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3일, 하원에 출석한 처칠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했다. “내가 국민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피와 노고, 땀과 눈물뿐입니다… 여러분은 제게 물을 것입니다.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나는 대답하겠습니다.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바다와 땅과 하늘에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동원해 싸우는 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여러분은 또 물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이냐고. 나는 한마디로 대답하겠습니다. 승리라고.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도 승리하는 것뿐이라고 말입니다.”  


승리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피력한 처칠의 연설은 성과 없는 협상과 계속되는 패배에 지쳐 있던 의원들을 감동시키고도 남았다. 하원은 만장일치로 그의 총리 임명을 가결했다. 처칠은 곧 보수당과 노동당 인사를 막론한 거국 내각을 구성했다. 부총리에는 노동당수인 애틀리가 임명되었고 처칠 본인이 총리와 함께 국방장관, 해군장관을 겸했다. 처칠은 마침내 국정을 다스릴 전권, 영국의 운명을 자신의 손아귀에 거머쥔 것이다. 그러나 그 운명은 말 그대로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나치스의 영국 본토 공습이 임박했던 것이다. 

 
영국 국회의사당이 있는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區)에는 ‘윈스턴 처칠 박물관 겸 전시 내각의 방(Churchill Museum and Cabinet War Rooms)’이 있다. ‘전시 내각의 방’은 상무부 건물 지하에 비밀리에 지어진 벙커의 이름이다. 미로 같은 지하에 50여 개의 작은 방과 사무실, 회의실, 미국과 연결된 핫라인 전화 등이 설치돼 있다. 처칠을 비롯한 전시 내각은 1940년 10월부터 나치스의 공습을 피해 이 지하 벙커에서 생활하며 전쟁을 지휘했다. 처칠은 ‘이런 곳에 숨어서 전쟁을 지휘해야 하느냐’며 탐탁지 않아 했지만 1940년 10월15일 독일 전투기가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 공관)를 정확하게 폭격하자 지하 벙커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처칠은 작전회의를 숱하게 주재하고, 대서양 건너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밀담을 주고받았으며 새벽 5시까지 전황 보고를 받고 연설문을 썼다. 나치스는 이 비밀 벙커의 존재를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The Finest Hour”
전시 내각의 방을 방문한 관광객은 처칠의 방송 연설 육성을 들을 수 있다. 1940년 9월11일, 독일 공군기가 최초로 런던을 공습한 지 나흘 만에 BBC 라디오를 통해 전 영국인에게 했던 연설이다. 처칠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연설했다. 감정이 실린 열띤 음성이 아닌, 건조하고 침착한 음성이다. 처칠은 공포에 질린 영국인들에게 현재의 전황이 아주 불리하고, 영국이 나치스에 홀로 맞선 대가로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며, 국가 자체가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았다.  


“우리는 다음 주를 영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로 간주해야 할 것입니다. 드레이크 경이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넬슨 제독이 나폴레옹의 군대와 대치하던 그 며칠과 같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상황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인류의 생명과 미래, 문명에 대해 더 큰 규모로, 더 치명적인 결과를 몰고 올 것입니다.… 우리의 의무를 상기하고 분발합시다. 앞으로 1000년간 대영제국과 영연방이 지속된다면, 사람들은 지금 이때야말로 가장 좋았던 시절(The Finest Hour)’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공습의 공포에 질린 채, 숨죽여 라디오를 듣고 있던 런던 시민들에게 처칠의 연설은 마법 같은 힘을 발휘했다. 런던 시민은 이후 4만3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전 시민의 4분의 1이 집을 잃은 9개월간의 대공습을 의연하게 버텼고, 영국 공군은 나치스의 공격을 막아냈다. 처칠은 영국 공군의 응전을 치하하며 “이토록 소수의 손에 이토록 많은 사람의 운명이 걸려 있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고 말했다. 예상외로 끈질긴 영국 공군의 저항에 부딪혀 독일은 영국 본토를 침략한다는 계획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처칠은 여느 총리와 달리 모든 연설문을 직접 썼다. 그는 전시 내각의 방에서 혼자 새벽까지 연설문을 쓴 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비서관에게 연설문을 건네주고 잠에 빠져들곤 했다. 처칠은 학창 시절 수학과 라틴어에서 구제불능의 낙제생이었다. 그는 명문 해로우 스쿨을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학과 라틴어 때문에 3수 끝에 간신히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처칠은 대신 영어와 역사에는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등을 무척 좋아했고, ‘영어 사용 국민들의 역사’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 등 20여 권에 이르는 역사서를 집필했다.  


처칠은 본래 정치인이나 총리, 하원의원이 아닌 작가였다. 30대에 이미 인세와 강연 수입으로 연 6억원을 벌었을 정도다. 처칠은 평생 동안 하루에 8대의 시가를 피우고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영국 남부 차트웰에 고급 저택을 짓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는데, 그것은 그가 귀족 집안의 자제여서가 아니라 20여 권의 저서에서 나오는 인세 수입이 늘 두둑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말처럼 처칠은 “평생 먹고살 돈을 혀와 펜으로 벌었다.”  


“영어를 동원해 전투에 내보낸”  


처칠이 20대에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30대에 입각할 수 있었던 것도 뛰어난 글 솜씨 덕분이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처칠은 짧은 장교 생활을 접고 ‘모닝 포스트’지(紙)의 기자가 되었다. 1899년, 보어 전쟁에 종군 특파원으로 파견된 처칠은 탈선한 열차에서 부상병을 구하려다 포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한 달 만에 포로수용소를 탈출해 이듬해 7월 영국으로 귀환했는데, 당시의 경험을 드라마틱한 종군기로 연재해 일약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사선을 넘나든 보어 전쟁의 경험은 처칠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비명횡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묘한 확신을 안겨주었고, 실제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숱하게 전장을 누비고 다녔지만 매번 무사히 귀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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