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뛰어난 작가였던 처칠의 펜 끝에서는 “국민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노고, 그리고 땀과 눈물뿐입니다” “만약 이 나라의 장구한 역사가 끝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우리들 각자가 자신의 피에 질식해서 땅바닥에 쓰러진 후의 일일 것” “우리는 바다와 하늘에서, 강과 항구에서, 들판과 시가지와 언덕에서 끝까지 싸울 것이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같은 명연설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연설들은 마법처럼 영국인들을 일으켜 세웠다. 존 F케네디 대통령의 말대로 처칠은 “영어를 동원해서 전투에 내보냈”던 것이다. 지금도 영국인들은 4만3000여 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낸 1940~41년의 런던 대공습 기간을 ‘가장 좋았던 날’이라고 부르니 그의 ‘마법’은 반세기를 넘어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처칠의 연설이 특별했던 점은 단순히 미사여구 나열에 그치지 않고 늘 역사적 시각을 담고 있었다는 데 있다. 처칠은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긴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고난을 ‘일찍이 우리 선조들도 겪었던 고통과 투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국민으로 하여금 대영제국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존재라는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이는 처칠이 구사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역사학자인 앤드루 로버츠의 지적대로, 처칠의 연설에는 ‘우리는 승리할 것이며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는 결의는 가득하나 어떤 방식으로 히틀러와 싸워 이길 것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은 들어 있지 않다. 처칠은 영국의 힘만으로는 독일을 물리칠 수 없고, 미국과 소련이 참전해야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총리가 된 1940년 5월부터 미국이 참전한 이듬해 12월까지 19개월 동안, 그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승리를 장담하며 전쟁을 이끌어갔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처칠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시각을 갖고 있었다. 주영 미국대사였던 조지프 케네디(존 F케네디의 아버지)는 처칠에 대해 ‘음흉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인물’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그러나 케네디 대사의 보고는 사실과 달랐다. 처칠은 참전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미국을 설득하기 위해 루스벨트에게 1000통이 넘는 편지를 썼다. 진주만 폭격 이후에는 “만약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받는다면 영국은 한 시간 이내에 참전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등, 모든 외교적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결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처칠에게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두 사람은 양국 정상이기 이전에 사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1941년 12월 미국은 일본과 독일에 연이어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 소련은 이미 그해 6월부터 상호 불가침조약을 어기고 침공해온 독일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연설로는 늘 승리를 장담했지만, 처칠은  미국의 참전이 확실해진 뒤에야 승리를 확신할 수 있었다. 대신에 히틀러를 물리친 뒤에는 소련에 유럽의 패권을 넘겨줄 것을 각오해야 했다. “독일에 전부를 주느니 소련에 반만 주는 게 낫다.” 처칠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과 소련의 스탈린 사이에서 회담하는 자신의 처지를 ‘커다란 덩치의 미국 들소와 소련 곰 사이에 앉은 가련한 영국 당나귀’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늘 위트를 잃지 않았던 그는 이 말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그 셋 중에 가야 할 길을 알고 있는 이는 오직 영국 당나귀뿐이지.”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처칠이 남성적인 매력의 소유자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서 깊은 말보로 공작가(家)의 후손이기는 했지만 물려받은 유산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1908년, 영국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히던 클레멘타인 호치에 양과 결혼했다. 스코틀랜드 귀족의 딸인 클레멘타인은 이후 처칠에게 반려자 이상의 정치적 동지이자 안식처, 그리고 최고의 친구였으며, 1남4녀를 낳으며 해로했다. 이 점만 보아도 처칠에게 평균 이하의 외모를 극복할 만한 특별한 매력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못 말리는 엉뚱함
처칠이 가진 매력의 본질은 늘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다는 데 있다. 처칠은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하는 차가운 이성을 가진 동시에, 멈추지 않는 호기심과 못 말리는 엉뚱함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이 ‘장난꾸러기 소년’의 기질은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런던 이스트엔드에서 부서진 집과 거리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우는가 하면, 공습 중에 런던 동물원의 동물들이 놀라지 않도록 하라는 특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군대에 맥주를 지급할 때는 후방보다 전방 병사에게 먼저 지급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해군 장관으로 재직하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참호에서 달릴 수 있는 전차, 즉 탱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탱크를 개발했다. 심지어 그는 전쟁 중에도 진짜 아이처럼 오후가 되면 반드시 낮잠을 자야 했다.  


이처럼 좌충우돌한 성향이 과묵하고 진지한 영국 사회에서 쉽사리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처칠이 정신병 유전자를 물려받았다거나, 알코올 중독자라는 소문이 의회에 끈질기게 나돌았다. 평생 처칠과 정치를 같이했던 로이드-조지는 처칠을 ‘잘 운전하다 갑자기 낭떠러지로 차를 몰아가는 운전수’에 비유했다. 심지어 처칠의 든든한 지원세력이었던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마저 “처칠은 매일 100가지의 아이디어를 낸다. 그중에 여섯 가지 정도는 쓸모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처칠은 엄청나게 정력적이고, 엄청나게 귀찮은 독불장군이었던 것이다.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