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노타우루스의 심장, 올빼미의 눈으로 신화가 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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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있는 여인’
피카소의 두 번째 여자는 ‘에바’라고 불렸던 마르셀이다. 성공에도, 페르낭드에게도 권태를 느끼던 서른한 살의 피카소는 에바를 만나 열렬하게 연애를 하며, 다시금 그림에 대한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피카소는 스페인 국적이라 징집 대상이 아니었으나, 친구들 대부분이 전장으로 끌려갔다. 설상가상 에바가 1915년에 결핵으로 세상을 떴다. 에바의 죽음은 숱하게 연애한 피카소가 유일하게 겪은 가슴 아픈 이별이었다. 피카소는 결국 에바와의 추억이 서려 있는 몽파르나스를 떠나 파리 근교로 이사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아픔은 오래가지 않았다(피카소가 에바의 투병생활을 그다지 괴로워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 피카소는 에바의 병세가 깊어지자 그녀를 곧 요양소로 보내버렸다). 1917년, 피카소는 장 콕토를 통해 디아길레프의 발레단 ‘발레 뤼스’(한때 니진스키가 활동했던 전설적인 러시아 발레단)의 새 작품 ‘퍼레이드’의 무대미술을 맡아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이 작업을 위해 이탈리아 로마로 간 피카소는 발레단원인 올가 코흘로바와 사랑에 빠진다. 발레 자체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지만, 피카소는 러시아 귀족다운 우아함과 세련미가 몸에 배어있는 올가에게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올가는 상류사회의 귀부인 생활을 원했고, 피카소는 그녀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보헤미안 생활을 청산하고 1918년 7월12일 파리의 러시아 정교회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 피카소는 올가에게 고전적인 필치의 초상화를 선물하기도 했다.
올가와 결혼한 후 피카소의 생활은 또 달라졌다. 그는 지팡이를 들고 모자를 썼으며 줄을 빳빳하게 세운 바지를 입었다. 올가는 새 아파트를 귀족 취향으로 호사스럽게 꾸몄다. 친구들의 놀람과 질시에도 이후 7년간 피카소는 완전한 상류 사회 일원으로 살았다. 1921년에 아들 파울로가 태어난 것도 피카소의 이 같은 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올가의 세련된 마나님이자 권위적인 안주인 스타일과 피카소의 예술혼은 궁극적으로 화합할 수 없었다. 피카소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등장한 초현실주의에 이끌리며, 다시 열일곱 살의 아름다운 처녀 마리 테레즈 발터를 만나 자유분방한 생활로 되돌아간다.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에게 비밀리에 집을 마련해주고,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그림을 그렸다.
‘울고 있는 여인’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유명한 화가인지 모를 정도로 순진한 처녀였다. 이 여자를 통해 피카소는 자신의 천재성을 되찾고 억눌러왔던 창작욕을 발산했다. 그는 사교계에 발을 끊고 초현실주의에 투신했으며, 100여 점에 달하는 판화 ‘볼라르 연작’과 테레즈를 모델로 한 조각들을 제작했다. 동시에 한쪽에는 부인 올가와 아들 파울로가, 다른 쪽에는 정부(情婦) 마리 테레즈와 딸 마이야가 있는 복잡한 생활을 했다. ‘피카소의 아내’라는 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던 올가는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다. 피카소는 거액을 들여 최고의 변호사들을 고용했지만, 어떤 변호사도 이혼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후에도 피카소의 곁에는 여자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사진작가 도라 마르, 젊은 여인 프랑수아즈 질로가 그의 곁에 있었으며, 1954년에는 일흔넷의 나이에 자클린 로크와 마지막 연애를 시작했다. 끝까지 그의 아내로 남았던 올가는 1955년 암으로 사망했다. 1961년, 여든이 넘은 피카소는 서른 살의 자클린 로크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자클린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왜 피카소는 한 여자에게 안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여자를 찾아다녔을까?