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들의 성공 요인은 스필버그의 독특하고도 천재적인 상상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놀라운 상상력, 아이처럼 순수하고 기발한 상상력이 영화감독 스필버그를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다. 그와 함께 ‘죠스’를 촬영한 배우 리처드 드레이퍼스는 스필버그를 가리켜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열두 살의 덩치 큰 소년 같다”고 말했다. 스필버그는 가끔 자신이 ‘지구에 몰래 들어와 살게 된 착한 외계인’일 거라는 생각을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어찌 보면 스필버그는 네버랜드에서 돌아와 어른으로 성장한 피터팬일지도 모른다.  


그 자신의 성채에 ‘네버랜드’라는 이름을 붙이고 영원한 피터팬으로 살고자 했던 마이클 잭슨은 ‘E.T.’를 40번 이상 본 스필버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비록 마이클 잭슨은 불행하게 삶의 종지부를 찍고 말았지만, 또 다른 피터팬, 예순셋이 된 할아버지 피터팬 스필버그는 ‘꿈의 공장(드림웍스)’을 짓고 오늘도 부지런히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열세 살의 영화감독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3편을 보면, 도입부에 보이스카우트 대원인 어린 인디애나 존스가 나온다. 열세 살 정도로 보이는 이 소년은 스필버그의 영화 속에 가끔 등장하는 그의 분신이다. 어린 시절 스필버그는 보이스카우트 대원이었다. 그가 첫 번째 영화인 ‘라스트 건파이트’를 찍은 것 역시 보이스카우트 활동의 일환이었다. 대원들의 활동 중 하나로 사진촬영이 있었는데, 하필 그의 집에 있는 카메라가 망가졌던 것이다. 스필버그는 사진 대신 아버지의 무비카메라로 짧은 영화를 찍어왔고, 이 활동을 인정받아 우수대원 배지를 받았다. 열세 살이던 1959년의 일이다.  


학창 시절은 스필버그에게 그리 즐거운 기억을 남기진 못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여러 번 이사를 다녀야 했고, 학교 친구들은 큰 코에 고수머리 등 유대인의 신체적 특징이 뚜렷한 스필버그를 따돌렸다. 설상가상으로 책을 잘 읽지 못하는 난독증이 있어서 학교 성적도 엉망이었다. 고등학교 평균 성적은 C에 불과했다. 훗날 그 자신이 ‘지옥 같은 고교 생활’이라고 술회할 정도로 힘든 나날이었다. 그런 스필버그에게 영화촬영은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는 열여섯 살에 독립영화 ‘파이어라이트(Firelight)’를 촬영해 동네 영화관에서 상영했다. 이 영화로 그는 아버지에게 빌린 투자금액 400달러를 갚고도 100달러 정도의 수익을 남겼다고 한다.  


특수효과의 제왕  


영화는 현실에서 움츠려 있는 소년 스필버그가 자신의 상상력을 아낌없이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10대 감독 시절, 스필버그는 적은 예산으로 공상과학영화나 전쟁영화를 촬영하기 위한 나름의 특수효과들을 개발해냈다. 화약연기가 자욱한 전쟁 장면을 찍기 위해 모래구덩이 속에 밀가루를 넣어두고 배우들-스필버그의 가족이나 친구-이 구덩이를 밟아 밀가루가 날리게 하는 식이었다. 이때 이미 스필버그는 영화촬영에서 특수효과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있었고, 훗날 영화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단계부터 각 장면에 적절한 특수효과들을 고안하게끔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스필버그가 10대 시절 고안해낸 몇몇 특수효과가 나중에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전쟁영화인 ‘파이어라이트’의 전투 장면을 찍을 때 실제 차 대신 장난감 자동차와 기차를 사용한 방법은 훗날 ‘인디애나 존스 2: 사원의 저주’에서 그대로 등장한다. ‘인디애나 존스 2’에 등장하는 협궤열차의 추격신은 실물이 아니라 섬세하게 만든 미니어처 기차와 궤도, 그리고 주인공들을 닮은 인형들을 등장시켜 찍은 것이다.  


고교를 졸업한 스필버그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LA캠퍼스(UCLA)와 남캘리포니아대(USC)의 영화학과에 지망했지만 모두 낙방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에 입학한 그는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다 할리우드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숨어들어갔다. 그러고는 몇 달 동안이나 직원인 척하며 스튜디오 안을 어슬렁댔다. 심지어 비어 있는 사무실 하나를 찾아내 멋대로 자신의 이름을 걸어두기도 했다. 이런 엉뚱한 행동 끝에 스필버그는 일주일 내내 일하며 월급은 한 푼도 안 받는 인턴으로 채용되었다. 대학 진학은 자연히 흐지부지되었다. 입학한 지 35년이 지난 2002년에야 스필버그는 대학을 졸업한다. 그를 대학입시에서 떨어뜨렸던 USC는 1994년 그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  


1969년 유니버설 소속 감독으로 TV 시리즈 ‘나이트 갤러리’의 파일럿 프로그램을 찍으면서, 스필버그는 감독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몇 가지의 TV 영화와 감독 데뷔작인 SF영화 ‘슈가랜드 익스프레스’에서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둔 스필버그는 1975년, 자신의 출세작인 공포영화 ‘죠스’의 촬영에 들어간다. 피터 벤츨리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20만달러를 들여 제작한 상어 모형이 두 번이나 바닷속에 가라앉고 제작 기간과 예산이 두 배 이상 초과되는 악전고투 끝에 완성한 작품이었다. 스필버그는 ‘죠스’에 대해 “영화감독으로서 처음 겪은 혹독한 시련”이었다고 여러 번 회고했다.  

그러나 영화는 아카데미상 세 개 부문(편집, 음향, 음악)을 수상하며 수많은 ‘죠스마니아’를 낳았고 1975년 최고의 흥행작품으로 등극했다. ‘타임’지는 ‘죠스’에 대해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 이후 할리우드 영화의 역사를 바꾼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스필버그는 2005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죠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30년의 감독 생활에서 저는 늘 행운아였습니다. 그 행운을 가능하게 해준 작품이 ‘죠스’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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