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작가지망 이혼녀에서

해리 포터의 성공을 일구어낸 조앤 롤링 이야기

 





‘아이 딸린 가난한 이혼녀에서 억만장자 작가로 변신!’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K. 롤링의 삶은 그 자체가 현대의 신데렐라 이야기다.
롤링은 1997년 해리 포터 시리즈 제1탄인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내놓기 전까지만 해도
가난한 이혼녀였다. 생활비가 모자라 정부보조금으로 딸을 양육했다.
작가지망생이어서 글을 쓰고 싶었으나 집에는 집필공간이 없어서 동네 찻집의 책상에서
손으로 원고를 써내려 가던 처지였다.





▲ 해리 포터의 저자 조앤 K. 롤링

그랬던 롤링이 지금은 세계적인 명사가 됐다. 2001년 의사와 재혼해서 현 남편과의 사이에 낳은 두 아이를 포함, 세 아이들과 함께 19세기에 세워진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대저택에서 살고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된 덕분에 롤링은 천문학적인 부를 쌓았다. 2005년 12월 현재 그의 재산은 약 1조원에 이른다. 사회적인 명예도 최상급이다. 그는 포브스지(誌)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도 포함돼 있다. 그것도 순위가 급상승 추세다. 올해는 지난해 85위보다 45계단이나 껑충 뛰어오른 40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올해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75위였다.

조앤 K. 롤링은 1965년 7월 31일 영국 치핑 소드베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피터 롤링은 비행기 공장 지배인, 어머니 앤 롤링은 실험실 연구원이었다. 그의 부모는 영국의 전원과 책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호기심이 많고 활동적인 아이였다. 아이는 종종 자기 방이나 뒤뜰의 키 큰 풀숲 속에서 상상놀이를 즐겨하곤 했다. 그런 아이의 상상력을 한껏 길러주기 위해 부모는 아이가 어릴 때부터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집안이 온통 책으로 뒤덮여 있었고, 부모님은 끊임없이 번갈아가며 내게 책을 읽어주셨지요.”

그는 일찍부터 천부적인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드러낸다.
두 살 터울의 여동생 디가 세 살이 되자 다섯 살짜리 언니는 환상적인 동물들과
이상야릇한 장소들에 대해 앞뒤가 제대로 갖춰진 이야기들을 만들어서 동생에게 들려주기 시작했다.

그는 여섯 살이 되자 첫 번째 이야기를 종이 위에 연필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래빗(Rabbit)이란 이름의 토끼에 관한 것이었다.
아이의 머릿속에선 홍역에 걸려 고생하는 토끼와, 토끼를 문병 온 몸집이 큰 꿀벌
미스 비(Miss Bee)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에 관한 깜찍한 이야기가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그후 수년간 오로지 토끼에 관한 이야기만 썼으며 마치 토끼에 중독이라도 된 듯했다”고 말했다.

사춘기에 접어든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다행히 친구들은 그의 글을 흥미로워했다.
“점심시간 때 친구들을 모아놓고 기나긴 이야기를 연속해서 들려주곤 했지요.
이야기 속에서 영웅적이고 신나는 모험을 마음껏 즐기곤 했어요.”

엑세터대학 불문학과를 졸업한 뒤 비서직으로 취직했으나 얼마 뒤 해고를 당한다.
그는 최악의 비서였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고 있든 늘 정신나간 사람처럼 무언가를 긁적이고 있었어요.
내 이야기들을 컴퓨터로 깔끔히 타이프할 수 있어서 그나마 즐거울 수 있었어요.”

그후 옛 남자친구와의 재회를 계기로 맨체스터 상공회의소 사무직을 얻었다.
집이 있는 런던과 맨체스터를 기차로 오갔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으로 돌아오던 중 갑자기 기차가 덜커덩 멈추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그때, 해리 포터에 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내 마음의 눈에 해리와 그가 다니는 마법학교가 선명하게 보였어요.”

