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참 딱한 사람들… 신사임당 초상화를 모독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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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3.13 16:06 / 수정 : 2009.03.14 03:06


■5만원권 신사임당 초상화 그린 화가 이종상씨

화가 이종상(李鍾祥·71)을 만나기로 한 날 서지문 고려대 교수가 신문칼럼에서 그의 그림에 독설(毒舌)을 퍼부었다. "동네 아낙이나 주막집 주모(酒母) 역으로 나오면 알맞을 얼굴"이라는 것이다. 졸지에 주모로 지목된 이종상의 작품은 5만원권에 나오는 신사임당(申師任堂) 초상화다.

이종상의 그림은 전에도 구설에 올랐다. 신사임당 진외가(陳外家)인 강릉 최씨 문중(門中)에서 같은 그림을 두고 "기생 같다"고 했다. 그들은 한국은행의 설명을 들은 뒤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뉴스를 몰고 다니는 사람을 인터뷰할 때 기자는 신이 난다.

5000원권의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5만원권의 신사임당을 그린 것으로 유명해졌지만 이종상은 가장 많은 표준영정을 그린 국내 화가다. 악성(樂聖) 우륵, 광개토대왕, 장보고, 원효대사, 윤관과 강이식 장군이 그의 붓질 아래에서 얼굴을 찾았다.

하지만 이종상을 '영정(影幀)화가'의 틀 속에 가두는 것은 '아인슈타인=원자폭탄'이라 외우는 것과 같다. 그는 이당 김은호(金殷鎬) 월전 장우성(張遇聖)으로 내려오는 한국화의 적통(嫡統)이자 현대판 진경(眞景)산수의 1인자이며 서울대 미대를 대표하는 미술계의 '권력'이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작업실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한번도 언론에 공개한 적이 없는 작업실"이라며 일행을 안내했다. 멜빵 달린 낡은 청바지 차림의 그가 오르는 계단 곳곳에는 값을 알 수 없는 작품들이 쌓여 있었다. 그는 "이 옷이 대학 때부터 입어오던 작업복"이라고 했다.



이종상 화백이 무대막 작업을 하던 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스승 이당 김은호가 남긴 신사임당 초상화를 고증을 거쳐 다시 그렸다.
―오늘 아침 신문에 실린 글 읽어보셨지요.

"그 딱한…. 자기 전공이 중요하면 상대 전공도 중요하게 여겨야지요. 내 그림을 실물로 본 적도 없으면서 개인 느낌만으로 그런 글을 쓰는 것은 교양인으로서 삼가야지요. 화폐를 그리 모독했으니 그분에게 돈이 갈까요? 평생 돈이 아쉽게 살 것 같은데요."

―현재 통용되는 화폐 초상화를 두 번이나 그렸으니 돈에 대한 느낌도 다르겠지요.

"화폐는 30~50년간 쓰이는 국가의 공유재산이자 문화가치인데 우리는 소유와 저축에만 관심을 갖지요. 화폐에는 국민의 자존심이 담겨 있어요. 제가 유럽 가서 충격을 받았어요. 그 나라들의 화폐는 전부 예술적 가치를 지녔어요. 장군이나 정치가뿐 아니라 문화, 예술, 음악가가 등장하는 게 부러웠습니다. 신사임당 화폐는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자신합니다."

―기생이나 주모를 그려본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자꾸 기생이니 주모니 하는데 신사임당은 나혜석보다 훨씬 더 개방된 인물이었을 겁니다. 요조숙녀와는 거리가 먼 신여성이었을 겁니다."

―화백의 그림을 두고 왜 그런 말들이 나올까요.

"원래 신사임당 초상화는 스승인 이당이 그린 겁니다. 당시 최씨 문중의 독촉이 심해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5만원권에 들어간 신사임당은 이당의 초상화에서 얼굴 부분만 따온 것이고 머리와 복식(服飾)은 고증을 받아 다시 작업한 것입니다. 얼굴도 그대로 모사한 게 아닙니다. 눈동자를 또렷이 했고 입술 윤곽도 선명하게 했지요. 이당 작품에 서양식 음영법이 들어가 있는데 그것도 후회하셨어요."



5만원권 화폐에 들어간 이종상의 작품‘신사임당 초상’
―김은호의 신사임당을 제자인 이 화백이 손봤다는데 5000원권의 율곡 초상도 원래 김은호 선생이 그린 초상화를 이 화백이 손본 거지요?

"5000원권 율곡 초상을 그릴 때 저는 30대였습니다. 100원 동전에 이순신 장군을 그린 월전이나 1000원권에 퇴계 이황(李滉)을 그린 이유태 선생 같은 선배들이 많았어요. 율곡 초상도 원래 김은호 선생이 작업하다 쓰러지는 바람에 제가 맡게 된 거지요. 이당은 '율곡의 선비 기질을 살리다 보니 빈티가 나고 하악(下顎·아래턱)이 너무 좁게 그려졌다'고 자기 그림을 못마땅해했어요. 지폐 속의 율곡과 신사임당은 병중(病中)의 스승이 제자의 손을 빌려 그림을 수정한 것으로 봐야지요."

―5000원권을 맡은 건 이당이 지명했기 때문인가요?

"화폐 화가는 자기가 원하거나 추천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한국은행에서 치밀하게 내사를 다해놓지요. 저는 당시 어렸지만 순종의 어진(御眞)을 그린 조선시대 마지막 화원(畵員)이었던 이당에게서 수업을 받았지요."

―5000원권의 율곡을 이 화백이 그리기 전에 서양에서 그렸지요.

"이당이 와병하자 영국 델라로사(社)에 의뢰했어요. 그런데 영국에서 평면 그림을 옆으로 돌리면서 양코배기 율곡을 그려온 거예요."

―이번 5만원권은 언제 의뢰가 왔습니까.

"2007년입니다. 화폐를 그리는 화가는 원래 '내가 그렸다'는 말을 하면 안 돼요. 5000원권도 제 입으로 이야기한 게 아닙니다. 운보 김기창 선생이 기자들과 이야기하다 발설한 거지요."

―화폐 초상화를 그릴 때 신경 쓸 일이 많지요.

"아내에게도 알리면 안 됩니다. 작업에 최소 5~6개월이 걸리는데 초상집도 가면 안되고 안 좋은 병에 걸린 환자를 문병 가서도 안 됩니다. 부부가 합방(合房)할 수도 없어요. 악귀를 쫓기 위해 온종일 향을 피워놓습니다. 금전적인 문제를 일으켜서도 안 됩니다. 이당도 그 점을 제게 강조했어요."

―화폐 초상화를 그리면 보수를 많이 받습니까?

"그렇지는 않고요. 화폐 초상화를 그린 사람은 손만 만져도 돈이 들어온다는 말이 있지요. 언젠가 한국은행에서 5000원권 2장을 묶어 발행한 적이 있어요. 아는 이가 그 돈에 사인을 해달라고 졸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게 45만원에 팔렸다더군요. 지금도 제 집에 돈에 사인해달라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요. (그 말에 기자와 사진기자는 화백의 손을 덥석 잡고 한참을 만졌다.)

―우리 역사에 진영(眞影)을 남긴 경우가 거의 없지요. 그렇다면 초상화는 창작이라는 말이 되지요.

"창작이지요. 김은호 선생은 생전에 '신사임당 초상화 의뢰를 받았을 때 사임당이 현몽(現夢)했다'고 했어요. 저는 현몽한 적은 없지만 위인의 얼굴을 그릴 때면 취재를 많이 합니다."

―어떤 취재를 했는데요.

"우륵 초상화를 그릴 때 옛 고령가야와 탄금대를 돌며 가야금 명인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들이 24시간 가야금 소리를 들어보라고 해 테이프를 하루 종일 틀어놓았어요. 그 영향을 받았는지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던 딸이 결국 국립국악원 가야금 수석이 됐어요. 원효대사를 그릴 때는 스님을 모델로 삼았는데 아무리 해도 백정 같은 얼굴이 나오는 거예요. 동국대 이기영 박사를 칠고초려 끝에 만나 여쭤보니 '기신사상'을 공부해보라는 겁니다. 그 인연으로 동국대에서 학사부터 박사까지 했지요."