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의 화려한 여성편력으로 치부해버리기엔 아쉬움이 남지 않은가? 피카소가 갈망했던 것은 아내와 함께하는 안락한 생활이 아닌, 아찔하도록 거칠고 위험한 연애, 그리고 예술혼을 자극하는 젊은 애인이었다. 올가는 헌신적이고 아름다운 아내였지만, 그녀가 아내로서 남편과 동등한 위치에서 애정을 주고받으려 하는 것을 피카소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여자와의 관계에서 철저히 이기적이었다. 한번 마음이 식으면 다시는 그 여자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피카소의 명성이 날로 높아가는 동안, 피카소에게 버림받은 여자들의 인생은 비슷비슷하게 파멸했다. 피카소를 만나기 전 촉망받는 사진작가였던 도라 마르는 피카소와 결별한 후 정신병자가 되었다. 1937년 도라를 모델로 그 유명한 ‘울고 있는 여인’을 그린 피카소는 자신 때문에 굴절된 도라의 삶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도라가 정신병원을 전전하는 동안, 피카소는 새로운 연인 프랑수아즈 질로와 함께 남프랑스의 별장에 머무르며 지중해의 풍광을 즐겼다. 마리 테레즈와 자클린은 각각 1977년과 1986년에 자살했다. 생전의 피카소를 엑상프로방스의 보브나르그성에 가두다시피 했던 두 번째 아내 자클린은, 피카소가 죽은 후 집의 모든 창에 검은 커튼을 치는 등 정상적인 삶을 이어가지 못했다.
나이 들수록 강해지는 창작력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는 “피카소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그는 늘 젊고, 그런 점에서 볼 때 천재적이었다”고 평한다. 피카소처럼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이름을 떨친 예술가가 죽을 때까지 그 천재성을 유지한 경우는 거의 없다. 대개 천재들은 어린 시절 반짝거리다 성년이 되면서 그 광휘를 잃어가든지, 아니면 막 중년이 되는 시점에 죽어버려 영원한 전설로 남는다. 그러나 피카소는 한 세기 가까운 삶을 누리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줄기차게 명예와 부를 유지했다.
언제나 빛바래지 않고 늘 새것처럼 작품들에서 반짝거린 천재성 덕분이었다. 그는 여든아홉 살이 될 때까지 새로운 작품으로 채워진 전시회를 열었으며, 해가 거듭될수록 그의 신작들에 대한 찬사는 늘어만 갔다. 아흔 살에도 그는 그림과 판화, 조각, 시(詩)와 희곡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막론하고 왕성하게 창작했다. 60년 동안 회사원이나 아버지로 사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60년 동안 천재로 산 사람이 피카소 외에 또 있을까!
그가 평생 젊은이로 살 수 있었던 것은 끊임없는 연애사건,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과의 관계 덕분이 아니었을까. 피카소의 작품을 연대기 순으로 보면, 여자와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작품 경향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새 애인을 만날 때마다 그의 창조성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브라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피카소에게 여자란 ‘광대가 불을 뿜기 위해 들이마시는 석유’나 다름없었다.
피카소가 긴 생애에서 천착했던 주제로 여자 외에 미노타우루스와 황소, 올빼미가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미노타우루스는 미노스 왕의 아들로 반인반수(半人半獸)는 괴물이라 미노스 왕궁 지하의 미궁에 갇혀 공물로 바쳐지는 젊은이들을 먹고 살았다. 어느 날 영웅 테세우스가 이 괴물을 해치우러 미궁에 들어온다. 그는 공주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실타래를 들고 와, 미노타우루스를 해치우고 실타래에서 풀린 실을 따라 미궁을 탈출한다.
피카소는 상반신은 사람이고 몸은 황소인 미노타우루스에게 본질적으로 끌렸다. 왕자인 동시에 야수, 사람인 동시에 황소인 이 괴물은 왕궁의 지하에 갇혀 살며 사람고기를 먹는다. 피카소는 미노타우루스의 처지에 이상한 동질감을 느꼈다. 미노타우루스의 모습은 그의 그림에서 때로 심각하게, 때로 희화적으로 변화하며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리고 만년으로 갈수록, 그림 속 미노타우루스는 피카소의 모습과 흡사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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