기차가 런던의 나이츠 크로스(Knight’s Cross)역에 정차했을 때 그의 머릿속엔 이미
해리 포터 첫 번째 이야기의 기본 컨셉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해리의 흥미진진한 모험과 등장인물들의 기기묘묘한 이름을 고안해낼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달콤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정신적 지주인 어머니가 갑작스레 돌아가신 것이다.
게다가 스물여섯 나이에 또 다시 일자리를 잃었고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던 중 평소에 품었던 ‘먼 나라에 가서 글을 가르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마침내 현실로 다가왔다.
포르투갈 북부의 소도시 오포르토의 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여기서 해리 포터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한다.

이 무렵 그는 포르투갈의 TV 방송국 기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그러나 첫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1992년 첫 아이를 임신했으나 남편과는 결국 이혼하게 된다.
그는 여동생으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같이 살자’는 편지를 받고 영국 에든버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딸 제시카와 옷가방 하나, 그리고 제3장까지 완성한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원고뭉치가
그가 가진 전부였다.

현실은 비참했다. 그는 훗날 피플지(誌)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밝혔다.
“갓난아기는 있죠, 일자리는 없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낯선 장소에 내동댕이쳐진 셈이었어요.”
간신히 꾀죄죄한 단칸방을 구해 비바람은 피했지만 그는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모든 힘을 쏟아서 어떻게든 빨리 해리 포터 이야기를 완성하고픈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글에만 매달리는 게 딸아이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어느 비 오는 날 오후,
그는 여동생 디에게 해리 포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던 동생은 금세 빨려들어갔고 언니에게 그때까지 써놓은 원고를
모두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여기서 그는 용기를 얻는다.
결국 그는 1년 이내에 책을 완성해서 출판을 하기로 결심한다.
생계는 공공보조금을 신청해서 해결하기로 했다.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 글을 써내려갔다.
집에서는 글을 쓸 공간이 없어서 잠든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근처 카페로 가서
구석 테이블에 앉아 손으로 원고를 썼다.
그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원고가 완성되자 그의 글에 관심을 보인
크리스토퍼 리틀이라는 에이전트를 통해 영국 굴지의 출판사들에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원고를 받아주겠다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그러다가 1996년 블룸스베리(Bloomsbury)라는 출판사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 출판사가 제시한 판권 금액은 겨우 2000파운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블룸스베리에서 판권을 사간 지 몇 달도 안 돼 이 책은 입소문을 타고
전세계 출판업자들로부터 문의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대한 관심은 1997년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아동전시회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책의 내용에 반한 아더 A. 리바인이라는 출판기획자가 이 작품의 미국 판권을 달러로
여섯자리 숫자의 거금을 내고 산 것이다.

아동도서 출판 사상 미증유의 선불금을 기록한 이 작품에 관한 소문은 곧 세계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1997년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영국에서 출판됐다.
오랜 세월에 걸쳐 준비된 데뷔작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지금까지 시리즈 여섯 권이
모두 공전의 히트를 치는 세계 출판사상 대기록을 세웠다.

그는 작가가 되는 길을 묻는 어린이들에게 어떻게 글을 쓰는지 감이 올 때까지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우선 읽어보라고 충고한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부터 쓰기 시작하세요.

여러분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적는 겁니다.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있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00억 부자 가수방미의 놀라운 재테크 비법 첫 공개 80년대 ‘날 보러 와요’ ‘올가을엔 사랑할거야’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미모의 여가수 방미. 가수가 아닌 재테크 전문가, 100억원대의 자산가로 돌아온 그녀가 들려주는 실전 재테크 노하우. “오후에는 ‘7080 가요콘서트’ 공연이 있으니까 아침 일찍 오세요. 제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준비하고…. 9시 30분쯤 오면 되겠네요.”
말투가 싹싹하고 시원시원했다. 집을 번듯하게 꾸며놓지 않아서 볼 건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오라고 화끈하게 OK한 가수 방미. 한강과 한적한 한남동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UN빌리지 언덕 위의 경치 좋은 집.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미드나이트블루 미니스커트와 톱을 차려입은 그녀의 이미지가 상쾌한 아침과 잘 어울렸다. 입구를 따라 거실에 도착했을 때 기자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거실에는 TV와 소파 2개, 안방에는 침대 하나, 작은 방에는 콘솔 하나가 전부였다.

