐?’ 하고 반기는 게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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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에게 상점 건물과 모든 재산을 홀랑 뺏긴 조승초씨는 명당몰이라는 후미진 시골 농가에 밀려와 살던 중 1·4후퇴 때 가족 모두를 이끌고 피난 대열에 섞여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조씨는 좀 남달랐던 듯싶다. 아버지는 한 피난민한테서 잘생긴 말 한 필을 건네받는다. 왜 그걸 주고받았는지 그 이유는 알 길이 없다.
말(馬) 한 마리 끌고 사라지다
우리 일곱 식구는 신막 근처에서 피난열차에 올라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는데, 조승초씨는 식구들을 기차 위에 올려놓은 다음 자기는 말을 버리고 기차를 탈 수 없으니 서울서 만나자는 말(言)을 남긴 채 말(馬) 한 마리만 끌고 홀연히 떠나가시더란다. 그러자 내 누이와 형은 그 아비규환의 와중에 “여보세요, 여러분! 저기 처자식을 버리고 혼자 가는 우리 아버지 좀 잡아주세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급기야 조씨 부인은 막내를 둘러업은 채 “여보! 나도 같이가요!” 하며 따라 나섰단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부모팀과 자식팀으로 갈라져 피난을 가는 괴상한 이산가족이 된다.
물론 며칠 뒤 부모팀과 자식팀이 서울에서 예정대로 상봉을 하게 되지만 이쯤에서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자(DNA)의 실체는 대체로 드러난 셈이다. 자기가 무슨 예수라고 양새끼도 아닌 말 한 마리를, 아내나 다섯 명의 자식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던 내 아버지의 품성도 그렇고, 자기가 직접 낳은 자식새끼보다 말 한 마리를 끌고 가는 한심한 남편이 뭐가 좋다고 따라나선 내 어머니도 그렇다. 개(犬)판이 아니라 말(馬)판 가족이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더욱 기막히는 건 두 분 부모가 자식들을 버리고 떠난 다음 정작 자식들이 올라탄 기차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는 엄청난 사실이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서 다시 뭉친 우리 가족의 끼니를 위해 아버지는 목수로 변신하여 미군부대에 취직한다. 손재주가 좋으셨던 모양이다. 그 어려운 시절 우리 형제자매의 양말이나 손장갑은 늘 깨끗하고 멋졌다. 이것은 아버지(어머니가 아니다)가 밤마다 군용 낙하산 천에서 실을 뽑아 우리 형제의 양말이며 다섯 손가락 다 끼우는 장갑까지 일일이 짜주셨기 때문이다.
한편 아버지는 그 판국에도 술주정뱅이로 꽤나 명성을 날리신 모양이다. 피난살이에 속도 상했겠지만 술 살 돈이 없어 미군부대의 의약품용 알코올을 물에 타서 마셨다면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이북에 있을 때도 하필 양조장 주인이 친구라서 허구한 날 술을 퍼마시는 통에 아버지가 늦게까지 안 들어오시는 날이면 누나와 형이 리어카를 끌고 밤길을 헤매며 술 취해 눈밭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싣고 돌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란다.
“놀멘 놀멘 하라우!”
미군부대 잡부 노릇이 싫었던지 아버지는 먼저 피난 내려온 친구가 자리잡고 있던 충청도 삽다리로 식구를 몽땅 옮긴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쯤 됐을 때다. 아버지는 미군부대의 잘나가던 목수에서 시골 농부로 변신해서 고구마 감자 밭농사를 짓는 한편 돼지나 닭은 꽤 큰 규모로 키워나갔다. 당시 내가 아버지를 흉내내서 무슨 일이든 열심히 따라할라치면 늘 나에게 입버릇처럼 당부하곤 했다 “놀멘 놀멘 하라우!” 무슨 일이든 서둘지 말고 덤비지 말고 천천히 재미있게 하라는 의미의 이북 사투리였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자서전 비슷한 책을 쓰게 됐을 때 나는 책 제목을 서슴없이 ‘놀멘 놀멘’으로 정했다.
