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지고 보면 나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도 있다. 충분한 이유가 있다. 열한 살 이후로 아버지는 나한테 뭐 하나 해준 게 없다. 어머니도 마찬가지다. 평생 남편 대소변 가리느라 서울에 올라간 아들 걱정해줄 여력이 없었다. 나는 누가 뭐래도 혼자서 컸다. 아버지, 엄마는 날 낳아주었을 뿐이었다.
혹자는 내 아버지가 나한테 노래 부르는 재주, 그림 그리는 재주를 물려주었지 않느냐고 항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따져봐야 한다. 그게 아버지로부터 의도적으로 물려받게 된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내 아버지가 그의 파트너 김 권사님과 나를 만들던 날 밤 ‘여보! 이번엔 노래 잘하고 그림 잘 그리는 놈으로 만듭시다’ 하고 작업에 들어갔을 리가 없다. 내 예상대로라면 평소 술김에 아내를 한번 건드린 건데 재수 좋게 찐한 DNA가 떨어졌을 뿐이었다. 자기네들은 장차 대단한(?) 인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내 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계획성 있고 민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결국 아버지는 자기 넷째아들이 일약 성공하기 바로 직전에 세상을 뜨셨고 어머니는 아들이 성공을 했어도 10여년간은 실감을 못하시다가 결국 남편 곁으로 가셨다. 어머니는 이상하게도 막내인 내 동생한테 애착을 많이 가지셨는데, 일찍 저세상으로 가시는 바람에 나와 내 동생이 TV에서 함께 노래하는 걸 못 보여드린 게 큰 한으로 남아 있다. 정말 좋아하셨을텐데 말이다.
이젠 나도 환갑에 가까웠으니 마무리를 해야 할 때다. 밖으로 말을 안 했지만 나는 아버지 때문에 40대 중반부터 엄청 스트레스에 시달려왔다. 중풍은 세상이 아다시피 유전성이 높다는 거다. 그래서 나도 어느 날 중풍에 걸리는 게 아닌가 수시로 그런 따위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작은누나까지 중풍 비슷한 뇌출혈로 갑자기 죽어 넘어가는 바람에 나의 불안과 공포는 심각한 지경까지 갔었다.
총체적으로 나는 치사한 자식이다. 불효자식이다. 아버지도 그랬으리라 추측되지만 적어도 내 어머니 김정신 권사님만큼은 믿거나 말거나 내가 목사가 되길 그토록 기도했었다. 그러나 나는 신학공부를 마친 뒤로 ‘여타 종교로부터 완전 해방됐노라’ ‘더 이상 종교는 사양하노라’고 큰소리를 치고 다닌다. 불효막심이다.
이제 나는 내 아버지, 내 엄마, 내 자식, 내 친구들, 내 동료들로부터 야단맞을 일만 남았다. 어느 날 대명천지에 날벼락이나 맞으면 만사가 해결될 일이다. 그런데 날벼락 맞을 확률은 로또 확률보다 더 희박하단다. 그래서 나는 죽은 후에라도 사람들로부터 야단맞을 기회를 줄이기 위해서 우선 내 시신을 의과대학 실험용으로 보내는 데에 동의했고 혹시라도 뼈가 남으면 아무렇게나 태워서 한강 아무데나 뿌릴 것을 서면으로 명시해놓았다(신동아 2001년 2월호에 실린 ‘미리 쓰는 나의 유언장’을 참고하기 바란다).
나 죽은 뒤 내 노래만 틀어봐라
나는 장례식을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내가 죽어서 슬프다는 핑계로 방송에서 내 노래를 트는 것까지 엄하게 규제해놓았다. 그런 놈이 있으면 내가 황천길을 가다가 뒤돌아서 방송국으로 그놈을 찾아가 모가지를 잡고 ‘왜 내가 살아 있을 땐 안 틀더니 내가 죽으니까 트느냐’며 황천길로 즉시 끌고 온다는 것까지 못박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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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英男 |
●1945년 황해도 남천 출생
●1968년 서울대 성악과 명예졸업
●1970년 ‘딜라일라’로 가수 데뷔
●1979년 미 트리니티신학대 졸업
●1996년 한국방송대상 가수상 수상
●KBS ‘체험 삶의 현장’ ‘조영남이 만난 사람’ 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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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쫀쫀하게 구냐고 묻지 마라. 내가 평소에 걸핏하면 ‘내 아버지의 병이 나한테는 약이었습니다’라고 공공연히 떠들어댄 죄값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움은 남는다. 묘비명이다. 내깐에는 멋지게 지었는데 그걸 못 써먹게 생겼다. 조승초씨한테는 애당초 묘비명이 없었다. 그런 게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한테는 언제부턴가 묘비명이 생겼다. 그걸 만들어놓고 얼마나 희희낙락했는지 모른다. 딱 네 글자다. ‘웃다 죽다’. 죽이지 않는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