―동국대도 다녔습니까?

"제가 서울대 교수 시절 동국대에서 철학석사학위를 하려고 했는데 딱지를 맞았어요. 문학사 학위가 있어야 하는데 저는 미술학사였잖아요. 교무과에서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벌게졌지요. 동국대 철학과 3학년에 학사 편입해 철학박사까지 했습니다."



이종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이당 김은호다. 이종상은 서울대 미대 2학년 때인 1960년 4·19 직전 서울 종로구 와룡동 이당의 집을 찾았다. 'ㅁ 자'집에 들어섰을 때 30여명의 나이든 화가 지망생들이 대청에 무릎을 꿇고 이당이 넘겨준 그림본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당의 집은 후소회(後素會)의 본부였다. 후소는 공자가 자로에게 남긴 말로 '회사후소(事後素)'를 줄인 말이다. 아름다움은 인간이 인품의 바탕을 만든 후에야 할 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거기서 이종상은 말로만 듣던 조선화를 본격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이당의 집은 풍경이 어떻든가요.

"화가 지망생들은 화장실 두루마리보다 약간 큰 화선지 두루마리를 기둥에 매달아 놓고 화조와 병풍, 사군자(四君子)를 모방하고 있었지요. 선생이 내려준 체본을 완벽하게 모방할 때까지 연습하는, 전이모사(傳移模寫)라는 겁니다. 말로만 듣던 도제교육의 현장을 그때 처음 봤습니다."

―이당을 찾아가니 뭐라든가요.

"꾸벅 절하니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해요. 답을 하니 '아! 그거 배워야지. 그런데 어려워'라고 하셨어요. 그러더니 막 웃으면서 '오래 살고 볼 거야. 우리 집 문턱을 서울대학생이 넘어온 건 처음이야'라고 했습니다."

―공짜로 배웠습니까?

"제가 대학시절 사정이 어려워 서울역 앞에서 노숙도 하고 동대문 시장에서 양말 떼다 해무청에 팔아 생계를 이을 때였어요. 선생님께 사정을 이야기하니 레슨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오히려 낙관 돌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선생님께 얻었지요."

―맨 처음에 무엇을 배웠습니까.

"조선시대에는 견(絹)을 썼지요. 견에 씨줄 날줄이 있는데 그 위에 아교를 입혀요. 서양화에서 캔버스를 흰색으로 칠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닙니다."

―아교 위에 색이 묻습니까?

"아교 위에만 그리면 유리에 붓글씨 쓰는 것과 똑같아요. 아교가 굳으면 그 위에 명반(明礬)을 씌웁니다. 그림이 완성된 뒤에도 명반을 씌워 고정시켜야죠. 우리가 신운(神韻)이 감돈다고 하잖아요. 바로 명반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만 7~8개월을 배워야 해요."

―우리 초상화에는 표정이 있는 얼굴이 없지요.

"육리북채(肉理北彩)라는 게 있어요. 우리 초상화는 자세히 보면 점(點)을 여러 번 찍어 선(線)이 됩니다. 육리는 말 그대로 피부 바로 밑에 있는 얼굴의 근육을 말합니다. 그래서 무표정한 것 같지만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이 나오지요."

―북채라는 건 뭡니까.

"북채는 배채(背彩)라고도 하는데 우리 초상화는 2장의 그림을 붙이는 걸 말합니다. 앞장에는 음양을 평면적으로 그리고 뒷장에 육색(肉色)을 입혀 붙이는 거지요. 그런 초상화는 영락없이 진짜 비단을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이고 얼굴도 살아 있는 사람처럼 혈기가 돌지요."

―이당에게 언제쯤 칭찬을 받았습니까.

"제가 잘 그린 것 같다고 자랑했더니 '틀렸어. 아직 멀었어'라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자네 인품은 어디다 넣었나'라고 하시더군요. 인품이라는 게 눈에 안 보이는 거잖아요. 머리와 영혼에 있는 거지요. 그게 바로 배채의 원리예요."

―이당을 두고 친일(親日)했다는 비판이 있지요.

"왜정시대 선전(鮮展)에 참여한 걸 두고 그런 말들이 있지요. 당시 일본 화풍이 물밀듯이 몰려들어올 때였어요. 그런 식으로 친일파로 분류하면 친일파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 화백을 두고도 이당의 제자이니 친일화풍이 있다고 한 교수가 지적한 글을 봤습니다만.

"제가 광복될 때 7살이었어요. 제가 이당에게 배운 게 친일이라면 제게 배운 서울대 미대생들도 전부 친일파라는 말입니까?"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이종상의 집은 갑부였다. 원예학을 전공한 아버지와 고등여고를 졸업한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로 그가 태어난 뒤, 사과 개량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사업에 성공해 서울 후암동으로 이사왔다. 큰집에 흑석동에 별장까지 있었고 자가용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의 가세는 6·25 직전 아버지가 39세로 요절하면서 일거에 기울었다. 고래등 같은 집과 별장은 회사 부하들이 가로채고 때맞춰 전쟁이 터지면서 후암동 삼광초등학교에 다니던 그는 졸업장도 받지 못한 채 고향 예산으로 피난가야 했다.

―어느 정도 부자였습니까.

"제가 유치원을 다녔을 정도였으니까요. 어려서부터 보약도 많이 먹어 체구가 컸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6학년이었던 형이 친구들에게 맞으면 대신 싸웠을 정도니까요. 아나운서 변웅전이 제 유치원 친구예요."

―사람 팔자 알 수 없다더니, 그렇게 집안이 단번에 기울 수 있습니까.

"제가 전쟁 통에 며칠 동안 어머니와 형을 잃은 적이 있어요. 어쩔 수 없이 깡통 들고 구걸하고 다녔습니다. 명동극장 앞에 있는 한 음식점 아주머니를 잊을 수가 없어요. 다른 식당에서는 밥 속에 김치, 고춧가루 든 것을 한번에 엎어주는데 그 분은 꼭 밥과 반찬을 따로 주셨어요."

―고향에서도 고생을 많이 했겠네요.

"어머니가 광주리 장사를 하면서 '내가 도둑질, 서방질만 빼고 할 수 있는 일 다해서 가르치겠다'고 했어요. 제가 초등학교 졸업장 없이 보문중에 편입하게 된 것도 어머니 덕이었어요. 당시 광주리 팔던 집이 보문중학 이상복 선생 댁이었는데 사정해서 입학을 허락받은 겁니다."

―외가 쪽도 집안이 좋았다면서 도움을 받지는 않았나요.

"제가 나무를 해서 장에 내다 팔았어요. 집에 나무를 져다 주고 나오는데 그 댁 남편이 저를 부르는 거예요. '자네 부친 함자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더군요. 아버지 이름을 들은 그 분이 '아이쿠, 어쩌다 이 꼴이 됐는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옛 부하였습니다. 그 분이 쌀 한말을 줘 무거운줄도 모르고 즐거운 마음에 집으로 가져갔어요."

―어머니께 효도를 했군요.

"웬걸요, 어머니가 노발대발하시며 '도로 갖다 드리고 나무 값만큼만 받아오라'는 겁니다. 울면서 새벽까지 다시 길을 걸어 돌려드리고 왔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집안에서 미술을 했으니 철이 없었던 겁니까?

"아버지가 그림을 좋아했어요. 예산에서 유명한 이응로 화백이 아버지보다 몇살 위였는데 두 분이 친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막내는 화가 시키라'고 했어요."

―대전고에서 본격적으로 미술반 활동을 했지요.

