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로로 대학축제 사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됐습니까.
“1996년에 2군사령부 문선대에서 제대한 뒤 모교인 계명문화대학 관광과 졸업생 환송회에서 처음으로 사회를 봤습니다. 우연히 그 자리에 참석했던 다른 과 대표들이 자기네 과 사회도 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차비 정도인 2만~3만원을 받고 해줬어요. 소문이 나면서 다른 학교 모임에도 가게 됐죠. 그러다 대학축제를 전문으로 하는 이벤트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대학축제 전문 MC가 된 거죠.
여기저기 대학축제에 돌아다니다가 삼성라이온즈 대구구장의 장내 아나운서를 하게 됐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지금 이렇게 사인을 해줄 만큼 유명해진 것이 실감 나지 않습니다.”
그는 무명시절인 1998년 김천과학대학 축제에서 MC를 맡았을 때를 잊지 못한다. 그날 인기 정상의 가수가 오기로 돼 있었다. 오직 그 가수를 보기 위해 수많은 여고생이 전세버스를 타고 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여고생들은 빗속에서도 가수를 기다리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가수로부터 한 시간 반 정도 늦는다는 연락이 왔다. 그가 무대 위로 올라가 사정을 말하고 “한 시간 반 동안 뭘 할까요?”라고 물었다. 속았다고 생각한 청중들이 무대를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유명 연예인이 나온다는 포스터를 붙여 사람을 끌어놓고 실제로는 오지 않는 속임수가 많을 때였다. 여고생들은 울부짖었다.
그는 “날 믿어달라. 한 시간 반 동안 지루하지 않게 해드리겠다”며 청중들과 똑같이 비를 맞기 위해 무대 위의 천막을 걷었다. 온몸에 물을 붓고 운동장에서 구르며 머드팩을 했다. 신발을 벗어 박수를 치는 등 별의별 짓을 다했다. 그렇게 한 시간 반이 지나 가수가 왔는데, 진흙투성이 MC가 무대에서 내려와야 무대에 오르겠다고 말했다. 서러웠다.
그가 내려간 뒤 가수가 올라와 손을 흔들며 “안녕하세요”라고 말하자 관객의 절반이 기절했다. 가수가 내리 세 곡을 부르고 떠난 후 그가 마무리 멘트를 하기 위해 무대 위로 올라갔을 땐 관객 대부분이 빠져나가 썰렁하기 그지 없었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가 무대에서 내려와 소주를 한잔 하고 있는데 안 온다던 여자친구가 왔다. 그녀가 “저 사람들은 오빠를 잊어도 나는 오늘 오빠 모습 영원히 기억할 거야”라고 말했다.
-그 가수가 누구였습니까.
“이름을 밝히면 그분한테 피해가 가요. 그분도 본의가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나하고 친하게 지냅니다. 인기 정상의 가수지요. 내가 김천과학대학 축제 머드팩 이야기를 했더니 ‘그때 그놈이 너였어?’라며 웃어요.”
난쟁이 콤플렉스
-강미은 교수 책에 김형의 용모에 대해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라고 했더군요. 김형이 방송에서 “꽃미남이 부럽다” “잘생겼다고 재산세 내고 못생겼다고 오물세 내냐”는 식으로 용모 이야기를 자주 하던데, ‘얼꽝’도 상품화가 되나요.
“김용만씨는 나를 보고 농담삼아 ‘너 참 난(難)하게 생겼다’고 해요. 강호동 선배는 나더러 ‘인간과 동물의 중간단계’라고 놀려요.”
-그건 강호동씨가 자기소개하는 얘기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형도 그 계통에 포함된다고.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서 서로 웃는 거죠. 사춘기 때는 콤플렉스가 심했습니다. ‘못생긴 놈이 설친다’는 얘기나 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의식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고 할까요.
내게 난쟁이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면 사귀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대신 왕자님하고 공주님 떠나실 때 태워드릴 백마를 찾습니다. 좋아하는 여성에게 도전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상처받을 걸 예견하고 스스로 상처내버리고 끝내는 거죠. 여자에게 내가 먼저 좋아한다고 얘기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대한민국 여성들이 좋아하는 남성 10명 안에 드는 것 아닙니까.