 

분명 그녀가 100억원대의 부자라는 소문을 듣고 갔는데 말이다. “아니, 필요한 가구만 있으면 되지, 뭘 더 사야 하나. 하나하나 다 갖춰놓고 살려면 한도 끝도 없고, 그런 게 다 사치예요. 하하.”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거실의 통유리창 옆에 있는 책상은 학원을 운영하는 친구에게 얻어온 것이다. 아이들이 쓰던 책상이라 마징가Z부터 드래곤볼까지 스티커가 빼곡하게 붙여 있다. 부엌의 한 코너에는 스타벅스 커피잔이 소복이 쌓여 있다. 분리 수거를 잘 하는 구나 싶었다.

 

“이거 종이컵 하나에 50원 주잖우. 60개 모으면 아메리카노 한 잔이 공짜라니까!” ‘하하하’ 웃다가 고개를 돌리니 커피숍에서 들고 온 냅킨 한 움큼이 시야에 들어왔다. 소박한 생활상이 신선했다. 부자는 어느 한순간에 되는 게 아니구나.

 

종이컵 하나도 버리지 않는 짠순이 살림꾼 그녀는 원래 MBC 코미디언 공채 2기 출신이다. 그러나 가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1980년 ‘날 보러 와요’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했고,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데뷔하자마자 히트곡을 낸다는 게 어려운데, 참 운이 좋았어요. 갑자기 바빠지니까 혼자서 스케줄 관리를 못 하겠더라고요. 마음에 맞는 매니저도 만나야 하고 그래서 81년부터는 매니지먼트 회사에 소속돼 일을 했어요.” 그때부터 영화와 CF에도 출연했고, 라디오 DJ로도 활약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다.

그러다 93년 겨울, 그녀는 모든 활동을 접고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노래가 아닌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10대 댄스 가수들 중심으로 가요계 판도가 바뀌니까 설 자리가 없더라고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제 노래가 댄스곡인가요? 아니면 발라드인가요? 그렇다고 트롯인가? 나이 든 가수가 노래 부르면 무조건 트롯이 되잖아요. 그렇게 어중간하게 분류되는 게 자존심 상하더라고요.

 

”구체적인 일정과 계획을 세우고 가지는 않았다. 일단 보스턴에서 1년 동안 영어 공부를 했고, 뉴욕으로 건너가서 연극 공부를 마쳤다. “미국에 있으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새로운 사람 만나면 말수도 없고, 내성적이었는데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그런 게 없어졌어요. 한국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아는 척하는 게 싫었는데 미국에서는 유학생들이나 아줌마들이 조금만 아는 척 해줘도 너무 반갑더라고요.”

 

그녀는 특히 뉴욕을 사랑했다.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음악, 패션, 공연, 재즈, 영화, 미술, 건축, 새로운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곳.

가수 생활을 하면서도 아파트 분양 재테크를 줄곧 해왔던 그녀는 미국에서도 일을 벌였다. 미국에 올 때 1달러당 800원이었던 환율이 IMF(98년)가 터진 뒤 1달러당 2200원까지 치솟은 것. 유학 자금으로 가져왔던 14만 달러와 집 안의 가구들, 고가로 구입한 벤츠 자동차까지 팔아서 한국으로 달러를 송금했다.