"하루는 대전여중 학생들이 저를 보고는 킥킥대며 코를 막고 지나가요.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우셨어요. 제가 '여학생들이 코를 안 막는 학교가 어디냐'고 여쭈니 대전고라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이 악물고 공부했어요. 영어 ABC도 몰랐는데 경복중에 다녔던 형님에게 영어 알파벳 써달라고 해 무작정 외웠지요."

―고교 졸업 직전까지 건축과를 지망했다고 들었습니다. 막판에 전공을 바꾼 이유가 있습니까.

"당장 취직할 수 있고 그림까지 그릴 수 있는 직업인 것 같아 건축과를 지망했는데, 당시 대전고 교장으로 박관수 박사가 부임했어요. 그 분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은사입니다. 박 교장님은 저희들만 보면 '앞으로 문화의 시대가 온다'며 '취미와 직업이 다른 시대는 지났다'고 했어요."

―교장의 말 한마디에 결심을 바꾼 겁니까?

"독일에 유학 갔던 그 분 따님이 대전에 온 적이 있어요. 아주 미인이었는데 저희들에게 차를 한잔씩 대접했어요. 독일에서 무슨 공부를 하느냐고 물으니 미술사를 전공한다는 겁니다. 저는 미술사라는 전공이 있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미모에 넘어간 것이군요.

"어머니께 제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잘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생전에 아버지도 같은 말씀을 했거든요."

―대학에 진학해서도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서울역에서 주로 노숙했습니다. 외가 쪽 친척들이 서울에 많이 있었지만 남에게 폐끼치지 말라는 어머니 말씀이 계속 걸리는 거예요. 고생은 했지만 당시 노숙자, 노동자들이 다 제 모델이 돼줬습니다. 나중에 국전에 출품할 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원래 서양화를 하다 동양화로 전향한 이유가 있습니까.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온 선생님이 계셨는데 제 그림을 보더니 '파리에서 30년 전에 유행한 그림이잖아. 일본 예술사조와도 비슷하고'라고 했어요. 청계천 헌 책방을 뒤져 일본 잡지를 찾아봤는데 사실이었어요. 그날로 유화 물감이며 모든 도구를 공터에 모아 놓고 불을 질렀어요. 그 덕에 소방차까지 출동했습니다. 벌금까지 냈어요."

이종상이 대학생 시절, 국전은 미술학도들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국전은 독특하게 운영됐는데 3년 연속 특선을 하면 추천작가가 되고 7년간 쉼 없이 작품을 내면 초대작가가 된다. 심사위원은 초대작가를 3년 이상 해야 할 수 있다.

3연속 특선을 못하면 10년 내에 6번 특선을 해야 하고, 거기서도 실패하면 평생 15번 특선을 해야 하는 식이었다. 당시 대학 재학시절 특선은 신문 사회면에 날 정도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이종상은 3학년 때 '장(匠)'이라는 작품을 시작으로 3연속 특선을 하게 된다.

―'장'이라는 작품은 요즘의 노동화(勞動畵) 같아 보입니다.

"예전부터 대장간이 등장하는 그림에는 민중봉기라는 뜻이 숨어 있는 거예요. 제 작품도 혁명을 촉구하는 뜻을 담은 겁니다. 제 작품의 등장인물은 모두 대학생 또래들이에요. 심사위원들이나 군인들은 몰랐지만 친구들은 '너 이런 그림 그리면 붙잡혀간다'고 걱정해주곤 했어요."

―그런 류의 작품으로 잇따라 국전에서 특선을 했지요?

"그 뒤로도 비슷한 작품으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상과 1962년과 1963년 국전에서 내각수반상, 문교부장관상을 받았어요. 그와 동시에 추천작가가 됐지요."

―타도의 대상으로 여겼던 군인들로부터 상을 받고 보니 어떤 기분이 들던가요.

"처음에는 젊은 혈기에 혁명을 한다고 했는데 상을 받고 나니 점점 동화가 되더군요. 빨리 졸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작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건 혁명을 연상시키는 그림이 아니라 고구려 관련 논문 때문이었지요?

"제가 60년대 말 쓴 논문이 1972년 발간된 한국민족문화논총에 실려있어요. 내용은 우리 그림의 근원은 고구려 벽화에서 나왔으며 수묵화가 아니라 채색화가 우리의 근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고구려를 거론하면 빨갱이로 여겼어요. 남영동 분실에 끌려갔습니다."

―어떻든가요.

"의자 두개, 욕조 하나 빼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냥 저를 방에 두고 나가더니 조사관이 계속 바뀌면서 계속 같은 질문을 하는 거예요. '왜 오셨죠?'라고요. 나중에야 그게 정말 무서운 고문일 걸 알았어요."

―어떻게 풀려났습니까.

"그 사람들이 난수표를 찾는다고 '수표를 빨리 내놓으라'는 겁니다. 저는 진짜 수표인줄만 알고 '수표 벌써 바꿨는데요?'라고 하니 막 웃어요. 엉터리를 잡아온 걸 나중에야 안 것이죠. 흑석동 화실에 돌아와보니 천정이고 방바닥이고 싹 다 뜯어버렸어요. 그래서 당시 그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학부 졸업 후 서울대에서 강사를 하다 교수가 됐지요.

"서울대 교수시절 제 꿈이 2개였습니다. 미술관 짓는 것과 박사학위 만드는 것이었는데 다 이뤘습니다. 동국대 대학원 다닐 때 주변에서 '저 친구, 출세하려 한다' '명함에 박사학위 박으려고 한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요."

―김병종 서울대 교수가 쓴 글을 보니 수업 첫날 벼루를 준비하지 못해 선생께 쫓겨났다는 내용이 있더군요. 고생했던 분이 왜 가난한 학생 가슴에 못을 박은 겁니까.

"그래서 오늘날의 김병종이가 있는 거예요. 김 교수는 당시 서양화를 해야 할지 동양화를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제가 그러지 않았으면 서양화를 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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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잘나가는 중견 감독들의 '잊혀진 데뷔작'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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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4.18 03:14 / 수정 : 2009.04.19 15:00


저예산 제작… 흥행참패 쓴잔 비디오조차 자취감춰 아쉬워

미국 영화 사이트 '저스트프레스플레이'는 30일 개봉 예정인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에 대해 "최근의 트렌드에 맞춰 뱀파이어에 훌륭하게 접근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나우뉴스 4월 15일 보도)

'올드보이'(2003)로 세계적 감독의 반열에 올라선 박찬욱 감독은 이번 '박쥐'가 여덟 번째 장편영화 연출작이다.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까지 꼽아 본 사람이라면 의문을 지닐 만도 하다. 두 편은 어디로 간 걸까?
 



박찬욱 감독 '달은… 해가 꾸는 꿈' / 자료제공=청춘극장
박찬욱은 4년 전의 기자간담회에서 "할 수만 있다면 그 두 작품을 없애 버리고 싶다"며 "내 전집 DVD 세트가 나오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과 두 번째 작품 '삼인조' 얘기다.

2009년 현재 한국영화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 감독들에게는 대개 이렇듯 '잊혀진 데뷔작'의 추억들이 있게 마련이다. 불과 10~20년 전에 나온 이 작품들은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작이 되고 말았다. 왜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박찬욱의 1992년작 '달은… 해가 꾸는 꿈' 은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가수 이승철이 주연을 맡았다. 암흑가의 건달이 조직 보스의 정부(나현희)를 사랑하다가 살해당하는 어두운 내용으로 '복수는 나의 것' '친절한 금자씨'의 원조격이다.
 



강우석 감독 '달콤한 신부들' / 자료제공=청춘극장
면밀하게 배치된 미장센, 화면과 음악의 의도적인 불일치와 관객의 동화(同化)를 막는 불안한 카메라 앵글 등, 지금 봐도 신선한 요소들이 많다. 오우삼과 왕가위를 대놓고 패러디하고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를 삽입하는 등 자신의 영화사적인 안목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비장한 내레이션과 종잡을 수 없는 내러티브, 연기라고 할 만한 장면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주연배우의 어색함이 20분 이상 영화에 눈을 붙이기 어렵게 한다.

