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에서도 클린턴 캠프는 공화당을 앞섰다. 클린턴 캠페인의 세 가지 핵심 공약, 즉 ‘변화 / 문제는 경제다 / 의료보험을 기억하라’는 1990년대 초의 미국인들에게는 심각하고 현실적인 문제였다. 반면 조지 부시 후보는 걸프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김으로써 지지 기반을 급격하게 상실했다. 선거 결과는 변화를 원하는 미국인들의 갈망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클린턴은 43%의 지지율로 37.4%의 표를 얻은 조지 부시, 18.9%의 로스 페로 후보를 꺾고 미국 제 4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불과 마흔여섯 살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존 F 케네디에 이어 미국 역사상 세 번째로 젊은 대통령이 된 것이다.  


섹스 스캔들, 또는 우익의 음모  


1998년, 클린턴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로 한창 궁지에 몰려 있을 때, 힐러리는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것은 우익의 음모’라고 맞받아쳤다. 실제로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가 진행한 4년간의 조사는 클린턴 개인을 옭아매려는 공화당의 음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국민 대다수는 백악관의 인턴을 데리고 불장난을 한 클린턴의 처신을 비난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할 만큼 심각한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모니카 르윈스키의 증언에 따르면, 국방부 인턴이던 르윈스키는 1995년 11월부터 1997년 3월까지 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서 클린턴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자신의 친구인 린다 트립에게 전화로 이런 이야기를 했고, 트립은 이 전화 내용을 녹음해서 스타 검사에게 전했다. 이 와중에 클린턴의 정액이 묻은 르윈스키의 드레스가 증거물로 등장해 미국인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클린턴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인턴과 성관계를 했다’는 것이 위법일 수는 없다. 스타 검사 측이 탄핵의 이유로 내세운 것은 클린턴이 성관계를 하고도 관계가 없었다고 위증했으며, 르윈스키에게도 위증을 하라고 지시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대통령 탄핵감으로는 지나치게 가벼운 문제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오히려 범죄라면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4년 동안 4000만달러의 예산을 쓴 스타 검사 측이 더 많은 범죄를 저지른 셈이다. 예를 들면 스타 검사가 린다 트립에게 면책특권을 약속하고 르윈스키와의 대화를 녹음해 22시간 분량의 테이프를 만든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익의 음모’라는 힐러리의 공격은 분명 일리가 있다. 국민 대다수는 당연하게도 클린턴 개인의 도덕성보다는 의료보험이나 교육, 실업률, 총기 규제 등 실생활에 연관된 정책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이 같은 문제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대부분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더욱이 집권 2기를 맞고서도 클린턴의 젊고 신선한 이미지가 여전히 어필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화당은 더더욱 클린턴 끌어내리기에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공화당원들이 뉴트 깅리치 하원의장을 중심으로 하원에서 클린턴의 탄핵 동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이 문제를 질질 끌고 감으로써 국민들에게 “어휴! 이제 클린턴이라면 지긋지긋해”라는 혐오감을 부추기기 위한 것이었다. 어차피 대통령 탄핵은 상원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를 얻어야 하는 문제였다. 상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공화당의 ‘클린턴 흠집내기’는 성공한 셈이다. 2000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앨 고어 후보를 누르고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가 당선되었으니 말이다. 텍사스 출신의 부시 후보는 매우 보수적이고 도덕적인 성향의 후보였고, 이런 면모는 클린턴의 ‘리버럴함’에 신물난 유권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고어의 선거운동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 클린턴은 고어에게 “선거운동에 도움이 된다면 내가 ‘워싱턴 포스트’ 사옥 앞에서 당신에게 채찍으로 맞아도 좋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대체 왜 클린턴은 르윈스키와 위험천만한 불륜을 저질렀던 것일까? 이미 그는 민주당 후보 시절 제니퍼 플라워스와의 스캔들로 한번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몇 년째 끌고 있던 폴라 존스와의 성희롱 소송 재판으로 인해 재산의 반 이상을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그는 또다시 르윈스키와 2년에 걸친 밀회를 즐겼던 것이다. 일부 언론은 클린턴이 힐러리와 결혼한 직후부터 외도를 시작했으며, 그가 불륜관계를 맺은 여성이 100여 명에 달할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정신분석학자인 제롬 레빈 박사는 ‘클린턴 신드롬’이라는 책을 통해 클린턴이 일종의 섹스중독증, 즉 섹스를 통해서 자신의 성공을 확인하려 하는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으나 정신적인 고독을 채우지 못한 중년 남성들이 모험적인 섹스에 집착함으로써 이 허전함을 잊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이 책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들의 섹스중독증은 ‘클린턴 신드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채울 수 없었던 아버지의 빈 자리  


그렇다면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클린턴 신드롬’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클린턴은 출생 직후부터 다섯 살 때까지 부모가 아닌 외조부모의 손에서 컸다. 아버지는 아예 없었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간호사가 되기 위해 아이를 떼어놓고 간호학교에 다녔다. 외조부모 역시 야채가게를 운영하느라 늘 바빴다. 다섯 살 때 생긴 양아버지는 폭력을 일삼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클린턴은 자서전 ‘빌 클린턴: 마이 라이프’에서 “나는 열 살 때까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라고 쓰고 있다.  


10대의 클린턴은 존 F 케네디와 마틴 루터 킹, 로버트 케네디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 정치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는 미국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꿈을 이룸으로써 자신의 롤 모델들 못지않게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인생의 롤 모델이라는 것이 과연 외형적인 성공만을 가르쳐주는 사람일까? 그에게는 함께 축구나 낚시를 하고 수학문제를 풀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줄 아버지가 없었다. 케네디나 킹 목사는 훌륭한 롤 모델이었지만, 그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함께 살을 맞대고 때로 어깨를 기댈 수 있는, 따스하고 든든한 아버지의 존재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클린턴은 대단한 독서가다. 특히 문학과 역사책을 좋아해서 조지타운 시절 강의 시간에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다가 들키기도 했다. 옥스퍼드와 예일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역사와 문학서적을 읽었고 신혼여행길에도 읽을 책을 여러 권 가져갔다. 명민한 남자 클린턴은 분명 자신의 문제를 알고 있었고, 책을 통해 그 문제에서 벗어나려 애썼던 것이다. 그러나 한 아이의 어린 시절에 드리워진 문제는 때로 그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고 결정적이다. 클린턴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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