 한 달 만에 2배 이상의 환차익을 볼 수 있었고, 그 이익금을 뉴욕에서 콘도 분양받는 데 투자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타이밍을 잘 잡으니까 돈이 불어나더라고요. 미국에 있는 동안 환율의 힘이 꽤 무서운 거구나 느꼈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재테크 공부를 했어요.” 뉴욕 부동산 시장을 누비다 생활력은 강했지만 수입과 지출 관리를 잘 못했던 어머니, 노름의 유혹에 빠졌던 아버지로 인해 부유하게 살지 못했던 어린 시절이 그녀를 악착같이 만들었다. 가수 데뷔하기 전까지 줄곧 네 식구가 방 한 칸에서 함께 지냈단다. 그렇다 보니 아껴 쓰는 생활이 몸에 배었고, 돈 모으는 재미에 주파수를 맞추게 된 것이다. 지인을 통해 알게 된 부동산 중개인을 만나 부동산 시장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꾸준히 부동산 전문 서적들을 읽으며 공부했다. LA와 뉴욕을 오가면서 지내다 작년 1년 동안은 뉴욕에 머물며 콘도를 사기 위해 수없이 집을 보러 다녔다. 가는 분양 하우스마다 한국인들이 있었고, 어떤 날은 아침 예약 다섯 팀 모두가 한국 사람인 날도 있었다. 뉴욕의 부동산에 동양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새삼 느끼게 됐다. 그렇게 알게 된 부동산에 관심 많은 사람들과도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1년 전에 맨해튼72가 리버사이드 쪽에 있는 30달러짜리 콘도를 샀어요. 맨해튼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었죠. 그리고 몇 달 만에 60만 달러에 팔았어요. 일명 ‘치고 빠지기 작전’이라고 하잖아요.” 집을 살 때는 분양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분양 값과 감정가는 다르기 때문에 시세 파악을 정확하게 하고 나서 집을 사야 한다는 것. 특히 미국은 담보금을 50% 내고, 나머지는 대출을 받아 상환하는 방식으로 부동산 거래가 이루어지므로 융자 상품도 이자율을 꼼꼼히 따져서 결정해야 했다. 그녀는 한국에서도 가수 데뷔하면서부터 아파트 재테크를 줄곧 해왔다. 데뷔 당시 그녀의 재산은 한 달 월급 9만원. 비과세 정기적금 4개와 일반예금 통장 1개가 전부였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밥값도 아껴 알뜰히 모으는 정도였다. 그러다 80년대 초반에 옴니버스 앨범 중 ‘One night two days’가 히트하면서 1200만원의 목돈이 생겼다. 그녀는 그 돈에 4개의 적금을 해약한 돈까지 보태 아파트를 계약했다. 방 한 칸에서 월세로 살던 처지를 청산하고 신반포 아파트에 전세로 입주한 것. 아파트가 살기에 편하고 좋다는 걸 이십대 초반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 후 신반포 아파트를 내놓고 방배동 아파트를 매입, 10개월 만에 300만원의 차익을 봤다. 다시 여의도, 방배동에 있는 아파트를 옮겨가며 6개월~1년 주기로 매매와 매도를 했다. 1억원으로 샀던 여의도의 아파트가 2년 사이에 5억5000만원까지 치솟는 등 이익금도 커졌고, 평수도 조금씩 넓혀 갔다. “20년 동안 서른 번을 이사했어요. 부동산, 그것도 주택으로 재테크하려는 사람들은 집을 사서 평생 살겠다는 마인드를 바꿔야 해요. 재건축에 들어갈 집이나 꾸준히 집값이 오르는 아파트 등은 차익 실현을 하는 대로 치고 빠지는 거예요.” 현재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주택은 강남의 아파트 한 채, UN빌리지의 100평대 빌라, 논현동의 빌딩 한 채다. 100억원을 호가하는 자산이다. 그녀는 집을 살 때 반드시 대출을 받는다. “평수를 늘리거나 목이 좋은 데로 옮길 때마다 대출을 받았어요.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금이 그만큼 있으면서 뭐 하러 대출 받느냐고 해요. 아니 왜 은행 좋은 일을 시켜요? 은행은 돈을 빌려주는 곳이지, 우리가 돈을 갖다주는 곳이 되면 안 되죠.” 그녀의 은행 거래는 통장 2개가 전부다. 한 개는 3개월 동안 쓸 생활비가 들어 있는 저축통장이고, 또 하나는 대출 통장이다. 대출을 받아 집을 사기 전에 임대료 수익률을 미리 계산해 봐야 한다. 임대료로 대출 이자를 갚고도 돈이 남는지 따져보는 손익 계산은 필수 사항이다.

 

한국의 ‘도널드 트럼프’를 꿈꾸는 파워 우먼

 

 행복의 기준이 뭐냐는 물음에 그녀는 서슴지 않고 ‘경제적 여유’라고 말한다.

 

“돈에 혈안이 돼서 안달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돈이 있다면 분명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게 많아진다는 거죠. 그런데 그 돈이라는 걸 좋아해야 사방 천지에 돈 벌 거리가 보인다니까요. 돈을 사랑하고, 돈 벌 의욕이 넘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금융 교육을 하고 싶어요.”