"넌 고치를 벗어 던지고 날아가 버릴 거야… 내 고치는 널 두고 도망갔던 그 기억이야"처럼 실소(失笑)를 자아내는 대사들도 많다. 서울 관객 6649명을 기록한 이 영화 뒤로 박찬욱은 5년 동안 메가폰을 잡지 못했다.

'실미도' '공공의 적'의 강우석 감독이 농촌 청년의 결혼 문제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데뷔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88년의 '달콤한 신부들'은 수퍼마켓에서 일하는 시골 청년(최재성)과 다방 레지(최수지) 사이의 로맨스를 다룬 영화다.
 



곽경택 감독 '억수탕'
상업영화의 안전한 틀 속에서 사회 풍자를 시도하는 강우석 특유의 색채가 드러나지만 최대 갈등이 동네 깡패 두명과 물어뜯기 액션을 하는 수준이었다. 불행히도 잡아놨던 극장이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매춘'의 간판을 내리지 않은 탓에 개봉 시기를 놓쳤고 관객동원 2만1309명(이하 서울)에 그쳤다.

'친구'의 곽경택 감독이 1997년에 만들었던 데뷔작 '억수탕'은 목욕탕이라는 특정 공간에서 사진작가, 영화감독, 스님, 술집 아가씨, 여장남자 등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가 부산 사투리 특유의 정감 속에서 펼쳐지는 작품이다.

'하품마저 리얼하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디테일과 고급 유머가 살아있는 독특한 작품이지만 스타도 없고 기승전결도 불확실한 영화가 IMF사태와 때를 맞춰 개봉됐으니…. 관객 2만3147명이었다. 곧바로 '쇼킹 누드탕'이라는 카피를 단 비디오가 출시돼 대여점에서 '젖소부인'과 함께 진열됐다.

'왕의 남자'의 이준익 감독은 1993년에 어린이 영화를 한 편 찍고 10년 동안 감독 생활을 접었던 불우한 이력을 지녔다. 지금은 청춘스타로 성장한 김민정·정태우가 등장하는 데뷔작 '키드캅'은 백화점에서 도둑을 잡는 초등학생들의 모험담이다. 관객은 2만1454명이었고, 훗날 이준익은 "데뷔작이 은퇴작이 됐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이준익 감독 '키드캅'
'신기전'의 김유진 감독은 1986년 '영웅연가'로 데뷔했다. 건달 출신의 신랑(길용우)과 기지촌 출신의 신부(송옥숙)가, 결혼식을 올리기만 하면 사망 사고가 일어나는 예식장의 '부부 공모'에 응모한다. 지금도 '리메이크하고 싶다'는 제작자가 있을 만큼 기상천외한 내용의 영화였지만 관객은 2만8349명이었다.

'사마리아' '빈집' 등을 통해 작가주의 감독으로 입지를 굳힌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은 1996년의 '악어'였다. 한강에서 자살한 사람의 시체를 숨겼다가 돈을 뜯어내는 청년(조재현)과 주변 인물들의 비극적 삶을 그렸다.

충격적일 만큼 독특한 이미지와 염세적인 세계관으로써 향후 그의 영화들이 나아갈 진행 방향을 예고하는 작품이었다. 그에게는 흥행이 별 의미 없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관객수는 3284명이었다.
 



김유진 감독 '영웅연가'
결국 지금의 기준으로선 형편없는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들의 데뷔작은 극장에 간판이 걸린 즉시 흥행 참패의 쓴잔을 맛봤고 비디오테이프조차 대여점의 쇠락과 함께 자취를 감추는 상황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외국 감독들의 경우 1950~60년대 프랑스 누벨 바그(새로운 물결) 계열 감독들의 데뷔작들을 모은 DVD가 따로 나오기도 했다.

희귀 비디오 전문점 청춘극장(oldcine.net)의 안규찬 대표는 "2000년대 들어 데뷔작이 곧 흥행작이 된 감독이 많아진 반면 첫 영화에서 실패한 감독이 재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됐다"며 "뛰어난 기량을 보였지만 흥행에 실패한 데뷔작이 훗날 더 큰 성공의 발판이 되는 일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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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조오련하고 바다 거북이하고 수영경기 하모, 누가 이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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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5.09 03:04 / 수정 : 2009.05.11 17:26




"당신은 나의 에너지" 대한해협 횡단 계획을 이야기를 하며 한없이 담대하던 조오련은 미처 떠나지 못한 신혼여행 얘기가 나오자 움찔했다. 그는“각시야. 여그로 신혼여행 온 거 맞지. 안 그런가?”하며 씨익 웃었다. / 채성진 기자

[왜 그는]'아시아의 물개' 두번째 대한해협 횡단위해 다시 물속으로

"가슴에서 불덩어리가 팍 솟아올라 배추농사 못 짓겄습디다. 바다와 하나되는 무아지경의 희열을 한번 더 느끼고 싶어서. 내일 모레 환갑이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되겄지요. 수영 인생 50년을 정리하는 심정으로 해 볼랍니다."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趙五連·57)이 내년 8월 6일쯤 대한해협 횡단에 도전한다. 29년 만의 재도전이다. 조오련은 "이번에는 거제 장승포 앞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첫 도전 때보다 수영 거리가 9㎞ 늘어나 16~18시간 정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불가능에 대한 도전'은 조오련에게 존재 의미를 끊임없이 확인시켜주는 시험대였다. 1970년 방콕,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400·1500m 연속 2관왕에 오르며 주가를 날렸지만 1978년 방콕 대회에서 동메달에 그치자 "조오련도 이제 한물갔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것이 독기(毒氣)를 자극했을까. 2년 뒤인 1980년 8월 11일 그는 부산 다대포에서 쓰시마 서쪽 끝까지 55㎞에 이르는 바닷길을 13시간16분 만에 헤엄쳐 건너며 존재감을 강렬히 부각시켰다. 1982년 도버 해협 횡단 도전이 신통치 않은 기록으로 끝난 뒤 조오련은 세인의 기억에서 차츰 사라졌다.

그가 수영 교실을 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2001년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코믹 연기를 하던 그의 모습을 보고 시청자들은 묘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걸 조오련도 알았는지 2003년 한강 600리 주파, 2005년 삼부자(三父子)의 울릉도~독도 횡단을 성공시키며 도전 정신을 재확인시켰다.

지난 4일 제주도 애월읍 유수암리의 펜션에서 조오련을 만났다. 이틀 전 해남 집에서 새소리가 들리는 한라산 중산간의 한적한 마을로 건너온 조씨 부부는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 눈치였다.

스물여덟 한창나이 때의 첫 도전에 비해 쉽지 않아 보였지만 그는 "냉수대(冷水帶)를 피하고 쿠로시오 난류가 도와준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했다. 그는 현재 체중을 늘리고 기초 체력을 회복하는 단계라고 했다.

"어제 몸무게를 쟀는데 80㎏이에요. 한 10㎏ 더 불려야지. 원영(遠泳)에서 상어나 해파리 공격보다 무서운 게 냉수대예요. 해파리가 쏜다는 건 수온이 높다는 얘기니까 오히려 낫지. 바다 밑에서 불쑥 솟아올라 온몸을 사정없이 얼려버리는 파란 물 덩어리, 이건 아주 악질이거든. 몸에 두꺼운 '지방 갑옷'을 만들어야 해요."

그는 "스태미너에는 민물장어가 최고"라며 "고기는 구워 먹고 뼈는 삶아서 마시고…. 지금도 내려오면서 장어 즙을 한잔 마시고 왔다"며 웃었다. 해남 고향 집에서 양봉을 해서 어릴 적부터 벌꿀도 즐긴다고 했다. 조오련은 하체 단련과 지구력을 키우는 것부터 훈련을 시작할 계획이다. 외도 수영장까지 두어 시간 속보로 걸어가 하루 50m 레인을 100번 정도 헤엄치겠다고 했다.