“여성들을 상대로 조사해보면 제가 친한 친구에게 소개하고 싶은 연예인 1위로 나옵니다. 자기가 갖기는 싫고 생판 남 주기는 아까우니까 친구한테 주고 가끔 만나고 싶은 거죠. 견공(犬公)에 비유하고 싶지는 않지만 안방에 들여놓기는 싫고 마당 같은 데서 키워보고 싶은 거죠. 그러니까 나를 연애 또는 결혼 상대로 보기보다는 약간 중성적인 대상으로 보는 것 같아요. 여성 팬들이 ‘오빤 정말 친오빠 같애’ 하면 환장하겠습니다. 친오빠하고 결혼하는 여자 봤습니까. 나한테 사인받기 위해 몰려드는 여대생들도 마찬가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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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 어록’

-김형도 유능한 작가를 몇 명 붙이면 콘텐츠가 더 풍부해지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적어준 이야기로는 내가 경험하거나 생각해낸 것만큼 표현할 자신이 없습니다. 외워서 하는 것보다는 안에서 숙성시켜 내 것으로 만들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텔레비전 보고 라디오 듣고 신문과 책을 읽죠. 그도 저도 아니면 술 먹으며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요. 소형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며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들을 녹음해둡니다.
‘야심만만’은 여덟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하는 프로그램이죠. 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하려고 노력합니다. 잘 정제돼 있거나 미리 만들어놓은 대화는 아무래도 인위적인 냄새가 나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군더더기 하나 없이 매끄럽게 깎아놓은 목각인형보다는 아이들이 그냥 손으로 주물러놓은 찰흙인형이 더 감동을 주지요.”
김제동은 대본에 없는 애드리브에 강하다는 평을 듣는다.
-어록을 출판하자고 제의하는 출판사가 여럿이라지요.
“‘김제동 어록’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해서 그게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왕릉은 세월이 흐르고 나면 왕의 것이 아니고 왕을 만들어준 백성의 유산이 됩니다. 김제동 어록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제동닷넷(kimjedong.net)에서 팬들이 만들어 올려놓은 ‘김제동 어록’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한 말을 깔끔하게 정리해놓았더군요. 방송에서 순간적인 감정을 표출하고 나서 정작 나는 잊어버린 것도 있는데….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친구들한테 선물하기 위해 어록을 뽑아 복사해 책으로 만들어 돌리더라도 괜찮습니다. 김제동닷넷과 인터넷 팬카페 회원들이 뜻을 모아 책을 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은 어록을 만든 팬들한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팬카페에서 방송 대사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습니까.
“대사는 물론이고 활동방향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팬이 들은 이야기나 경험담을 올려놓으면 적당히 가공해서 써먹을 때도 많죠. 좋은 후원자들입니다.”
-팬레터나 선물은 어느 정도나 옵니까.
“팬카페가 생겨선지 편지는 많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 활자를 좋아하는데요. 옷을 선물하는 팬도 있어요. 그래서 홈페이지에 선물 보내지 말라고 글을 올렸어요. 팬들이 대부분 학생이거든요. 돈을 벌어도 내가 더 벌 거 아닙니까. 가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옷이나 신발을 사서 보내오는 경우도 있는데, 내 선물 사느라 자기 거는 못 샀을 것 아니에요. 그래도 선물을 주는 게 기쁨인데 그걸 막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항의가 나오길래 선물을 하려면 8000원 이내의 책으로 해달라고 그랬습니다.”
-신문 스크랩하며 메모하는 게 취미라면서요.
“신문을 그냥 보면 허투루 읽게 돼서자를 대고 볼펜으로 밑줄을 긋고 그 밑에 내 생각을 적어봅니다. 세상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신문을 다섯 가지 구독합니다. 논설위원 선생님 앞에서 건방진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사설 중에도 공감하는 사설이 있고 내 생각과 다르게 느껴지는 사설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일기처럼 적어놓습니다. 그렇게 한 게 두꺼운 스크랩북으로 10권이 넘어요. 습관이 돼 하루라도 안 하면 찝찝해져요. 일종의 취미생활이지요.
고속도로 휴게소 남자화장실에 붙어있는 명언도 좋은 게 있으면 메모해놓습니다. 일주일 만에 명언을 교체하는 휴게소도 있고 한달 만에 교체하는 데도 있죠…. 방송에서 자주 써먹었어요.”
-어느 휴게소가 가장 낫던가요.