재테크는 이론 공부만으로는 안 된다. 실전 투자와 이론 공부를 병행해야 재테크 공식을 터득하게 되는 것. 아파트 부동산 투자와 뉴욕에서의 콘도 분양 투자 등 높은 실적의 포트폴리오를 구상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그녀에게는 꿈이 있다. “맨해튼 중심에 큰 콘도를 살 거예요. FTA도 체결이 됐고, 조만간 미국 가는 데 비자가 필요 없게 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다면 앞으로 누가 동남아 여행을 가겠어요. 비자 받는 게 까다로웠던 미국을 대거 여행이나 공부하러 올 테고, 특히 뉴욕에 엄청난 한국인이 들어올 거예요. 한국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사서 운영하고 싶어요.”

 

뉴욕 하면 방미가 떠올랐으면 좋겠단다. 그것이 그녀의 사업 컨셉트다. 맨해튼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타임스퀘어와 록펠러센터 곳곳에 집과 빌딩을 갖고 있는 21세기 재벌 사업가 도널드 트럼프처럼 되고 싶다는 것. 부를 거머쥐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막 뉴욕 생활을 시작한 유학생들이나 여행객들에게 뉴욕 정보를 알려줄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벌써 2년 전부터 좋은 콘도의 자리와 투자 가치가 있는 매물을 찾고 있다는 그녀. 올가을쯤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하려고 한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더 길어질 듯싶다. 외롭지는 않을까. “독신주의자는 아니에요. 같이 운동도 하고 진심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만나고 싶죠.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네요. 결혼은 더더욱 엄두가 안 나요. 제가 요리를 정말 못하는데 남자랑 맛있는 밥 사 먹을 돈은 있잖아요(웃음). 하루 세 끼 즐곧 사 먹자고 하면 남자가 도망갈까요? 하하.” 아직은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많아서 혼자 지내고 싶다는 그녀. 8월에는 두 달 동안 토론토 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 바쁜 일상이 휘몰아치기 전 자신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달콤한 시간이 될 듯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계단의 원리를 좋아한다.

 

올라갈 때도 한 계단, 내려갈 때도 한 계단이다.

 

최근 두 차례 주요 대회에서 우승했는데,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오픈마저 제패했다면 여러 계단을 한꺼번에 오르는 것이다.

 

삶에서도 여러 계단을 한꺼번에 오를 수는 없다.

 

그러면 나중에 열 계단씩 한꺼번에 내려앉을 수도 있다.

 

이는 자만심 때문이다.

 

스포츠맨은 계단의 원리를 지켜야 한다.”

 

 

-프로 골퍼 최경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금융권 출신인 이상기(가명. 40)씨. 상고 출신인 그는 10억원 이상의 자산가다. 책 읽고 공부하는 게 취미지만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곧장 취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가정 형편 탓이었다.

.
그러니 물려 받은 재산은 있을 턱이 없다. 그가 10억을 모으는데 삼은 밑천은 ‘읽고 예측해 타이밍을 잡는 취미’다. 한 마디로 ‘지식’이란 얘기다.

.
하루에 5개 이상 신문 읽어

.
이씨는 하루에 5개 이상의 신문을 읽는다. “종합지 3개에 경제지 2개는 필수죠. 여기에 경제주간지와 부동산 전문지도 꼭 보구요. IT붐이 일기 훨씬 전인 1994년께부터 전자신문도 구독했습니다. 전산 관련 부서에서 일할 때부터 들인 버릇이죠. 그렇게 4∼5년을 했더니 뭔가 트렌드를 보는 눈이 생기더군요.”

.
신문이 현재라면 책은 미래다. 그는 신문과 책 읽기를 병행한다. 그가 구입하는 책은 연간 1백여권. 이 가운데 30∼40권은 정독하고 나머지는 통독한다. 신문에서 얻은 현실의 단편적 지식을 책을 통해 종합 정리하고 큰 줄기를 잡는 것이다. 이런 식의 버릇을 들인지가 10여년이나 됐다.

.
하지만 이런 습관이 당장 돈을 벌어다 준 것은 아니다. 그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경영학)에 대학원(경제학)까지 마치느라 본격적인 재테크에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했다.