조오련은 '어울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작년 7월 내내 독도 주변 해역을 33바퀴 수영하는 도전에 성공한 뒤 극심한 무력감에 빠졌다고 한다. 전남 해남 계곡면 법곡리 집에서 술에 빠져 식사도 거르던 그를 마을 이장인 이영배씨가 집으로 불러 밥을 챙겨 먹였다.

그때 상을 봐주던 이장의 여동생 성란(44)씨가 지금 조오련의 아내다. 9년 전 심장마비로 아내를 잃은 조오련은 지난 4월 18일 이씨와 재혼했다. 훈련 준비에 바빠 신혼여행은 아직 떠나지 못했다고 했다.

"이 사람, 속을 버려 밥도 제대로 못 먹더라고요.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는 건데 싶어 오빠가 집으로 초대했죠. 자주 보니 정들고 그러다 보니 결혼하게 됐어요."(이성란)

부부는 13년 나이 차가 뭐 그리 대수냐며 마주보고 웃었다.

조오련의 도전에는 가로 5m, 세로 10m 깊이 2m 크기의 보호망과 이것을 끌어줄 예인선, 고무보트 같은 장비가 필요하다. 의료진과 진행 스태프도 12명 정도 있어야 한다. 1억원 정도의 경비가 필요하지만 그는 아직 스폰서를 구하지 못했다.

"해남 땅 잽혀 갖고 돈 만들어 여기 왔어요. 일단 부딪혀 봐야지. 사람이 해서 안 되는 일이 뭐 있겄습니까. '보호 그물망 살 돈 없어서 조오련이 도전 못했네' 하는 소리는 안 나오게 뛰어야지."

그는 "너무 '이벤트'에 집중하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그걸로 돈 벌어본 적 한번도 없다"면서 "내가 역사에 관심이 좀 많아서 그렇다"고 했다.

"대한해협을 헤엄쳐 건넌 일본인? 아직 없어요. 짜식들이 엄두를 못 내는 거지. 나는 우리 민족의 힘에 대해 생각하는 게 많아요. 고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다시 사학과로 학사 편입한 게 다 그런 것 때문인데…."

5남 5녀의 막내로 다섯 아들이 이어져 '오련(五連)'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그에게 영화 '친구'에 나오는 질문을 던졌다. "조오련이 하고 바다 거북이하고 수영시합 하모 누가 이기는지 아나?" 그는 "가까운 거리라면 바다거북이 이기겠지만 10㎞가 넘어가는 긴 수영이라면 내가 자신 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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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스턴트맨도 울고 간다…'야마카시'에 빠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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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6.06 03:30 / 수정 : 2009.06.06 13:57


건물 사이 건너뛰고 높은 곳서 뛰어내리고…
안전장비는 필요없다 우리에겐 맨몸만 있을 뿐…

"옥상에 상추밭이 있어 가끔 올라가는데 그때마다 옆 건물로 뛰고 싶어 미치겠다니까요?"

김영민(32·프리랜서 웹디자이너)씨가 자기가 사는 인천시 부평구 4층 빌라를 올려보며 말했다. 빌라 주변에는 3m 간격을 두고 옹기종기 건물들이 붙어 있었다. 그는 "벽을 타고 꼭대기까지 오르는 건 기본"이라며 "4.5m 높이에서도 뛰어내릴 수 있다"고 했다.

김씨는 4m 정도의 담을 맨손으로 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에게 "스턴트맨이냐"고 물었다. 그는 '야마카시'를 한다고 했다. 김씨는 회원 5만5000명인 동호회 '야마카시 코리아' 대표다. 극한(extreme) 스포츠의 일종인 야마카시는 아프리카 콩고의 링갈라어(語)로 초인(超人)이라는 뜻이다.





김영민 야마카시 코리아 대표는“야마카시라는 하나의 문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힙합이나 비보이, 스노 보드처럼 야마카시만의 패션 스타 일도 구상 중이다.
야마카시는 1980년대 프랑스 젊은이들이 장비 없이 맨 몸으로 건물을 타고 논 데서 비롯됐다. 프랑스어 '길(parcour)'에서 파생된 '파쿠르(parkour)'가 정식 명칭이다. '프리러닝(free running)'이라고도 한다. 야마카시는 파쿠르를 하는 유명한 팀 이름으로 고유명사로도 쓰인다.

우리나라는 2003년 '야마카시 코리아'가 시초다. 지난 4월 개봉한 '13구역: 얼티메이텀'이 야마카시를 소재로 한 대표적 영화다. "인터넷에서 외국 동영상을 처음 본 뒤 넋이 빠져 가만히 있었어요. 저도 모르게 '저거구나, 도대체 저걸 하는 사람들은 누굴까?' 필(feel)이 꽂혔죠."

김씨는 "난간에 매달린 채 벽을 차고 텀블링을 하며 지형·지물을 창조적으로 넘는 모든 행위가 야마카시"라고 했다. 컴퓨터 그래픽 없는 '맨몸 액션'이다. 홍콩 배우 청룽(成龍·성룡)의 몸짓이 대표적 예다. 김씨는 "도망을 쳐도 냅다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간지('폼난다'는 속어)'나게 뛰는 것"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합기도와 검도, 격투기로 단련된 김씨는 야마카시의 숨막히는 액션에 매료됐다. 기계체조와 암벽등반도 배웠다. 그는 "뛰어내리거나 매달리기 좋은 건물을 찾으려 한동안 하늘만 쳐다보고 걸었다"며 "벤치가 나오면 한 바퀴 몸을 돌려 뛰어넘고 담이 있으면 막 바로 타고 넘었다"고 했다.





장비 없이 맨몸으로 하는 야마카시지만 신발만큼은 중요하다. 점프를 하고, 벽을 타고 오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접지력이 좋아야 하고 충격을 잘 흡수해야 한다.

담장 위의 김씨를 본 놀란 경비가 "다 큰 사람이 뭐 하는 짓이냐"며 제지하기 일쑤였다. 공원과 대학 캠퍼스가 주무대다. 빌딩 사이를 건너뛰는 것은 국내에서는 아직 쉽지 않다. 그는 "주로 잡지나 화보 촬영 때 평소 뛰어 보고 싶던 장소를 섭외토록 제작진에 귀띔한다"고 했다.

그는 성취감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했다. "못 풀던 수학문제도 끙끙거려 풀고 나면 뿌듯하잖아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해볼까' 고민 끝에 장애물을 헤쳐가면 '해냈다'는 기분으로 정말 짜릿하죠."

위험할 것 같다는 물음에는 "감당할 수 없는 높이에서는 아무리 뛰려 해도 몸이 거부한다"며 "거리와 높이를 차근차근 늘려가는 것이지 객기로 야마카시를 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뛸 수 있는 거리를 보폭으로 대부분 알고 있기 때문에 무작정 몸을 던지는 무식한 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야마카시 관련 뮤지컬을 하면서 세트가 잘못돼 갈비뼈가 부러진 적은 있다"며 "뻔히 봐도 다칠 만한 상황에서 누가 개념 없이 몸을 던지겠느냐"고 했다. 다만 움직임이 둔해지기 때문에 특별한 안전 도구를 착용하지 않는 만큼 스스로가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실제 지난 2007년 수원의 한 고등학생이 아파트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사 했을 때 야마카시를 하다 떨어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야마카시 때문이 아니라는 경찰의 공식 해명이 있었지만 이미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진 뒤였다. 김씨는 "자기 몸을 조절할 수 있고 이성적으로 판단 할 수 있는 14~15세 이상이 야마카시를 하기에 적당한 나이라고 본다"고 했다.

야마카시 동호회는 전국 16개 지부를 두고 정기 모임을 갖는다. 1년에 두 번 기술 연습을 하기 위해 30여명의 전국 고수들이 모여 '리더 세미나'도 한다. 김씨는 "합숙 때는 다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는지 비명을 지르거나 다리를 절뚝거리는 등 잠꼬대들이 심하다"고 했다.

