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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슬램
l 2009-08-18 23:18
https://blog.aladin.co.kr/722340193/3039424
“이제 남을 위해서도 살고 싶어요”
2007년 5월22일 오후 12시 엄홍길, 변성호, 셰르파 한 명과 함께 로체샤르 정상능선에 올라선 모상현(牟相賢·34·컬럼비아스포츠웨어코리아 마케팅팀)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발이 무척 시렸다. C4를 구축하기 위해 C3에서 닷새간 텐트 플라이 하나로 비박하며 지내는 사이 발가락에 동상증세가 나타나 물집이 잡혔으나 베이스캠프에서 이틀 쉬면서 가라앉아 괜찮으려니 했으나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선배 두 사람에게 자신의 상황을 얘기하면서도 지금 이 자리에 서기까지 석 달이 걸렸다 생각하니 그냥 내려선다는 게 너무도 억울하다 싶었다. 이제 두세 시간이면 석 달간의 등반을 끝내고 그토록 염원해오던 로체샤르 8,400m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살려달란 소릴 듣고도 움직일 수 없었어요”
산소와 로프는 이미 다 떨어진 상황. 밑에 설치했던 40m 로프 두 동을 거두었다. 평탄하리라 싶었던 설릉은 20~30m 높이의 벽이 3개나 나타나 애를 먹였다. 그런데도 즐거웠다. 설악산 용아장성을 오르는 기분으로 정상에 올라섰다. 모상현과 변성호에게는 석 달간의 등반이었지만 엄홍길 대장은 2001년 이후 네 번 도전 끝에 이루어진 등정이었기에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뒤.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단 말이야.’ 모상현은 시계를 쳐다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칠흑같은 어둠이 밀려오고, 엄청난 추위와 강풍이 몰아쳤다. 변성호가 갑자기 앞이 안 보인다며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상에서 캠코더로 파노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잠시 고글을 벗은 게 설맹을 불러일으킨 것. 그런 상태로 안부까지 가는 동안 모두 지쳐갔다. 상현은 C4 도착 이튿날 엄홍길과 변성호가 쉬는 사이 셰르파와 둘이서 400m 로프를 까느라 힘을 쏟아부었던 터라 두 사람에 비해 더 빠른 속도로 체력이 고갈되어갔다.
“비박하자!”
8,000m 고봉 등반 중 여러 차례 비박을 경험한 엄홍길 대장이 안부에서 밤을 넘기고 내일 하산하자고 했으나 상현과 성호 두 대원은 자신도 없고, 하룻밤 지냈다가는 열 발가락 모두 잘라내는 상황이 생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불안감에 1분 1초라도 빨리 내려서고 싶었다. 너무 정신없이 등반하다보니 배낭 안에 물이 있는데도 마시지 못했고, 떨어진 지 이미 오래인 산소통도 그대로 멘 상태였다.
꽁꽁 얼어붙은 수통과 산소통을 벗어버리고 다시 하산길에 들어섰다. 자일 한 동으로 하강하거나 클라이밍다운하고 고정로프를 만나는 지점에 내려서자 안심이 되었지만 엄홍길과 변성호가 내려오지 않자 초조해졌다. 잠깐 기다리다 마지막 캠프로 향했다. 너무 힘들어 잠시 쉰다 생각하다 깜짝 놀라면 졸고 있었고, 정신이 돌아오면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걱정하다 혹시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공포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살아 내려가야 한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졸음이 쏟아지면 얼어붙은 장갑으로 뺨을 후려치고 머리를 설벽에 처박았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마지막 캠프가 내려다보였다. 살았다 싶었다. 22시간만에 돌아온 캠프였다. 지퍼를 열고 상체를 집어넣는 순간 그대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 눈보라와 깊은 눈을 헤치며 로체샤르 정상을 향하는 모상현씨.
“상현아~, 상현아~. 살려줘~.”
잠결에 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0여 년 동안 형 동생하며 지내온 변성호의 살려달라는 절규였다. 2003년 탈레이사가르뿐 아니라 국내의 여러 산에서 목숨을 걸고 등반한 사이건만 눈보라가 몰아치는 텐트 밖으로 나간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니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형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튿날이 돼도 변성호의 눈 상태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자 모상현은 그와 함께 C4에서 하루 더 쉬기로 했다. 그런데 지원차 올라온 셰르파와 함께 하산하던 엄홍길은 C4 바로 아래 로프가 끊어져 위에서 줄을 거두어 깔아야한다는 황당한 상황을 알려주었다. 변성호는 눈도 눈이지만 손과 발에 동상이 심해져 몸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처지였다. 때문에 상현은 위에서 회수한 자일을 캠프 아래쪽으로 늘어진 줄과 이었다. 그런데 그게 죽음의 나락으로 잇는 줄이 될 줄이야.
“저희 팀 C4가 80년대 초 체코팀의 캠프 자리였어요. 그래서 주변에 고정로프와 하켄이 눈에 띄었는데, 그 줄에 저희 줄을 묶었던 거예요. 하루 쉬고 난 뒤였는데도 정신이 없었나 봐요. 20년 넘도록 8,000m에 매달려 있던 줄에 이었으니 툭 하는 느낌을 받는 순간 40m쯤 떨어진 것 같아요. 수천m 아래 빙하로 내리꽂나 싶어 순간적으로 끔찍했는데 눈턱에 걸리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거죠.”
▲ 엄홍길 대장(오른쪽)과 함께 올라선 로체샤르 정상. / 로체샤르 등반 후 BC에서 헬기를 기다리며.
어린 시절부터 넉넉하지 못한 채 산을 다니다보니 장비를 소중히 생각했던 상현은 마지막 내려서기 전 캠프에 올려놓은 침낭 2개에 산소마스크 8개와 레귤레이터 2개 등 값이 나가는 장비는 몽땅 챙겨 배낭이 머리보다 높이 올라올 정도로 짊어지고 내려오던 터였다. 눈턱에서 어렵게 멈춰선 상태에서 배낭을 풀러 피켈만 손에 쥔 다음 몽땅 버렸다. 그리고 살얼음 걷듯 설벽을 한 발씩 내려서 고정로프 끝지점까지 내려섰다.
“얼마 뒤 성호형이 클라이밍 다운으로 내려왔는데, 눈물이 글썽하지 뭐예요. 너 그렇게 혼자 가버리면 난 어떻게 하란 말이냐면서요. 그 전날 새벽 제가 먼저 내려오면서 느꼈던, 수직고 3,000m 벽에 나 혼자만 있다는 불안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어렵게 베이스캠프로 내려섰는데, 힘이 너무 드니 도와달라는 무전을 받고 올라온 후배의 입에서는 술냄새가 풀풀 나고, 캠프의 대원들은 철수준비에 정신이 없지 뭐예요. 저희 두 사람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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