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늦게 영주에서 강연을 마치고 인근에 있는 부석사를 들렀습니다.
그동안 방문하였던 산사 가운데서 으뜸 가는 곳을 한 군데 들자면
단연코 부석사라 할 것입니다.
영주 시내를 출발하여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세조에 의해 처형당하였던
금성대군과 그 일파들의 처형장소인 순흥을 지나서 부석사로 가는 길에는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은행잎들이 '정말 노랗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으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노란빛으로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참 아름답다'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멋진 길이었습니다.
이동하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살다가는 시간이란 것이 긴 영겁의 시간에 비하면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다. 꼭 손에 넣어야 할 것들도 있고, 꼭 이루어야 할 것들도
있지만 자주 자주 잠시 멈추어 서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다.
그리고 삶의 여행길에서 가능한 좋은 만남들로 가득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부석사의 무량수전 앞뜰에서 바라보는 일몰의 소백산맥들은 우리들의 삶이 가진
유한성을 늘 깨우쳐 주게 됩니다.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올망졸망 경쟁이라도 하듯이
앞서거니 뒷서기 펼쳐진 광경들을 가슴 가득히 채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천천히 가파른 아홉곳의 계단을 지나서 무량수전에 다가가는
길은 '우리 조상들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답게 산사를 지을 수 있었을까?'라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고전미라는 것은 언제 방문하더라도 늘 새롭게 새로움으로 느껴지는 그런 아름다움이라
생각합니다. 이 땅에 나서 살아가는데 가장 큰 은혜들 가운데 한 가지 중에는
반드시 한국의 가을 산사를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제의 행복한 시간을 떠올리면서 새벽에 글을 올립니다.

2009년 10월 23일(금)... 새벽 4시 50분... 진주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공병호


* 추신: 아래의 시는 안악루에 걸린 김삿갓(김병연)의 시입니다.
안악루에서 바라본 소백산의 절경을 그린 시입니다. 해설하시는 분의 도움으로
그동안 눈여겨 보지 않았던 김병연의 시를 만나게 되었네요.

김삿갓 -부석사(浮石寺)-
平生未暇踏名區(평생미가답명구)/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白首今登安養樓(백수금등안양루)/백발이 다 된 지금에야 安養樓에 올랐구나
江山似畵東南列(강산사화동남열)/그림 같은 강산은 東南으로 벌려있고
天地如萍日夜浮(천지여평일야부)/천지는 부평같이 밤낮으로 떠 있구나
風塵萬事悤悤馬(풍진만사총총마)/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宇宙一身泛泛鳧(우주일신범범부)/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百年幾得看勝景(백년기득간승경)/인간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경관 보겠는가
歲月無情老丈夫(세월무정노장부)/세월이 무정하여 나는 벌써 늙었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