작년부터 경기도 부천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특별활동 시간에 야마카시를 하고 있다. 올 2학기부터 야마카시를 하겠다는 학교가 몇 곳 더 생겨 교육일정을 협의하고 있다. 지인의 소개로 6년 전 만난 아내 안시내(26)씨도 아예 야마카시 영상을 만들고 동호회원을 관리하는 일에 팔을 걷어붙였다.

안씨는 "첫 만남 때 '이상한 것'을 한다면서 사진을 보여주기에 관심이 생겼던 것 같다"며 "암벽등반도 덩달아 같이 배웠다"고 했다. 김씨는 1년의 집필기간을 거쳐 지난달 국내 최초로 야마카시 교본서도 펴냈다. 80년대 '페르시아의 왕자'시리즈부터 최근의 '프리러닝''미러스 엣지'까지 야마카시를 응용한 게임도 많다.

김씨는 "캐릭터의 몸짓을 더욱 자연스럽게 만들기 원하는 게임회사에 조언을 해준 적도 많다"고 했다. 이미 외국에서는 야마카시 고수들의 몸에 센서를 달고 움직임을 디지털화하는 '모션 캡처'가 활발하다는 것이다.






하늘을 배경으로 빌딩 숲을 난다. 보이는 모든 곳은 그들의 놀이터다. 스턴트를 무색하게 할 만큼 화려한 야마카시의 몸짓들은 지금도 수많은 젊은이의 심장을 울린다. 도시 곳곳을 맨몸으로 누빌 수 있다는 매력때문에 외국에서는 이미 하나의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 ‘야마카시 코리아’제공
격투 신과 추격 신에서 야마카시의 움직임을 응용하려는 영화, 드라마가 늘어나는 것도 김씨가 바빠지는 이유 중 하나다. 김씨는 "자동차의 역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신차 발표회나 모터쇼 때 특히 퍼포먼스 문의가 많다"고 했다. 현재 김씨는 인터넷 방송에서 야마카시 전문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도둑이 야마카시를 배우면 어떻게 될까? 김씨는 "회원들끼리도 그런 이야기를 가끔씩 한다"며 "옥상에 올라가면 길이 훤히 보이고 그림이 그려진다. 신창원 같은 탈주범이 야마카시를 한다면 경찰이 못 잡는 것도 당연하다"고 했다.

"가끔 절도범의 인상착의를 말하면서 아는 인물이냐고 물어오는 형사들이 있어요. 용의자가 혹시 야마카시를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겠죠. 한 특수부대에서는 부대원들에게 야마카시를 지도해 달라고 하더군요. 시가전에서 건물에 진입할 때 유용하다는 거죠."

야마카시가 악용돼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경찰이나 소방서 조직과 하루 빨리 연계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실제 지난 2006년 개봉해 야마카시를 널리 알린 '13구역'의 두 주인공도 죄수와 경찰이다. 김씨가 야마카시 전문 학원을 준비 중인 것도 그 때문이다.

김씨는 현재 프리랜서로 하고 있는 웹 디자인을 제외하면 뚜렷한 수입이 없다. 당분간은 '부채 생활'을 계속 해야 할 처지다. 처가에서도 '독특한 사위' 때문에 반대가 심하다고 했다. 김씨는 "야마카시도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다"며 "이게 내 직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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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시대 위원회'는 설렁탕 집 2층에 있었다. 성경 몇 권과 피아노, 100명 정도가 앉을 공간 끝에 서재가 보였다. 책꽂이에 브리태니커 사전, 이조(李朝)당쟁사, 화엄경 강해 같은 낡은 책이 있었다. 잘 정돈된 책상에는 가족사진과 읽다 만 편지가 놓여 있었다.

김동길(金東吉)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때 대권후보로 거론됐었다. 그랬던 그였기에 침침한 사무실 분위기며 위치가 설렁탕 국물에 뜬 고명 같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그는 정력적이었다. 사람을 끄는 마력(魔力)도 여전했다. 세월은 그의 머리 색을 바꿨을 뿐이었다.

젊은 시절 그는 군인(軍人) 출신 대통령들에게 쓴소리를 했다. 지역맹주로 서슬 퍼렇던 3김(金)을 향해서는 "낚시나 떠나라"고 했다. 그가 세상을 향해 일갈한 "이게 뭡니까"는 지금도 패러디 대상으로 꼽힌다. 그는 정계에 투신해 스스로 인정하듯 '실패한 정치인'도 돼봤다.

21년 전 그를 경기도 양평 언론연수원에서 만났다. 당시 그는 말했다. "만날 뿌리 뽑자~뿌리 뽑자 하는 데 뿌리 뽑혔습니까? 그래서 저는 잎사구나 뜯자~잎사구나 뜯자라고 해요." 그에게 '뿌리를 뽑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다. 그의 2시간 반짜리 열강이 시작됐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에게 세월은 없었다. 그는 인터뷰를 하다 답답했는지 "내가 다 말하고 나중에 보충 질문을 하라"며 강의를 할 태세였다. 그의 '강의' 도중 계속 질문을 던지느라 진땀이 났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홈페이지 제목이 '프리덤 왓치(Freedom Watch)'더군요. 왜 '이명박 대통령에게'라는 항목에 글을 올립니까.

"저 같은 노인들이 이 대통령 당선에 얼마간 힘쓴 건 사실이지요. 제가 대통령은 못 됐지만 만일 됐더라면 '이렇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걸 씁니다."

―글을 시작한 게 2008년 5월 1일입니다. 글이 꽤 짧던데 몇 시에 집필합니까.

"글은 전부터 써왔던 거지만 이 대통령 정부가 출범한 후 포맷만 바꾼 겁니다. 원고지 석장 정도고요, 많을 때 여섯 장까지 써요. 노인들은 잠이 없잖아요. 아침 6시쯤 글을 씁니다. 이 사무실에서 매월 마지막 목요일에 '목요(木曜)강좌'를 했어요. 5년간 정확히 60번을 했습니다. 그 뒤 세계사 강의를 했고 한국사 강의도 했지요. '라디오 코리아'를 통해 미국 동포에게 방송도 합니다."

―'라디오 코리아'면 '그건 너'를 부른 가수 이장희가 운영했던?

"맞아요. 오늘 새벽에도 하고 나오는 길입니다. 토·일요일만 빼고 매일 10분씩 '김동길 칼럼'이란 제목으로 하지요"

―매일 대통령에게 글을 쓰는 데 반응은 있나요?

"있긴 뭐가 있어요. 오죽하면 제가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라는 제목의 글까지 썼겠어요. '경제풍월'이란 잡지 하는 배병휴씨를 포함해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대통령 만난 적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 명도 없대요. 참 별난 사람이에요."

―정권 출범 후 휘청거리지 않은 날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 일간지 칼럼에서 현 정권을 '유리 턱 정권'으로 비유했더군요.

"정권 인수 때부터 잘못됐어요. 거 무슨 여자 위원장 있잖아요, 그 사람 정권 인수를 한 게 아니고 제 철학을 뽐내더군요. '영어교육 다시 하자'고 했지요? 그럴 수 있는데, 왜 그 대목에서 '오��지'가 나옵니까? 그게 뭡니까. 그런 사람들이 대통령을 망쳐놓은 거예요."

―'오뤤지'가 망쳤다는 이야기입니까.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일할 사람들 감정은 상하지 않게 해야지요. 약만 잔뜩 올렸잖아요. 그걸 보고 이 대통령이 정치력이 없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정권 인수 후 '강부자 내각(內閣)' 파동에 휘말렸지요.

"대통령이 만만한 사람, 자기 말만 잘 듣는 사람에 둘러싸여 있어요. 세상과 소통할 통로가 없어요. 우리처럼 욕먹으면서 악쓰는 사람들, 그거 개인이 하기가 쉬운 게 아닌데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지난해에는 광우병 파동으로 석 달이나 갈피를 못 잡았습니다.

