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연습이 없다.'고 하면,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학생들은 얼른 납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까닭은 배우는 학교의 과정에서는 '연습'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처한 현실은 모든 학년과 학교의 단위가 그 윗단계로 진학하기 위한 연습과정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처럼 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의 모든 학습과정이 모두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연습과정으로 휘말리는 통에 학생들에게는 '입시지옥'이라는 이름이 붙은 대학입학의 그늘 속에서 가리워지게 되었고, 따라서 고등학교까지의 모든 삶은 일종의 '연습'이 되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학교교육 과정에서만 볼 때 그런 것이지 삶에는 연습이 없다.
삶에는 과정이 있다. 어린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 등이 그것이다. 그것은 식물이 싹이 나고, 가지가 생기고, 꽃이 피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관계와 별 다름이 없다. 그런데 누군가 주장하는 '어떤 식물이 있는 이유는 열매를 맺는 데 있다'는 논리로 비추어 생각하기를, 사람이 공부하는 것은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을 일종의 도구로 착각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식물을 실리적(實利的)인 눈으로 볼 수도 있으나 심미적(審美的)인 눈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런 눈으로 볼 때 새싹은 그것대로 아름답고 또 열매보다 꽃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요는, 어느 한 단계가 다른 단계를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그것대로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의 삶은 어느 순간도 상대화될 수 없고 그때, 그 자리, 그 경우마다 아름답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중학교 시절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중학교 시절을 고등학교의 예비기간으로만 보면 그때는 잃어버린 때가 되며, 또 고등학교 시절을 대학생활의 연습기간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인간의 삶에서 가장 귀중한 한 토막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빚고 만다.
삶의 어느 시절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점(點)'처럼 되어 있다. 그런 점들이 엮어져 그 사람의 전체 삶이 된다. 이것을 점철(點綴)이라고 한다. '점'은 그 자체로 소중하며 그 자체 안에 고유한 가치가 있고 다시 반복할 수 없는 기회다. 그러므로 그 어느 한 시절도 상대화해버리면 삶이라는 선(線)에 이상이 생긴다.
어른들 중에는 '지금은 연습기간이다'라고 생각하는 사이에 벌써 늙어 버린 자신 앞에 당황해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은 이 '연습'이라는 것을 마치 무대에 나서기 전에 잘못하면 얼마든지 다시 반복할 수 있는 배우의 연습(演習)처럼 착각한다. 자신이 '그것은 연습이었다'고 자위를 하는 동안 현실 속에서는 이것이 바로 나의 삶을 냉혹하게 판정하는 성적표가 됐다는 사실 앞에 깜짝 놀라는 사람이 많으나 그 때는 이미 늦은 것이다. 삶은 언제나 무대 위에 있지, 무대 뒤에 있지 않다. 중학교, 고등학교의 생활도 무대 위에서의 삶이지, '대학'이라는 무대에 나서기 위해 연습하는 삶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때가 되면!'이라는 말은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 아니, 지금은 지금으로 현실이고, 그때는 그때가 지닌 현실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미룬 과제를 '그때'가 맡아서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연습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지금의 내 삶을 전체로써 채우고, 전체로써 발휘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이 나이가 들면 눈이 나빠져서 안경을 쓰는 현실을 보고 자신은 그러지 않기 위해서 젊었을 때 한 눈은 봉해 버리고 한 눈만 사용하기로 했다. 그는 그 눈이 나빠졌을 때 유보해 둔 다른 눈을 활용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한 눈이 나빠져 봉했던 눈을 열었지만 그 눈은 완전히 볼 수 없는 눈이 되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아마도 누군가 지어낸 말일 게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많은 뜻을 담고 있다. 한 눈을 봉했으니까 남은 한 눈으로 사물을 보았을 것이지만 그 결과 그 눈도 더 빨리 상했을 것이니, 이 이야기는 결국 '유보'하려다가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사람의 경우를 잘 풍자한 것이다.
삶은 유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활용해야 한다. 활용하면 그것은 점점 개발되고, 유보하면 퇴화되어 버리고 만다. 그것은 생리학에서 볼 수 있는 경우와 같다.
'삶에는 연습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삶을 유보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시간을 향해서 잠깐만 기다려 달라는 부탁이 어리석은 일인 줄 안다면, 삶도 기다려 주거나 그렇다고 앞당겨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시간을 시계로 착각하고 반복되는 것으로 알기 쉬우나 사실상 반복이란 없는 것이다. 삶도 역시 언제나 일회적(一回的)인 것이지 그것은 반복되지 않는다. 메피스토텔레스의 마술로 파우스트가 삶을 되풀이해 보는 일이 있으나 그것은 현실이 아니며, 오히려 그 이야기는 삶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는 엄격성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삶의 어느 토막도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어느 때, 어떤 삶의 순간도 '연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학습에는 '연습'이 있고 '연습'은 반복해야 한다. 그러나 삶에는 반복이 없다. 그러니 연습이 아니다. 그러니까 삶은 그만큼 존엄하고 주어진 때와 상황이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