“단연코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칠곡휴게소죠. 여자화장실엔 어떤 걸 붙여놓았는가 들어가보고 싶을 정도예요. 거기서 읽은 것 중에서 팬들한테 회자되는 어록으로 발전한 게 꽤 있어요.”
잊히지 않는 대학축제 MC의 서러움
그는 1999년 모교인 대구 계명문화대학 축제에서 MC를 하다 윤도현밴드를 처음 만났다. 윤도현밴드 사람들은 시골 MC를 대수롭잖게 보고 무대에서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았다. 공연 도중 한 연주자의 기타줄이 끊어져 갈아끼우는 동안 그가 무대에 올라가 시간을 때웠다. 그 다음부터 윤도현밴드 사람들은 대학축제 MC 중 김제동이 제일 낫다는 말을 했다.
윤도현밴드의 제의로 순회콘서트를 같이하게 됐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30분 동안 청중들의 분위기를 띄우는 바람잡이 역할이었다. 김제동은 바람잡이 대신 ‘사전 MC’라는 말을 좋아한다.
“내가 텔레비전에 출연할 수 있으리라고는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사투리 쓰죠, 얼굴 못생겼죠. 윤도현씨가 KBS 2TV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사전 MC를 해달라고 불렀을 때 서울 쪽 대학의 축제를 맡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긴 했습니다. 가방에 달랑 책 4권 들고 서울에 올라왔어요. 홍익대 앞에 있는 여관에서 3개월 정도 묵으며 방송국에 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말수가 별로 없는 리듬 앤드 블루스(R&B) 가수들이 초대됐다. 분위기가 어찌나 무겁고 딱딱했는지 분위기를 띄우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걸 본 PD가 “바람잡이 하는 친구 재밌다”며 “한번 녹화해둬봐라”고 했다. 방송에 양념으로 나갔는데 반응이 괜찮았다. 하지만 그날뿐이었다. 몇 달 더 바람잡이를 하다 ‘리플해주세요’라는 고정코너를 맡았다. 인터넷에 올라온 시청자들의 리플을 윤도현과 함께 읽어주고 코멘트를 하는 역이었다.
그러다가 ‘폭소클럽’(KBS2) ‘컬럼버스 대발견’(SBS)에 나오면서 여기저기서 연락이 쇄도해 지난해 5월경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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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리브의 達人, MC 김제동
“내 유머의 콘텐츠는 숙성시켜 내 것으로 만든 것”


● 신문 스크랩하며 기록한 메모, 스크랩북 10권 넘어
● 안경 벗으면 웃기지만,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 전혀 없다
● 좋아하는 여성상, 말수 많고 쾌활하고 활달하고 장난 잘 치는 여성
● 좋아하는 일 하면서 경제적 가치 창출되니 너무 좋아
● 과분하게 받은 사랑, 뭔가 돌려드릴 방안 생각중
● 나이 들어도 마이크 못 놓을 것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나오는 ‘얼짱 시대’에 김제동(30) 같은 연예인이 뜨는 건 흥미로운 현상이다. MC이자 코미디언인 김제동은 거울을 볼 때마다 좀더 키가 크고 잘생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사방에서 그를 찾는 러브콜이 폭주한다. SBS ‘실제상황 토요일’ ‘야심만만’, KBS 2TV의 ‘해피투게더’ ‘윤도현의 러브레터’, MBC ‘행복주식회사’ ‘까치가 울면’ 등에 출연하고 있다. 인기가 오르면서 CF도 3편이나 찍었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대구 부근 대학 축제에서 사회를 보던 무명의 MC가 이처럼 단기간에 무서운 속도로 뜬 것이 신기할 정도다.
숙명여대 강미은 교수는 ‘통(通)하고 싶은가’란 책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달인으로 강금실 법무부 장관,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 등과 나란히 김제동을 꼽았다. 강 교수는 김제동을 단순한 개그맨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 줄 아는 커뮤니케이터라고 평했다.

《‘김제동의 말에는 메시지가 있다. 그냥 말장난으로 사람을 웃기는 것이 아니라 힘 있는 메시지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김제동의 커뮤니케이션은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조화가 완벽하다. 신문에 밑줄 쳐가며 공부해서 얻은 아이디어건, 개그학원에서 배운 내용이건, 그 내용이 순간순간의 컨텍스트와 완벽하게 맞춰서 나오기 때문에 상품이 된다.’》
“내 대본은 책과 신문에서 나온다”
에이스미디어는 김제동의 매니지먼트 회사다. 김제동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만 4명이다. 에이스미디어 사장실에서 3시간 동안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저녁 7시30분이었다. 신촌 이화여대 앞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제의했다. 그가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인기 있는지 현장에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지하철 2호선 이대입구역 옆에서 김제동이 차에서 내리는 순간 지나가던 7, 8명의 여고생이 그를 발견했다.