"대통령이 청와대 뒷산에서 광화문 촛불 내려다보며 '아침이슬'이란 노래를 듣고 가슴이 뭉클했다지요. 그 얘기 듣고 기가 막혔어요. 촛불 보고 가슴이 뭉클할 게 아니고 '그 배후에 반미친북(反美親北) 세력이 있구나, 간첩이 마음대로 날뛰고 있구나'하고 생각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광우병 파동을 일으킨 세력이 반미라는 증거는 있나요?

"중국 소를 두고 광우병 이야기 나왔으면 그렇게 됐겠어요? 제가 반미친북, 간첩 이야기 하면 '증거 대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걸 왜 내가 댑니까? 국정원이 대야지."

김 명예교수는 "현 정권이 살려면 자유민주진영을 끌어와야 한다"고 했다. 정체 모호한 '좌우'개념이 아니라 자유민주 대 반미종북(反美從北)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내정(內政)과 관련된 전권을 주고 이회창(李會昌) 선진당 총재도 끌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정치를 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 것은 공부를 했기 때문"이라며 "정치의 본질이 뭔가를 봤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는 "대통령이 국정에 대한 소신이 없고 주변에 쳐진 인의 장막이 너무 심하다"고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요.

"대운하(大運河)계획에 서울대 교수들이 반대했잖아요. 그 말이 나오자 대통령이 금세 접었잖아요. 그걸 보고 그쪽 사람들이 '아! 저게 약점이구나. 이명박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느낀 거예요. 대선 때 공약을 공청회 한번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겁니까. 게다가 방송은 또 뭡니까."

―이 정부가 방송의 힘을 빌리기는커녕 당하고만 있지 않습니까.

"KBS가 공영(公營)이면 공공(公共)을 위해 일하는 정부가 도움이라도 받아야지요. 정연주 한 명 내쫓는 데 진땀을 흘렸잖아요. 그게 뭡니까."

―용산 철거민 사고 후 '서민 괴롭히는 정권'이라는 비판까지 추가됐지요.

"정부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배후가 누군가를 캐야지요. 그런 걸 안 하고 경찰관까지 희생된 일에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만 잘랐어요. 누가 정부를 위해 일하겠습니까."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요.

"제가 하도 안돼 보여서 그 사람을 집으로 불러서 점심을 냈어요. 본인은 '대통령이 사표 내라고 한 건 아니다'라고 했지만 청와대에서 '김석기 죽여 일단락 짓자'는 의견이 나왔겠지요. 대통령은 그때 '김석기 자르는 건 안 돼. 당신이 왜 책임지느냐'고 했어야지요. 도의적 책임이라면 왜 용산구청장이나 관계 장관이나 대통령은 안 집니까?"

―왜 자꾸 그런 일들이 벌어질까요.

"박근혜와도 그래요. 대통령 된 후 제일 처음 만나 '모든 걸 맡아주세요. 내가 대통령이니까 외교, 국방하고 실물 경제에 식견이 조금 있으니 그것만 맡을게요'라고 했어야지요. 이회창씨도 찾아갔어야지요. '한나라당으로 돌아와 주세요'라고 호소해야지요."

―그런 결단을 왜 못 내렸을까요.

"박근혜 들어오면 손해 볼 놈이 여럿 있겠지요. 대통령이 자전거 탈 시간, 모내기 할 시간 있으면 만나서 쓴소리도 들어야지요. 그게 뭡니까."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이제 현 정권의 실체가 궁금하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헌법에 나오는 민주공화국, 주권재민을 지키겠다고 선언했어야지요. 그걸 못하니 소신 없는 정체불명의 정권이 된 거지요."

―과거 정권과 각을 세워야 했다는 말인가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평등에 치중하겠다는 인상을 줬잖아요. 물론 말은 안 돼요. 김대중씨는 상당한 재산가고 노무현씨는 '가진 자에게 고통 주겠다'고 했는데 그건 김정일(金正日)이 할 말이니까요. 지금이 무슨 사회주의 혁명 전야예요? 가진 자에게 고통을 주게."

김 명예교수는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쉬고 있지는 않았다. 글을 썼으며 전국을 돌며 강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일약 주목을 받은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 사후 일련의 발언들 때문이다. 현 정권 지지자는 그에게서 모처럼 자유주의의 자신감을 봤고 반대파는 그를 노망(老妄)났다고 매도했다.

―4월 15일 글에서 노 전 대통령에게 '스스로 감옥에 가든지 자살하라'고 했습니다.

"그 글 때문에 어찌나 난리들인지. 저보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얘기도 듣고 '망령 났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제가 여든두 살밖에 안 되는데 무슨 망령입니까? 저는 지금도 시(詩) 300수(首)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외울 수 있어요."

―댓글은 왜 차단했습니까. 남을 비판하면서 비판받기는 싫은가요?

"댓글 차단은 최근에 한 겁니다. 하루에 십만 명씩 들어오니 홈페이지가 다운되는 거예요. 다른 이들도 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해야 지요."

―왜 '자살'이라는 단어를 쓴 겁니까.

"4월인가 그가 검찰 조사를 받을 때 그가 선택할 길이 그것밖에 없어 보였어요. 혼자서 깨끗한 척 다 했잖아요."

―자살을 권한 게 아니라는 뜻입니까.

"저는 자살을 권장한 게 아닙니다. 의젓하게 구속되고 감옥에서 10년 살라면 10년 살고, 그런 인물이 되란 뜻이었어요. 그의 말 때문에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이 자살했고 안상영 전 부산시장이 자살했잖아요. 우리가 대학입시에 실패해 아파트에서 자살하는 학생들 얼마나 야단쳐요. 그런데 어른 중의 어른인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여준 게 뭡니까. 자살이라니요, 끝까지 살아야지요."

―그래도 뭔가 느낌이 있어 그 단어를 선택한 건가요.

"법을 공부했잖아요. 검찰 조사받으며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자살 전날 TV에서 얼굴을 봤는데 초췌하고 소심해 보이더군요. 저는 그때도 '버티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노 전 대통령이 자살하던 날 놀랐습니까?

"우리 국민 중에 제일 놀라지 않은 사람이 납니다. 저는 '아! 그 길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맨 먼저 났어요."

―그 일로 얼마 전 임채진 전 검찰총장이 물러났지요.

"그 사람도 웃겨요. 나가면 곱게 나가지. 검찰도 그게 뭡니까. 혐의자가 죽었으면 가만히 있어도 조사 다 끝난 거 아닌가요? 왜 '수사를 종결하겠다'고 먼저 말합니까. 검사들만 못 할 짓 한 사람들처럼 됐잖아요."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을 위해서라도 '자살'이니 '사망'이니 하는 말보다 '서거(逝去)'라는 말을 쓰지 그랬습니까.

"지각(知覺) 있는 정부라면 자살한 사람에게 국민장을 허용할 수 없지요. 국민교육, 국민정서상으로도 잘못된 겁니다. 가족들에게 가족장을 권했어야지요. 그건 제 신념입니다."

―그래도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은 통곡까지 했잖아요.

"그 사람 진짜 웃기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그러면 못써요. 나이도 많은 사람이 젊은 사람이 죽었는데 가서 통곡하면 못써요. 김대중씨는 자기 아들이 죽었나요? 공자(孔子)도 제자 안회(顔回)의 장례식에 갔지만 통곡하지는 않았어요."

―친노 진영에서는 '정치적 타살(他殺)'이라고 주장하지요.

"누릴 수 있는 영화 다 누리고 저승 가는 길까지 선택했어요. 그런 사람 성자(聖者)로 만드는 게 우리나라입니다. 정부도 그래요. 대통령 이하 당당하게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가 죽도록 한 건 아니다' 이렇게 나갔어야지요. 그냥 쩔쩔매고 한심해서. 저는 그걸 보고 깨달았어요."

―뭘 깨달았습니까.