.
금융권 근무라는 점을 활용해 빚을 내서 주식투자도 해 봤지만 돈만 날렸다. 증권업계 직원들의 말에 너무 의존했던 게 화근이었다. 그러다보니 직장생활 17년이 된 99년까지도 ‘대출 낀’ 수도권 1억7천만원짜리 아파트 한 채가 그의 전재산이었다.

.
“돈을 잘 쓰기 위해 번다”는 철학을 가진 그는 마냥 허리띠를 졸라매는 저축도 하지 않았던 터였다. 그러던 그가 본격적인 나선 것은 99년 초였다. 그해는 이씨에게 여러면에서 잊을 수 없는 해로 기록된다.

.
“IMF가 터지고 대기업들이 줄줄이 무너지면서 중소기업 육성이니 벤처기업 지원이니 하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더군요. 신문 등 정보를 보면서 나름대로 분석한 결과 정부가 적극적인 중소기업 지원과 벤처 육성책을 쓸 수 밖에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
그는 우선 99년 1월 추가 대출을 받았다. 유망 벤처 종목을 발굴했기 때문이다. 그래픽(VGA)카드를 만드는 가산전자(현 M플러스텍)였다.

.
“당시 전산관련 업무를 보다가 가산전자를 알게 됐죠. 매일 컴퓨터를 만지다보니 그래픽 카드 시장이 크게 성장하리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다른 업체들도 있었지만 대만업체에 지지 않을 만한 경쟁력을 갖춘 회사는 가산전자 정도였어요. 그때 주가는 2백∼3백원 수준이었죠. 이건 확실히 된다 싶더군요.”

.
그는 대출 받은 2천만원으로 이 회사 주식을 샀다. 가산전자 주가는 99년 말 1만원 대를 뛰어넘어 최고 1만4천원에 육박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씨가 매각으로 실현한 이익은 약 2억여원. 2000∼2001년에 걸쳐 주당 2천5백∼3천원 수준일 때 팔았다.

.
그래도 수익률 10배를 넘는 대박이었다. 99년 하반기 그는 장외시장으로 옮겨갔다. 거기서 통신관련 종목들에 총 5천만원을 투자했다. 이듬해 7월과 8월에 걸쳐 회수한 액수는 총 6억여원. 약 11배 이상 뛴 셈이다.

.
무조건 집부터 사라

.
이씨는 그해 말 퇴사를 결심한다. 좀더 본격적으로 벤처 붐 타기를 위해서 였다. 그는 코스닥 등록을 준비하는 중소기업의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겨 재무담당 최고책임자(CFO)를 맡았다. 구조조정과 투자 유치가 그의 주된 일이었다.

.
연봉은 별로 높지 않지만 스톡옵션을 받아 짤짤한 재미를 봤다. 1년여 지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그는 컨설팅 업체를 차리고 본격적인 ‘중소기업 주치의’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컨설팅 비용은 대부분 스톡옵션으로 대신 받았다.

.
그는 컨설팅을 ‘일’이자 ‘투자’로 활용하고 있다. 내실 있는 중소 업체를 발굴해 재포장한 뒤 투자를 유치하고 공개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컨설팅 대가로 스톡옵션을 받는다.

.
컨설팅 대상 업체를 고를 때 보는 기준은 첫째 2∼3년 후 떠오를 업종, 둘째 자질 있는 CEO가 경영하는 기업, 셋째 시장이 너무 급변하지 않는 업종이다. 지난 2년여 동안 그가 컨설팅한 중소기업은 6개. 이가운데 코스닥에 등록시킨 업체도 2곳이다. 그는 재테크에서 꼭 강조하는 말이 있다.

.
“집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금리가 오르면 인플레가 실물자산에 반영된다. 또 금리가 낮으면 시중 자금이 부동산으로 쏠려서 집값이 오른다. 장기적으로 보면 집값은 어떤 경우에도 오르게 돼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그는 꼭 집을 사라고 강조한다.

.
그가 아파트 평수를 늘려 서울에 입성한 시기도 기가 막혔다. 집값이 들썩이던 초기 2002년 1월이었다. 사실 그 무렵 집값 상승은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다. 2001년 세계경기 동반 침체로 수출이 막히면서 정부는 내수 진작책을 쏟아냈다. 과열된 소비는 문제를 낳게 마련이다.