“제동이 오빠다. 오빠! 오빠!”
이대 정문까지 가는 동안 김제동을 발견한 여고생, 여대생들이 너도나도 디카폰(디지털 카메라폰)을 펴들고 사진을 찍었다. 보통 70만원쯤 하는 디카폰을 안 가진 젊은이가 없었다. 김제동은 짜증내지 않고 낙지집을 찾아들어갈 때까지 사인 및 디카폰 촬영 요구에 친절히 응했다. 연세대에서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비결’에 관한 김제동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한 여학생이 말했다.
“어머니가 아무리 힘들어도 사인 요구를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나를 먹고 살게 해주는 사람들인데 빚을 갚아야 한다는 거죠.”
-김제동 어록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인기를 끌더군요. 어록을 카툰으로 그린 책도 나왔고…. 김제동 어록이 뜨면서 아류도 나온다지요. 김형은 스스로 콘텐츠를 만든다지요.
“대본은 내가 읽은 책, 신문에서 나오는 겁니다. 작가들이 직접 써주지는 않지만 내게는 보이지 않는 작가가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 어머니와 누나들이 작가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지난해 100세를 일기로 작고한 미국의 코미디언 보브 호프는 작가 100명을 고용해 재담 제작소를 운용했다. 보브 호프의 재담은 재치가 번득이는 어록을 많이 만들어냈다. 김제동 어록도 보브 호프 어록에 못지않다.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죠. 우리는 네잎 클로버를 따기 위해 수많은 세잎 클로버를 짓밟고 있어요. 세잎 클로버의 꽃말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행복이랍니다. 우리는 수많은 행복 속에서 행운만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랑은 ‘그렇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고 하는 남자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인생은 우표처럼 살아야 됩니다. 딱 붙어서 목적지까지 가야 되니까.”
“방위는 죽지 않는다. 다만 총소리에 기절할 뿐이다.”
“죽고 싶을 때는 병원에 한번 가보십시오. 죽으려고 했던 자신이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내가 버리려고 했던 목숨을 그들은 처절하게 지키려 애쓰고 있습니다. 흔히 파리 목숨이라고 하지만 쇠심줄보다 질긴 게 사람 목숨입니다.”
“남자는 술을 먹되 취하지 않고, 취해도 비틀거리지 않고, 비틀거리되 쓰러지지 아니하고, 쓰러지되 무릎 꿇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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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나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도 있다. 충분한 이유가 있다. 열한 살 이후로 아버지는 나한테 뭐 하나 해준 게 없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평생 남편 대소변 가리느라 서울에 올라간 아들 걱정해줄 여력이 없었다. 나는 누가 뭐래도 혼자서 컸다. 아버지, 엄마는 날 낳아주었을 뿐이었다.
혹자는 내 아버지가 나한테 노래 부르는 재주, 그림 그리는 재주를 물려주었지 않느냐고 항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따져봐야 한다. 그게 아버지로부터 의도적으로 물려받게 된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내 아버지가 그의 파트너 김 권사님과 나를 만들던 날 밤 ‘여보! 이번엔 노래 잘하고 그림 잘 그리는 놈으로 만듭시다’ 하고 작업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 내 예상대로라면 평소 술김에 아내를 한번 건드린 건데 재수 좋게 찐한 DNA가 떨어졌을 뿐이었다. 자기네들은 장차 대단한(?) 인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내 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계획성 있고 민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결국 아버지는 자기 넷째아들이 일약 성공하기 바로 직전에 세상을 뜨셨고 어머니는 아들이 성공을 했어도 10여년간은 실감을 못하시다가 결국 남편 곁으로 가셨다. 어머니는 이상하게도 막내인 내 동생한테 애착을 많이 가지셨는데, 일찍 저세상으로 가시는 바람에 나와 내 동생이 TV에서 함께 노래하는 걸 못 보여드린 게 큰 한으로 남아 있다. 정말 좋아하셨을텐데 말이다.