봄이 되면 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한테 큰 깡통 하나씩을 들려서 개구리나 뱀 따위를 잡아오도록 부추겼다. 그걸 많이 잡아오면 사탕 한두 알 사먹을 수 있는 현찰이 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 철로변을 따라가다 보면 겨울에 동면을 했던 개구리가 기어나와 단체로 선탠하는 광경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그놈들을 숙달된 솜씨로 무자비하게 낚아채서 깡통에 담아 아버지 앞에 대령하곤 했다. 좀 굵은 개구리나 뱀은 즉석 바비큐나 솥에 푹 끓여 탕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나머지는 잘게 썰어서 닭 모이에 섞어 주었다.
그 무렵 나는 아버지로부터 ‘록백꾸’(화투놀이 육백을 일본식으로 그렇게 발음했다)를 배웠는데 학교를 갔다오면 반드시 아버지를 상대로 록백꾸를 몇 판 쳐드려야 밖에 나가 놀 수 있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니까 내 아버지는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아들한테 화투놀이를 친히 가르쳐서 함께 화투패를 돌렸을 만큼 선천적으로 철이 안 드신 분이었다. 나는 지금도 화투나 카드놀이를 거의 못한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 록백꾸만큼은 선수급이었다.
내 아버지가 철이 안 들었다는 것은 괜히 해보는 소리가 아니다. 아버지는 동네 꼬마들의 장난질 치는 모임에서 실질적인 두목이었다. 우리의 두목님은 장날만 되면 우리더러 말꼬랑지를 여러개 뽑아오라고 시켰다. 아버지가 그걸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연결해서 맨 끝에 일원짜리 빨간 지폐를 달아 길 가운데에 늘어뜨려놓으면 우리는 판자 담장 안에 숨어 담장 틈새로 말꼬랑지 끝을 잡고 조종했다. 말꼬랑지는 거의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얼씨구나 하며 돈을 집으려고 손을 뻗치는 순간 우리는 담장 안에서 말꼬랑지를 살짝살짝 잡아당겨 돈을 집으려는 사람들을 놀려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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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묘를 가지 않는다. 내 아버지나 엄마가 그까짓 성묘에 오고 안 오고를 따질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보다 대폿집을 더 좋아한 조승초씨나 가짜꿀 만들어내던 김정신 권사님은 성묘를 하면 효자, 성묘를 안 하면 불효자로 여길 만큼 쫀쫀한 사람들이 아니다.




아버지와 내가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 나보다 궁상스럽게 보이는 동생 영수(가운데·부산대 음대 교수)가 지금은 휠씬 잘 생겼다.

나 의 삶과 나의 아버지에 관해서 말해보라니 그저 한숨만 나온다. 별로 할말이 없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의 삶은 한마디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아비는 선각자였느니라’ 하는 멋진 표현이 있지만 내 아버지는 그런 칭호를 받을 만한 인물이 애당초 아니었다.
입장을 바꿔 지금 미국 뉴욕에서 대학에 다니는 아들녀석에게 ‘대답하라, 네 아버지는 선각자가 아니었더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일찍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집을 나간 점, 아이들을 오로지 엄마 밑에서만 크게 했던 점, 뭐 이런 허물 몇 가지만 덮어준다면 지 애비를 어느 정도 선각자로 인정할지도 모른다. 지 애비가 평생 누린 가수로서의 명성을 봐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내 아들녀석에게 ‘정직하게 대답하라! 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고 묻는다면 아들녀석은 거침없이 대답할 것이다. ‘최악이었습니다. 웬수였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래위로 피장파장이다. 나는 내 아버지를 우습게 보고 내 아들은 나를 우습게 보고 내 아들의 아들은 내 아들을 우습게 보고…. 흡사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로 시작하는 시인 이상(李箱)의 오감도(烏瞰圖)식 패턴을 방불케 한다.
이렇듯 내 자신이 자타가 공인하는 아버지 자격상실자임에도 나는 뻔뻔스럽게 내 아버지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뭔가를 털어놓아야 한다. 임시로 그럴 수 있는 자격을 ‘신동아’에게서 부여받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몇 페이지에 걸쳐 내 아버지는 나의 포로며, 나의 인질이다. 아버지를 죽일지 살릴지 생사여탈권이 내 붓끝에 달렸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의기양양하다.
아버지가 선각자였다고?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부피는 참으로 옹색하다. 다 합쳐봐야 3분짜리 기록영화 한편이 될까말까다. 반신불수의 몸으로 가마니때기 위에 기약도 없이 쭈그리고 앉아 계시던 내 아버지! 그게 전부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풍으로 병석에 누우신 아버지는 대학생이 될 때까지 단 한 번 일어서 보질 못하고 세상 같지도 않은 세상을 마감했다.
