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옹색했다. 심지어는 빈 깡통 하나 구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ㄷ’자 모양으로 늘어선 우리 시골집은 당시 우리 동네에선 중류 이상으로 꼽혔는데,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앞채를 팔고, 사랑채는 가짜꿀 만드는 젊은 부부에게 월세를 주고, 우리 식구는 방 두 개짜리 가운데 토막에 살았다. 아랫방엔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내 막내동생이 기거하고 웃방엔 작은누나와 내가 살았다. 안방과 웃방 사이엔 사람이 들락날락할 만한 구멍을 냈다. 어머니가 자리를 잠시 비웠을 때 웃방의 우리가 안방으로 잽싸게 건너갈 수 있는 특수 장치였다.
나는 안방으로 건너가는 게 싫었다. 안방에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병들어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싫어서가 아니라 어린 마음에도 오줌 썩는 냄새가 너무 지독했기 때문이다. 요강으로 받아낸 똥은 담장 밖에 있는 밭 가장자리로 버리곤 했지만 정작 오줌 처리가 더 큰 문제였다. 처음에는 작은 오줌깡통에 받아낸 걸 뒷마당 빨래터 물 내려가는 쪽으로 버리면서 동시에 우물물을 퍼서 그 위에 끼얹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아버지의 오줌은 그냥 안방 뒷문을 통해 우물가 쪽으로 휙 뿌리는 방법으로 굳어졌다. 신발을 신고 우물가 곁으로 몇 발짝 걸어가 거기다 버리고 물을 끼얹는 일이 점점 귀찮아진 탓이었다. 따라서 우리집 뒤뜰은 1년 내내 오줌냄새로 찌들어갔다. 특히 오줌 받는 깡통을 자주 새것으로 갈아대질 못해 깡통 안팎엔 온통 진초록색 이끼 같은 게 끼었고 거기서 풍겨나오는 냄새는 사람을 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아직까지 아버지의 오줌깡통 냄새보다 더 지독한 악취를 맡아본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아버지는 왼쪽이 완전히 마비된 상태의 신체 불구자였지만 정신만은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이 멀쩡했다. 말도 큰 불편 없이 구사할 수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언어에 아무런 장애가 없었는 데도 단 한번도 나한테 무슨 당부말씀 같은 걸 남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소한 ‘영남아, 내가 이렇게 누워 있다고 너까지 기죽으면 안 된다. 꿋꿋하게 잘 살아라’라든가, ‘영남아, 서울에 누구누구를 찾아가 조승초 아들이라고 하면 무슨 얘기가 있을테니 부끄러워 하지 말고 찾아가보아라’ 정도의 당부같은 걸 해주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구질구질한 말은 아예 입에 담지도 않았다.
‘금연’글씨와 성경책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고 나도 아버지 앞에서 미주알고주알 서울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누나 집에 얹혀 사는 게 어쩌구저쩌구 하는 얘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꺼낼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한테는 어떠한 경우에도 내가 잘해내리란 확신이 있었을 테고 나한테도 어쨌거나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한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상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버지의 기대 이상으로 잘해낼 자신이 있었고 또 잘해내고 있었다.
고등학교때 우리 학급에는 의외로 아버지 없는 친구가 몇 명 있었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아버지 없는 친구들이 무척 측은하게 느껴졌다. “왜 쟤네들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없는 걸까? 내 아버지는 아직도 살아 계신데…” 하면서 말이다. 병석에 누워 계셨지만 아버지는 내 삶의 기둥이었다.
자신이나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또 자식들에 대해서 단 한마디의 불평도 없으셨던 아버지, 단 한 번도 뭐가 먹고 싶다는 얘기조차 입 밖에 꺼낸 적이 없는 내 아버지는 그렇게 하염없이 열세 해나 누워 계시다가 어느 겨울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의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눈을 뜬 채 누워 계시다가 단지 눈만 감았고 그후로 눈을 못 떴을 뿐이다. 아무것도 남긴 것 없이 오로지 성경 한 권과 오줌깡통 하나만 달랑 남겨놓고 말 그대로 눈을 감으셨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의 머리맡 풍경을 훤히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병들어 눕자 그의 머리맡에는 세 가지 새로운 물건이 등장했다. 첫째는 머리 위쪽 벽 흰 종이에 빨간 크레용으로 아버지가 한문 추사체로 멋지게 써놓은 ‘금연’이라는 표어였고, 둘째는 작은 오줌깡통이었으며, 셋째는 옆이 빨간색으로 칠해진 성경책 한 권이었다.
병석에 눕자 그토록 좋아하던 술은 자연적으로 끊게 되었는데 아마도 담배는 끊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하여간 아버지가 담배를 끊은 뒤에도 ‘금연’이라는 표어는 몇 해 동안 더 붙어 있었다. 오줌깡통은 병석에 눕자마자 자동적으로 등장하게 된 요긴한 도구였다. 문제는 성경책이다.
우리집에서뿐만 아니라 박천 조씨 대대로 내려오는 인물 중에 주일날 교회 안 나가는 사람은 오로지 조승초씨, 바로 내 아버지뿐이었다. 아버지는 그의 부인 김정신 권사님이 죽을 때까지 의지했던 주님(예수 그리스도)보다도 또 다른 주님(술)을 더 선호해서 구태여 교회보다는 대폿집을 더 잘 나가셨다. 당신 스스로는 한사코 교회를 안 나가도 처자식들이 교회에 나가는 건 전적으로 지지하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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