이젠 나도 환갑에 가까웠으니 마무리를 해야 할 때다. 밖으로 말을 안 했지만 나는 아버지 때문에 40대 중반부터 엄청 스트레스에 시달려왔다. 중풍은 세상이 아다시피 유전성이 높다는 거다. 그래서 나도 어느 날 중풍에 걸리는 게 아닌가 수시로 그런 따위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작은누나까지 중풍 비슷한 뇌출혈로 갑자기 죽어 넘어가는 바람에 나의 불안과 공포는 심각한 지경까지 갔었다.
총체적으로 나는 치사한 자식이다. 불효자식이다. 아버지도 그랬으리라 추측되지만 적어도 내 어머니 김정신 권사님만큼은 믿거나 말거나 내가 목사가 되길 그토록 기도했었다. 그러나 나는 신학공부를 마친 뒤로 ‘여타 종교로부터 완전 해방됐노라’ ‘더 이상 종교는 사양하노라’고 큰소리를 치고 다닌다. 불효막심이다.
이제 나는 내 아버지, 내 엄마, 내 자식, 내 친구들, 내 동료들로부터 야단맞을 일만 남았다. 어느 날 대명천지에 날벼락이나 맞으면 만사가 해결될 일이다. 그런데 날벼락 맞을 확률은 로또 확률보다 더 희박하단다. 그래서 나는 죽은 후에라도 사람들로부터 야단맞을 기회를 줄이기 위해서 우선 내 시신을 의과대학 실험용으로 보내는 데에 동의했고 혹시라도 뼈가 남으면 아무렇게나 태워서 한강 아무데나 뿌릴 것을 서면으로 명시해놓았다(신동아 2001년 2월호에 실린 ‘미리 쓰는 나의 유언장’을 참고하기 바란다).
나 죽은 뒤 내 노래만 틀어봐라
나는 장례식을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가 죽어서 슬프다는 핑계로 방송에서 내 노래를 트는 것까지 엄하게 규제해놓았다. 그런 놈이 있으면 내가 황천길을 가다가 뒤돌아서 방송국으로 그놈을 찾아가 모가지를 잡고 ‘왜 내가 살아 있을 땐 안 틀더니 내가 죽으니까 트느냐’며 황천길로 즉시 끌고 온다는 것까지 못박아놓았다.



趙英男
●1945년 황해도 남천 출생
●1968년 서울대 성악과 명예졸업
●1970년 ‘딜라일라’로 가수 데뷔
●1979년 미 트리니티신학대 졸업
●1996년 한국방송대상 가수상 수상
●KBS ‘체험 삶의 현장’ ‘조영남이 만난 사람’ 진행

왜 그렇게 쫀쫀하게 구냐고 묻지 마라. 내가 평소에 걸핏하면 ‘내 아버지의 병이 나한테는 약이었습니다’라고 공공연히 떠들어댄 죄값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묘비명이다. 내깐에는 멋지게 지었는데 그걸 못 써먹게 생겼다. 조승초씨한테는 애당초 묘비명이 없었다. 그런 게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한테는 언제부턴가 묘비명이 생겼다. 그걸 만들어놓고 얼마나 희희낙락했는지 모른다. 딱 네 글자다. ‘웃다 죽다’. 죽이지 않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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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권사님의 가짜꿀 만들기

내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가 병을 얻게 된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분석되었다. 주로 어머니쪽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이 벌을 내렸다는 것이었고, 일반 동네 사람들은 술 때문에 망가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어느 쪽 얘기가 맞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병으로 눕게 된 아버지의 머리맡에는 연유를 알 수 없는 물건 하나가 깜짝쇼처럼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책이었다. 장장 13년 동안 아버지의 유일한 낙이 성경책 읽기였던 모양이다. 큰누님의 증언대로라면 아버지는 어찌나 성경을 많이 읽었던지 나중에는 누님이 ‘이사야서’하면 눈감고 손가락을 성경에 얹어 탁 펴면 정확히 이사야서를 펼칠 수 있을 만큼 성경의 달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남편과는 딴판으로, 조씨 부인 김정신 권사님은 외할머니 뱃속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예배당에 다녔다. 김 권사님의 신앙심은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그런데도 김 권사님은 사랑채에 세든 부부의 가짜꿀 만드는 일을 10년 동안이나 도와주셨다. 가짜꿀을 만들기 위해선 엿기름부터 고아야 하는데 연탄도 없던 시절이라 나무를 때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커다란 솥단지에 엿기름을 부어 끓기 시작하면 주걱처럼 생긴 작대기로 한도 끝도 없이 저어야 했다. 물론 우리의 김 권사님은 “주여 주여” 하고 기도를 하면서 혹은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같은 찬송가를 부르면서 가짜꿀 만드는 일에 적극 동참했다.
