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서 본격적인 창작 수업을 받았지만 누구의 가르침만으로 다 훌륭한 소설가가 되는 건 아니다. 1984년 졸업 후 취직한 출판사에서 퇴근하자마자 집 앞 독서실에 자리를 얻어놓고 새벽까지 소설을 썼다. 나무 의자에 앉은 채 이희승 국어백과사전에 얼굴을 대고 잔 적이 한두 번 아니었다. 그렇게 쓴 소설이 <겨울우화>다. 독서실 생활을 꼬박 두 달 한 끝에 탄생한 작품 <겨울우화>를 문예중앙에 보냈다. ‘등단’이란 커다란 기쁨이 돌아왔다. 그게 1985년 그녀의 나이 스물 둘이었을 때였고,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 4. 소설 <리진>의 무대인 경북궁에서 소설 주인공으로 분장한 배우, 독자들과 거닐며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신경숙씨. 5. 베이징 한국문화원에서 2007년 9월 열린 한중문학좌담회에 참석한 소설가 신경숙, 박완서씨와 중국 여류 작가. 6. 2004년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기차로 횡단할 때 그랜드캐년에서.


초기엔 그녀만의 소설을 쓰고 싶었다. 어디 산길에 표지도 없고, 저자 이름도 없는 책이 한 권 떨어져 있어도 문체만 보면 ‘아, 이건 신경숙 소설이네’라고 할 정도의 작품을 쓰려고 했다. 실제로 <풍금이 있던 자리>와 <깊은 슬픔>이 자기문체 중심의 소설이다. 30대에 들어서는 역사와 사회를 내재화하고 싶은 욕망을 가졌다.

“1990년대엔 모든 사회 분위기가 공동체 중심이었잖아요. ‘공동체가 행복해야 개인도 행복하다’가 모토처럼 전면화되어 있을 때였어요. 난 반대로 생각했어요. ‘개인이 빛이 나야 공동체도 빛이 난다'. 그래서 역사와 사회 속에서 사장된 개인을 발굴해 내는 작업을 했어요. 그런 작품들이 <왼딴방>이나 <기차는 7시에 떠나네>가 대표적이라고 봐요. 지금 40대엔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리진>이나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서사가 소설의 중심에 놓여졌어요.

‘소설은 이야기다’라고 본다면 거꾸로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엄마를 부탁해>는 엄마에게 위로받자는 소설이 아니라 엄마를 위로하자는 쪽에 코드가 맞춰져 있는 소설이죠. 엄마 자체도 엄마가 필요할 정도로, 모성이라는 것은 엄마만이 아니라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나아가서 사회 자체가 모성성 덩어리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변화했다고 봐요.”

그녀는 그녀의 소설을 나름대로 시기별, 내용별로 구분했다. 정확히 자신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인간의 이야기고, 시대가 배경이다. 소설가는 기본적으로 시대에 관심이 있어야 하고 인간에 애정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에 애정을 가진 인간 신경숙의 앞으로의 방향, 즉 미래에 대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했다.

“미래의 시간이 어떻게 펼쳐질지 나도 궁금해요.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어요. 작가로서 바람이 있다면 오래전에 쓴 작품이 아니라 방금 쓴 작품으로 소통되는 현재진행형의 작가로 지내고 싶어요. 예전에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예쁘면서도 질투심 같은 게 있었는데, 이제는 그저 한없이 예쁘기만 하고, 그들이 꿈을 이뤄가며 잘 지냈으면 해요.

내가 하는 일이 그들에게 보탬이 됐으면 하는 마음도 가득해요. 나이가 먹었다는 증거겠죠. 그리곤 잘 늙으신 분들을 만나면 그분 곁으로 가까이 가서 가만히 바라보게 돼요. 아마 잘 늙고 싶기 때문이겠죠. 작가이니 새로 쓰는 작품들과 함께 잘 늙고 싶어요. 먼 훗날 누군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며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말이에요.”





▲ 평창동 미술관에서 북한산을 배경으로 선 소설가 신경숙씨.



‘잘 늙은’ 신경숙, 아마 모든 사람이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이미 혼자만의 신경숙이 아니기 때문이다. 잘 늙기 위해서는 즐겁고 평안해야 한다. 그녀는 요즘 즐겁다. 탈고한 소설이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키면 작가로서 더 할 나위 없이 성취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미안한 마음도 든다. 어려운 시기 혼자만 즐거운 게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다.

작품을 탈고했을 때의 순간은 산 정상에 올랐을 때와 비슷하다. 힘든 과정을 겪고 나면 성취감과 충만감도 준다. 이보다 더한 이상한 평화가 밀려든다. 정신적 안도감이다.
그녀에게 엄마는 정신적 안식처이다. 엄마는 곧 산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아니 모든 사람에게 그럴지 모르겠다. 산은 항상 새롭고 다시 태어난다. 산은 또한 모든 사연을 간직하고, 들어주고, 품어준다.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이 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지금 일고 있는 ‘모성신드롬’이 사회에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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