.
그는 2001년 말 전세값 상승에 주목했다. 대개 32평형 이상의 전세값이 집값의 60%를 넘어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집값 상승의 전주곡이었다. 이씨는 3억원에 43평형 아파트를 매입했다. 현재 시가는 3억9천만원정도다. 9천만원 정도의 차익을 본 셈.

.
모르는 곳엔 손 안 댄다

.
그는 원·달러 환율 1천1백60원대에 달러를 사들여 1천3백원대에서 매각했다. 총 2억원정도 였다. 덕분에 약 12%, 1천2백만원정도의 수익을 올렸다. 골프 회원권도 이씨가 애용하는 투자대상. 최근에는 지난 2000년 11월에 매입해서 이듬해 5월에 매각하면서 약 3천만원의 차익을 올렸다.

.
그가 귀뜸한 골프회원권 투자법은 이렇다. 대개 11월부터는 골프 회원권 시장도 동면이 들어간다. 수요가 줄어들면서 가격이 떨어지게 돼 있다. 이때 구입하면 싸게 살 수 있다. 반면 성수기는 5월이다.

.
하지만 3∼4월쯤 되면 골프회원권 시장은 들썩거리기 시작한다. 파란 잔디가 돋아나면 ‘나도 골프회원권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게 마련. 그래서 수요가 늘어난다. 이때 내다 팔면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다.

.
그는 환율·부동산·골프회원권 등은 현실투자, 즉 단기운용에 속한다고 말한다. 반면 벤처투자는 2∼3년 후를 내다보는 장기투자다. 그가 주로 투자하는 벤처 업체는 미래형 산업. IT업종과 엔터테인먼트 업체로 제한돼 있다. 소프트웨어 업종 역시 투자수익률은 높지만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투자하지 않는다. 제대로 아는 업종 2∼3종목에만 집중한다.

.
그에게는 낡은 ‘아이디어 북’이 있다. 10여년 전부터 쓰기 시작한 그 노트에는 온갖 아이디어가 다 적혀 있다. 트렌드를 예측한 메모에서 경제분석 노트, 책을 읽고 난 후의 독후감, 나이대 별로 해야 할 일을 그린 그래프, 다양한 사업 아이디어까지 꿴 10여년을 하루 5시간 이상씩 읽고 생각하고 분석한 흔적이다. 10억원은 절대로 그냥 벌어지는 게 아니다.

.
이기수씨의 10억 만들기 연보.

.
1982년?취직. 수입의 10%는 책 구입 등 자기개발에 투자.

.
96년 ?분당 32평형 아파트 2억원에 매입 (1억원 은행 대출)

.
97년 ?주식투자로 3천만원 손실.

.
98년 - IMF여파로 이자 감당 못해 분당 아파트 1억6천만원에 매각. 4천만원 손실.

.
99년 - 가산전자 주식에 2천만원 투자.

.
?장외시장에서 서두인칩등 IT관련주 매입. 중소기업 CFO로 전직.

.
2000년 ?가산전자 매각으로 2억원 차익.

.
서두인칩 등 장외시장 투자주식으로 6억원 차익.

.
2001년- 중소기업 컨설팅 본격적으로 시작.

.
3개 업체 구조조정 및 자금조달 컨설팅 수주. 일부 스톡옵션 받음.

.
2002년 ?개 업체 코스닥 등록.

.
3개 업체 컨설팅 수주.

.
서울지역 43평형 아파트 1채, 73평형 빌라 1채 매입.

.
2003년 2월 현재?총 자산 약 13 억원.

.
주식 약 1억원.

.
골프 회원권 약 1억1천만원.

.
아파트(43평형) 약 3억9천만원

.
빌라(73평형) 약 7억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천대학교 공예디자인과를 다닐 때만 해도 오선희 씨의 꿈은 학교를 졸업한 후 원하는 디자인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숍 마스터라는 직업은 고려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그 직업을 특별히 싫어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런 직업이 있는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적어도 용돈을 벌기 위해 백화점 매장에서 판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대학 시절, 선희 씨는 방학이면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정규 사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가 주로 하던 일은 일반 매장이 아닌 그 옆 판매대에서 옷을 파는 것.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녀가 일하는 판매대는 유난히 매출이 좋았다. 정규 매장도 아닌 판매대에서 제품 하나당 6백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게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

파는 옷을 직접 입고 손님에게 권한다거나 어떤 일이 있어도 친절한 태도를 잃지 않았던 그녀의 성실함이 빛을 발했던 것일까?