아버지가 병에 걸릴 걸 미리 알았더라면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나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유심히 아버지를 관찰했을텐데…. 아버지는 예고도 없이 너무나도 일찍 아버지의 역할을 중단해버렸다. 따라서 내 아버지 조승초씨의 삶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중풍 걸리기 전과 중풍 걸린 이후의 삶이 그것이다. 아주 간편하다. 중풍 전에는 별 특징 없는 보통사람이었고 중풍 후에는 주욱 치유 불가능한 신체불구자였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부터 아주 어린 시절의 덜 성숙된 기억들을 더듬더듬 주워모아야 한다. 기억이란 원래 희미하고 뿌연 것인데 그걸 또 언어나 문자로 옮기다 보면 새로 꾸며낸 공상소설 되기가 십상이다. 공상소설이라도 잘만 쓰면 좋으련만 걱정이 태산이다.
지금은 이북의 수도인 평양 근교 안악인가 하는 어느 고장 박천 조씨(朴川 趙氏)집 3남매 중 막내였던 조승초 청년은 총각 시절 평양시내 기림리 근처의 제법 유명한 냉면집 외동딸을 만나 혼인을 하게 된다. 조승초 청년의 색시가 바로 나의 어머니 되는 김정신 권사님이다. 김혜길이라는 이름도 따로 있었는데 왜 이름이 둘인지는 자세히 안 물어봐서 모른다. 냉면집 어른, 따지고 보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내 외할아버지가 보시기에 시골서 땔나무를 등에 지고 와서 팔고 가는 청년이 꽤 괜찮았는지 무남독녀 외동딸을 덜컥 줘버린 형국이었다.
아홉 명 중 넷은 일찍 죽고
그후 조승초 김정신 두 사람은 일심동체가 되어 자식을 무려 아홉이나 낳았다고 한다. 나는 두 분의 특이한 업적을 십분 이해한다. 두 사람이 아홉 명의 자식을 만들어내다니…. 일제 말기라서 변변한 취미생활이 없었다는 증거일 터다. 물론 그중에 넷은 일찍 죽었다. 당시는 몇 명씩 죽는 게 관례였었다고 한다. 나는 나머지 다섯 중에 넷째였다. 지금 부산대학교 선생인 내 동생 조영수가 막내다.
우리 부모는 황해도 남천이라는 곳에 포목상 철물상 목재상을 겸한 ‘계림상회’라는 간이백화점을 세우고 남부럽잖게 살다가 6·25동란이 터지자 빨갱이세상이 싫어 소위 1·4후퇴 때 삼팔선 이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을 거둔다. 아! 그때 내 부모가 날 데리고 이북을 탈출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보나마나 아오지탄광에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뻔하지 않은가. 일단은 인민가수로 올라가지만 말을 막하는 고질병 때문에 일찍이 반동분자로 끌려갔을 것이었다. 하여간 내가 태어난 장소는 황해도 남천이다. 세간에 알려진 충청도 삽다리는 그러니까 제2의 고향이다.
주민등록증에는 내 출생년도가 1944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게 도무지 정확하질 않다. 아버지가 얼결에 피난 내려와 서울 성북동사무소에 새로 신고를 하면서 자식들의 출생년도를 대충대충 적어넣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큰누나의 주장은 내가 1945년 해방둥이라는 거다. 어머니는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퍼질 때 핏덩어리인 나를 안고 어디론가 뛰어간 기억이 생생하단다. 그러니까 나는 1944년과 1945년 중간쯤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4월2일이라는 생일도 아버지가 지어낸 가공의 날짜라는 주장이며 그게 음력인지 양력인지 아무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그런 걸 생판 모르는 채 나는 지금껏 잘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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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영화에 김 감독의 삶이 배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이 있죠. 다른 감독이 배워서 영화를 만든다면 저는 살면서 영화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책 따위는 별로 읽지 않아요. ‘수취인불명’이 제 삶을 가장 많이 담은 영화죠. ‘해안선’에는 해병대에서의 경험이, ‘야생동물보호구역’에는 프랑스에서의 경험이 녹아들어갔고요. ‘나쁜 남자’와 ‘사마리아’는 간접적으로만 바라봤어요. 나머지 영화들은 현실에서 모티브를 잡고 제 상상의 나래를 편 작품들입니다.”
