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권사님의 가짜꿀 만들기

내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가 병을 얻게 된 이유는 대략 두 가지로 분석되었다. 주로 어머니쪽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이 벌을 내렸다는 것이었고, 일반 동네 사람들은 술 때문에 망가졌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어느 쪽 얘기가 맞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병으로 눕게 된 아버지의 머리맡에는 연유를 알 수 없는 물건 하나가 깜짝쇼처럼 등장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책이었다. 장장 13년 동안 아버지의 유일한 낙이 성경책 읽기였던 모양이다. 큰누님의 증언대로라면 아버지는 어찌나 성경을 많이 읽었던지 나중에는 누님이 ‘이사야서’하면 눈감고 손가락을 성경에 얹어 탁 펴면 정확히 이사야서를 펼칠 수 있을 만큼 성경의 달인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남편과는 딴판으로, 조씨 부인 김정신 권사님은 외할머니 뱃속에서부터 죽는 날까지 예배당에 다녔다. 김 권사님의 신앙심은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그런데도 김 권사님은 사랑채에 세든 부부의 가짜꿀 만드는 일을 10년 동안이나 도와주셨다. 가짜꿀을 만들기 위해선 엿기름부터 고아야 하는데 연탄도 없던 시절이라 나무를 때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커다란 솥단지에 엿기름을 부어 끓기 시작하면 주걱처럼 생긴 작대기로 한도 끝도 없이 저어야 했다. 물론 우리의 김 권사님은 “주여 주여” 하고 기도를 하면서 혹은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같은 찬송가를 부르면서 가짜꿀 만드는 일에 적극 동참했다.
내가 나중에 신학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아니, 그 유명한 권사님이 어쩌다 10년간이나 가짜꿀 만드는 일을 도와줄 수가 있었소” 하고 묻자 권사님은 숨도 안 쉬고 “안 그러면 집세가 안 나오는 걸 어카간” 하고 대답했다. 10년간이나 가짜꿀 동업자였던 김 권사님이 천국에 갔을까, 막판에 독학으로 성경을 독파한 술주정꾼 조승초씨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런 건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건 사실 하늘도 판단 못할 일이다. 판단했다면 순 엉터리다.
단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드러눕는 자리를 경기도 군포 어느 언덕배기로 대폭 옮겨가자 내 주위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먼저 죽은 남편에 대한 어머니의 태도가 그랬다. 우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머니가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병치레며 오줌깡통과 똥요강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되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실상은 그 반대로 돌변하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떠나가시고 13년 만에 안방 이부자리가 치워지자 해방은커녕 어머니는 오히려 깊은 시름에 젖는 듯싶었다. 13년간이나 아버지를 구박하던 어머니였다. “영감탱이, 칵 죽어버리지 않구”하면서 늘 투덜대던 어머니였다.
조영남, 조강지처에게 쫓겨나다
그러나 막상 남편이 죽자 불구남편이 무슨 남편 구실을 했다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몹시도 그리워하는 듯했다. 그것은 내가 생전 처음 깊숙이 들여다보게 된 인간 본체의 신비로움이었다. 아! 그토록 징글징글하게 일방적으로 고생만 시키던 남편을 그리워하다니, 이보다 더한 인간의 모순, 인간의 신비로움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 후 우리는 성묘날만 되면 살아 있는 조씨의 아내를 모시고 아버지 묘지를 찾아갔다. 그런데 해가 서산에 걸려 모두가 일어서도 끝끝내 일어설 줄 모르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조씨의 부인 김정신 권사님이다. 어머니가 살아계신 동안 유일한 낙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오로지 남편 무덤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그것으로 나는 또한 내 아버지가 자기 여자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남자 중의 남자였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깨닫게 됐다.
아! 나도 바로 그 점이 아버지를 닮았어야 하는 건데. 아! 그 옛날, 왕년에 기생집에서 그토록 인기를 끌었다던 내 아버지가 어쩐 일로 한 여자와 딱 한번만 결혼하고 죽을 때까지 그 한 여자로 끝을 낼 수가 있었을까? 얼마나 좋았으면 한 여자와 아홉 명의 자식을 만들 수가 있었을까? 그런 식으로 살펴보면 일찍이 조강지처한테 쫓겨나고 자기가 낳은 자식조차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또 다른 여자를 만나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리고 두 번씩이나 같이 살던 여자와 맥없이 갈라서게 된 나 조영남은 조승초씨의 친아들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토록 판이할까?
‘성묘는 귀찮아’
어느덧 조승초씨의 부인 김정신 권사님도 세상을 하직한 채 남편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히고 이젠 바야흐로 내가 그쪽으로 찾아가야 할 차례다. 처음 몇년은 나도 성묘를 따라 나섰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나는 성묘 가는 일을 중단했다. 성묘를 안 가본 것이 얼추 10년이 넘었다. 나는 형과 누나와 동생한테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가기 싫은 사람은 가지 말도록 하자’는 제의를 해서 통과시켰다.
나는 대략 두 가지 이유에서 성묘를 안 간다. 첫째는 귀찮아서고 둘째는 내 아버지나 내 엄마가 그까짓 성묘에 오고 안 오고를 따질 사람들이 아니라서다. 성묘를 하면 효자, 성묘를 안하면 불효자로 여길 만큼 쫀쫀한 사람들이 아니다.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는, 그 길고긴 13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아버님 전상서, 어머니 보세요’하는 식의 편지를 써본 적도 없고 보낸 적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서운해하시기는커녕 나를 무한대로 사랑했다.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날 믿고 또 믿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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