"대통령은 새로 뽑았지만 정권교체는 못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에 정부 뒤에 또 하나의 정부가 살아 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지금 정부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일 잘하는 정부지요."

―자발적인 추모자를 욕되게 하는 건 아닐까요.

"자발적 참여도 어느 정도지요. 김수환 추기경 때와 차이가 나잖아요. 저는 노란 모자, 노란 풍선 그렇게 재빨리 만드는 거 보고 놀랐어요."

―서울대 교수를 비롯해 대학교수들도 시국성명을 내고 있습니다.

" 그 사람들 이 대통령 타도 위해서 나온 거 아닙니까. 국민 다수가 선거로 뽑은 대통령을 왜 강압적으로 밀어내려 합니까?"

―이 대통령이 독재를 한다는 소리도 나옵니다.

"아파트나 짓고 도로공사나 하던 사람이 무슨 독잽니까. 독재할 감도 못돼요."

―오래전에 링컨 대통령에 관한 책을 썼지요? 노 전 대통령도 링컨을 가장 존경한다는데.

"링컨은 남북전쟁 후 '아무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든 것을 사랑으로 풀자!'고 했어요. 그런데 그이는 어떻게 했어요. 모든 걸 코드로 풀려고 했잖아요. 링컨의 별명이 뭡니까. '어니스트 에이브(Honest Abe)'였어요. 그 사람이 정직합니까? 링컨을 존경하지만 말고 좀 닮으라고 하고 싶었어요."

―노 전 대통령이 좌파 맞습니까.

"우리가 쓰는 말 중에 제일 웃긴 게 보수, 진보라는 구분법입니다. 보수는 뭘 지켜서 보숩니까? 대학교수 중에 미국 유학 다녀와서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사람들이 '6·25 때 유엔군이 참전하지 않고 맥아더 장군이 없었으면 통일이 됐을 것'이라고 해요. 그럼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교수들 보고 저는 '그때 통일됐으면 당신 같은 사람들은 유학은 고사하고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해줘요. 노무현씨가 이런 말을 했지요. 일본에도 공산당이 있다, 웃기는 이야깁니다. 일본에 휴전선이 있습니까, 공산당이 남침을 엿봅니까? 우리나라에는 좌파, 우파 없어요. 자유민주주의 지키는 사람과 적화통일 원하는 사람뿐입니다."

김 명예교수가 노 전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한 글이 퍼지면서 친노 매체에 '김동길은 실패한 정치인'이란 기사가 등장했다. 그는 '실패한 정치인 맞느냐'는 질문에 의외로 선선히 "실패한 정치인이 맞다"고 했다. 그는 정치에 뛰어든 걸 후회하지 않는 이유를 '공부 값'이라고 했다.

―홈페이지 첫 번째 글이 1992년 대선 당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려다 고(故)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한 내용입니다. 당시 '돈을 받고 양보했다'는 등의 루머가 있었지요.

"어느 날 정 회장이 저보고 장가를 가래요. '김 교수도 이제 장가가서 아들 낳고 딸 낳고 해야지. 결혼하면 내가 100억원 줄게'라는 거예요. 제가 그랬지요. '제가 왜 결혼을 합니까? 결혼 안 해요'라고요. 그때 돈 받았으면 제가 이럴 수 있겠어요?"

―원래 여자를 싫어합니까?

"남자와 여자는 서로 좋아하는 게 정상이지요. 남자가 남자 좋아하는 거는 질색이지만요."

―평생 좋아했던 여자가 있기는 한 겁니까.

"좋아하는 여자가 왜 없었겠습니까만 누구와 가까웠다고 하는 건 자기 삶을 영위하고 있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결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에요. 한마디로 '투 폴 인 러브(To Fall in Love)'여야 하는 데 그건 헤어나지 못하는 숙명적인 거거든요."

―그럼 사랑은 해봤는데 항상 헤어나왔나요.

"저도 결혼했으면 처자식 먹고살도록 돈을 벌었겠지요. 여자에게 충성도 했을 거고요. 대신 내 자유는 제한됐을 겁니다."

―고(故) 정 회장이 애초에 대권 후보 맡길 생각이 없었던 겁니까,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다는 뜻입니까.

"처음에는 아니었지요. 저보고 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14대 총선에서 통일국민당이 약진(躍進)을 했잖아요. 그걸 보고 슬그머니 딴 마음이 든 거지요."

―어떻게 접근하던가요.

"처음에는 저와 의형제를 맺자며 문서까지 가져왔어요. 나는 정 회장이 의리가 없어 보여 서명하지 않았지요. 나중에 그가 '내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으니 이번에 해보자. 당신은 나중에도 기회가 있지 않으냐'고 했어요. 그때 저는 할 말이 별로 없었어요. 내가 내 입으로 대통령 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정 회장이 대통령 해보라며 끌어낸 거니까요."

―정 회장은 자기가 대통령이 될 걸로 믿었습니까?

"정 회장은 당시 민자당으로 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지명을 못 받을 걸로 봤어요. 그래서 YS를 찾아가 '당을 만들 테니 오세요'라고 한 겁니다. 그 말에 YS가 '내가 후보 안되면 노태우 목덜미를 물고 늘어질 겁니다'라고 했답니다. 노씨의 비행(非行)을 알고 있었던 거지요. YS는 정치판의 귀재(鬼才)예요. 그런데도 정 회장은 당을 만들었어요."

―대통령에 당선된 뒤 YS가 탄압을 했겠군요.

"당선 일성이 국민당을 향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당'이라는 거였어요. 그 소리를 듣고 정 회장이 다운(down)됐어요. 현대그룹 전체에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감지한 거지요."

―그래서 정 회장이 DJ(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기댄 겁니까?

"정 회장이 북한에 1차로 500마리, 2차로 501마리 소를 끌고 가고, 금강산 관광한 것은 통일이라는 큰 꿈이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현대가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죠. 김정일에게 돈 퍼주는 버릇은 그때부터 생긴 겁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요.

"김정일은 돈을 원했고 DJ는 노벨 평화상을 원한 거지요. 저는 맨투맨 작전으로 받은 노벨 평화상이 부끄럽기 짝이 없어요. 테레사 수녀처럼 노벨 평화상 수상 소식을 전했을 때 '왜 내가 받아요'라고 말할 정도의 분들이 받아야지요. 공작(工作)해서 받으면 뭐해요. 우리가 먼저 북으로 간 것도 잘못됐어요."

―먼저 손을 내미는 건 괜찮지 않은가요?

"우리가 형이고 북한이 동생뻘이면 김정일이 먼저 왔어야지요. 나이도 많은 사람(DJ)이 양복은 새로 해 입었는지 단정하게 평양 순안비행장에 내렸을 때 김정일 차림이 그게 뭡니까. 돌아와서는 또 김정일보고 '식견 있는 믿을만한 지도자'라고 거짓말했잖아요. 김정일이가 답방한다고 했지만 왔습니까? 그때 왔으면 저는 DJ보고 '당신도 남대문 시장에 가서 김정일이 점퍼 비슷한 거 하나 사 입으라'고 했을 거예요."

―이 모든 게 정치에 입문한 후 배운 것들인 모양입니다만, 김 교수 자신도 이 당 저 당 옮겨 다니지 않았습니까? 나중에는 자민련까지 갔지요.

"국민당이 망가지면서 합당하느라 그리된 거예요. 김종필씨가 저 자민련에 잡으려고 전국구 준다고도 했지만 저는 정계 은퇴했어요."

―이렇게 거침없이 이야기하다 보면 겁이 날 때가 있지 않나요.

"저는 나이 들어서 요 깔고 병들어 죽는 게 제일 싫어요."

―혹시 누가 김 교수께 '낚시나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3김은 정치를 했고 저는 글 쓰는 데 왜 낚시를 갑니까? 저는 지금도 전국으로 강연 다니고 하루에 100통씩 편지를 받아요. 그 중 90%가 제게 찬성하는 분들입니다. 저 외롭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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