내가 나중에 신학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아니, 그 유명한 권사님이 어쩌다 10년간이나 가짜꿀 만드는 일을 도와줄 수가 있었소” 하고 묻자 권사님은 숨도 안 쉬고 “안 그러면 집세가 안 나오는 걸 어카간” 하고 대답했다. 10년간이나 가짜꿀 동업자였던 김 권사님이 천국에 갔을까, 막판에 독학으로 성경을 독파한 술주정꾼 조승초씨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런 건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건 사실 하늘도 판단 못할 일이다. 판단했다면 순 엉터리다.
단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드러눕는 자리를 경기도 군포 어느 언덕배기로 대폭 옮겨가자 내 주위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먼저 죽은 남편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가 그랬다. 우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가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병치레며 오줌깡통과 똥요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실상은 그 반대로 돌변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떠나가시고 13년 만에 안방 이부자리가 치워지자 해방은커녕 어머니는 오히려 깊은 시름에 젖는 듯싶었다. 13년간이나 아버지를 구박하던 어머니였다. “영감탱이, 칵 죽어버리지 않구”하면서 늘 투덜대던 어머니였다.
조영남, 조강지처에게 쫓겨나다
그러나 막상 남편이 죽자 불구남편이 무슨 남편 구실을 했다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몹시도 그리워하는 듯했다. 그것은 내가 생전 처음 깊숙이 들여다보게 된 인간 본체의 신비로움이었다. 아! 그토록 징글징글하게 일방적으로 고생만 시키던 남편을 그리워하다니, 이보다 더한 인간의 모순, 인간의 신비로움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 후 우리는 성묘날만 되면 살아 있는 조씨의 아내를 모시고 아버지 묘지를 찾아갔다. 그런데 해가 서산에 걸려 모두가 일어서도 끝끝내 일어설 줄 모르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조씨의 부인 김정신 권사님이다. 어머니가 살아계신 동안 유일한 낙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오로지 남편 무덤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그것으로 나는 또한 내 아버지가 자기 여자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남자 중의 남자였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깨닫게 됐다.
아! 나도 바로 그 점이 아버지를 닮았어야 하는 건데. 아! 그 옛날, 왕년에 기생집에서 그토록 인기를 끌었다던 내 아버지가 어쩐 일로 한 여자와 딱 한번만 결혼하고 죽을 때까지 그 한 여자로 끝을 낼 수가 있었을까? 얼마나 좋았으면 한 여자와 아홉 명의 자식을 만들 수가 있었을까? 그런 식으로 살펴보면 일찍이 조강지처한테 쫓겨나고 자기가 낳은 자식조차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또 다른 여자를 만나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고 두 번씩이나 같이 살던 여자와 맥없이 갈라서게 된 나 조영남은 조승초씨의 친아들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토록 판이할까?
‘성묘는 귀찮아’
어느덧 조승초씨의 부인 김정신 권사님도 세상을 하직한 채 남편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히고 이젠 바야흐로 내가 그쪽으로 찾아가야 할 차례다. 처음 몇년은 나도 성묘를 따라 나섰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는 성묘 가는 일을 중단했다. 성묘를 안 가본 것이 얼추 10년이 넘었다. 나는 형과 누나와 동생한테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가기 싫은 사람은 가지 말도록 하자’는 제의를 해서 통과시켰다.
나는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 성묘를 안 간다. 첫째는 귀찮아서고 둘째는 내 아버지나 내 엄마가 그까짓 성묘에 오고 안 오고를 따질 사람들이 아니라서다. 성묘를 하면 효자, 성묘를 안하면 불효자로 여길 만큼 쫀쫀한 사람들이 아니다.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는, 그 길고긴 13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아버님 전상서, 어머니 보세요’하는 식의 편지를 써본 적도 없고 보낸 적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서운해하시기는커녕 나를 무한대로 사랑했다.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날 믿고 또 믿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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