모델처럼 늘씬한 외모와 붙임성 있는 태도도 큰 역할을 했겠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튼 활달하고 성실한 그녀는 어느 날 한 의류회사 간부의 눈에 띄었고, 그것을 계기로 그녀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때 회장님이 저를 일주일이나 조용히 지켜보셨대요. 손님을 대하거나 물건을 파는 태도를 유심히 관찰하신 거죠. 그리고는 저를 정식 사원으로 채용해주셨어요.”

결국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선희 씨는 베네통의 숍 마스터로 채용되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24살짜리 여자가 일반 사원을 관리하는 매니저로 직장 생활을 시작한 것이니, 이만저만 파격적인 대우가 아니었다.

그녀가 입사했던 94년 당시의 연봉이 2천만원 정도였으니 일반 대기업 사원보다도 훨씬 더 좋은 대우를 받았던 것.

그러나 그 무렵만 해도 숍 마스터라는 직업이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라, 백화점에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부정적이기만 했다.

전공 교수님들과 선배들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계속하라’며 말렸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숍 마스터가 백화점 점원과 무엇이 다른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실 처음엔 선희 씨 자신도 1년 정도 할 생각으로 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1년 동안 일해서 돈을 번 다음, 그 이후엔 공부를 계속하리라는 계획이 있었던 것.

그렇게 부담 없이 시작한 일이 1년을 훌쩍 넘기고 어느덧 3년에 다달았다.

“일을 시작한 지 3년쯤 되니까 슬슬 한계가 오더군요. 일단 매일 12시간씩 근무해야 하는 것이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정신적으로 많이 지치기도 했구요. 그래서 결국 그만두고 말았죠.”


이번에는 전공을 살려 광고 회사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취직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1년을 버티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늘 사람들을 접하던 숍 마스터에 비하면 그녀가 피부로 느끼는 보람이 너무 적었던 것.

사람들 때문에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그들에게서 느끼던 보람도 그 못지않게 컸던 탓이다. 그림을 그리며 혼자 작업하는 날이 많아질수록 숍 마스터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다. 결국, 1년 만에 그녀는 다시 백화점 매장으로 돌아왔다.

백화점 매장에서 일하다 보면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는 매장에서 일할 때는 고생한다며 부침개를 부쳐다주신 아주머니도 계셨고, 여자 친구에게 줄 옷을 대신 입어보라며 그녀에게 옷을 6벌이나 갈아입게 한 남자 손님도 있었다.

“솔직히 그 당시엔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죠. 제가 입어본 6벌 중에서 그 분이 4벌이나 사 가셨지만, 왠지 제가 상품이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나빴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 분이 여자친구와 함께 매장을 찾으셨더라구요. 그때 여자친구가 외국에 있어서 부득이하게 옷을 입게 했다, 그래서 정말 고마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런 것들이 바로 이 직업의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서 얻는 기쁨 같은 것.”

이제 숍 마스터 8년차인 그녀의 연봉은 무려 1억에 달한다. 약 2년 전, 파격적인 조건으로 에고이스트에 스카웃되면서 그녀도 억대 연봉자의 반열에 올라서게 된 것. 물론 매장의 책임자이다 보니 매출액에 따라서 연봉이 좀더 올라가기도, 내려가기도 한다고.

그렇지만 어쨌거나 1억이 아닌가. 평범한 샐러리맨은 그 정확한 액수조차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큰돈. 이쯤 되면 지금의 위치가 만족스럽지 않을까?

“궁극적으로는 웨딩드레스와 한복을 포함한 웨딩 토털숍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에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패션이나 디자인에 대해서 적지 않은 것을 배웠으니까요. 앞으로 더 공부하고 노력해서 꼭 그 꿈을 이루고 싶어요.”

대단하다. 지칠 줄 모르는 그녀의 패기도 1억원짜리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