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
모자람보다 넘치는 편을 택한 승부사

전원경│작가 winniejeon@hotmail.com│

 
 

한 나라를, 심지어 세계를 쥐락펴락한 그들에겐 어떤 특별함이 있을까. 역사에 기록된 메마른 사실에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음으로써, 세월에 묻힌 그 남자들의 매력을 끄집어내는 일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 첫 번째로,영국의 수장이었으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무엇보다 사후(死後)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영국인이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는 윈스턴 처칠의 매력을 탐구한다.

 
 


남자의 매력이란 어떤 것일까. 능력이나 인간성, 화술 등이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그 사람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외모’일 것이다. 정치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대중에게 늘 모습을 드러내고 평가받는 정치인에게 외모는 결정적인 강점이자 치명적인 약점일 수 있다.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정치 신인 오바마 후보가 4선 상원의원 매케인을 물리친 데는 그의 매력적인 외모 - 188cm의 키에 농구로 다진 강인하고 늘씬한 몸매 - 가 분명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윈스턴 처칠(Sir Winston Churchill·1874~1965)은 ‘매력적인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160cm를 겨우 넘는 단신에 뚱뚱했으며, 등이 굽은 데다 대머리였다. 목은 거의 안 보였고 입술은 너무 얇아 마치 없는 것 같았다. 20세기 영국 정치사에 유일하게 귀족 혈통을 이어받은 총리였지만, 외모만은 결코 ‘귀족적’이지 않았다.

윈스턴 처칠
● 1874년 블렌하임궁에서 출생
● 1893년 샌드허스트 사관학교 입학
● 1900년 하원의원 당선
● 1905년 통상장관으로 입각
● 1908년 클레멘타인 호치에와 결혼
● 1911~1915년 해군장관
● 1917년 군수장관
● 1925년 재무장관
●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해군장관으로
10년 만에 입각
● 1940년 총리 임명
●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총선 패배로 총리직 사임
● 1951년 총리로 재입각
● 1953년 노벨문학상 수상
● 1955년 총리직 사임
● 1965년 91세로 타계

남자의 매력이란 때로 외모의 열등함을 뛰어넘을 수도 있는 모양이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그리고 다시 1951년부터 1955년까지 도합 9년간 영국 총리를 지낸 처칠은 가장 성공한 총리이자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역사에 기록돼 있으니 말이다. 2002년, 영국 국영 방송국 BBC는 ‘지난 1000년의 역사 속에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인’을 설문조사했다. 수백만명의 시청자는 셰익스피어나 뉴턴, 엘리자베스 1세 등을 제치고 처칠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선정했다.  


풍전등화의 영국  


왜 영국인들은 이 땅딸막한 신사, 나비넥타이를 매고 시가를 피우며 승리의 V자를 그리는 단신의 남자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 남자가 국가적 비상사태에 보여준 놀라운 용기와 결단력 때문이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치스에 맞선 최후의 지도자였다. 전 유럽을 무릎 꿇게 만들었던 히틀러도 무모할 정도의 용기와 고집으로 똘똘 뭉친 이 남자를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시계를 반세기 전으로 돌려, 섬나라 영국이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았던 1940년 5월의 런던으로 떠나보자.  


1940년 5월9일 오후, 흔히 ‘빅벤’으로 불리는 템스강변의 국회의사당에 집권당인 보수당의 핵심 인물들이 모였다. 회동의 참석자는 네빌 체임벌린 총리, 에드워드 할리팩스 외무장관,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 그리고 데이비드 마게손 보수당 원내총무였다. 네 남자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거웠다. 이들은 지금 아주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처지다. 이날의 결정으로 영국의, 아니 유럽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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