어느덧 약속한 2시간이 지나갔다. 김 감독은 오후 5시에 경기도 일산 근처에서 약속이 있다고 했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벽을 허물고 이제 좀 속 깊은 얘기를 해볼까 했더니 시간이 다 가버린 것이다. 그래서 일산으로 가는 김 감독의 2인승 코란도에 무작정 올라탔다. 그렇게 인터뷰가 이어졌다.
-차가 2인승이네요.
“지난해부터 운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지하철을 타고 다녔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요즘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좀 곤란해요(웃음). 차는 곧 바꾸려고 해요. 2인승이라 가족과 같이 움직이려면 아무래도 불편하더군요.”
“아내에게 항상 미안해요”
그는 결혼도 했고 초등학교 2학년짜리 딸도 있고 노부모도 살아계시다.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후에도 “가족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그는 “반지도 없고, 행색도 그렇고, 영화를 봐도 결혼했을 것 같지 않은지 사람들은 내게 좀처럼 결혼했냐고 묻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가족에 대해 말을 아끼는 건 사실이다.
“아버지에 대해 별 생각 없이 한 얘기들이 아버지께 너무 큰 상처가 됐어요. 이젠 웬만하면 가족 이야기를 안 하려고 합니다. 제가 영화감독이지 가족이 감독인 것은 아니잖아요. 저로 인해 그들의 삶이 방해받으면 안 되죠. 특히 딸아이가 아버지 때문에 특혜를 받거나 상처를 받는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 같아요.”
-부인과 사이는 좋으신가요?
무례한 질문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1993년 결혼한 부인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저 프랑스에 있을 때 편지로 교제했다는 정도말고는. 혹시 그가 영화에서 그린 것 같은 사랑을 하지는 않았을까 궁금했다.
“노코멘트. 가족 이야기는 안 할래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또 아내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사이가 좋은지 묻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자체가 아내한테 미안한 일이죠. 또 제 영화가 그리는 사랑의 이미지는 그 사람과 무관합니다.”
-사랑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남녀간의 사랑을 묻는 거죠? 그건 남녀가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이겠죠. 만나자마자 손잡고 껴안고 섹스할 수도 있고요. 한순간 쾌락일지라도 그때만큼은 사랑이죠. 하지만 사랑은 일방적인 강요가 되어선 안 돼요. 그런 면에서 제 영화의 사랑과 제가 추구하는 사랑은 다르죠. 저는 사람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냥 느낌이 좋으면 편안해하고 좋아해요. 하지만 제 사랑을 강요하진 않죠. 싫다고 하면 깨끗하게 놓아줘요. 제 사랑이 또는 제가 추구하는 쾌락이 상대방에게 고통이 되어선 안 되니까요. 그렇기에 사람과 관계 맺기를 굉장히 두려워하죠. 편해지는 느낌, 좋아하는 마음이 두려워요. 내가 약해질까봐, 또 상처받을까봐. 그런 후유증은 정말 오래가거든요.”
내친김에 무례한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그와 관련된 소문들에 대한. 예상한 대로 그는 발끈했다.
“좀전에 말했듯 저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강요하는 사람도, 그걸 이용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 루머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는지, 정말 무서워지는군요.”
세심하고 연약한 사람
어느덧 일산이다.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기에 지하철 3호선 원당역 근처 자그마한 동산으로 산책을 갔다. 제법 찬 가을바람에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그는 오솔길을 걸으면서 길가에 떨어진 밤을 줍더니 대충 껍질을 벗겨 입속에 넣는다. 기자에게도 하나 건넸다. 한입 깨무니 고소하다.
“집 근처라 종종 혼자서 오곤 해요. 땅에 떨어진 밤을 주워 먹기도 하고, 차에 혼자 누워서 낮잠을 자기도 합니다. 시골 태생이라 그런지 이런 곳에 오면 마음이 차분해져요.”
느낌이 달랐다. 이 사람이 아까 전통찻집에서 우리 영화계에 대해 날 선 독설을 퍼붓던 그 사람인가. 그는 거듭 말한다. 자신은 무척이나 세심하고 쉽게 상처받는 연약한 사람이라고. 그랬다. 그는 자신의 한마디, 행동 하나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비칠지 걱정하고 또 걱정했다. 거친 외피 안에 부드러운 속살을 감추고 있는 생률(生栗) 같은 사람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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