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은 황희에게 너만은 살아 고려의 정신을 전해야 한다고 그를 내보냈다. 불타는 두문동을 걸어 나와야만 했던 황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뒷날 사육신도 이러한 선비의 부끄러움을 아는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양이 비록 칼을 들어 자객 인물의 유형으로 분류되었지만, 열전에 기록된 행간의 의미를 보면 칼보다는 정신의 날이 더 날카로웠다.
때론 문장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베기도 한다. 무서운 문장이 있다. 잘 벼려진 칼날 같은 문장은 어쭙잖게 입술만 나불거리는 사람의 혀를 베어버리는 힘이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잡한 인간들은 진짜 칼을 무서워하지만, 부끄러움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러한 칼날을 더 무서워한다.
예양이 죽은 지 40년이 지나 제나라 땅에서는 섭정과 그 누이의 장렬한 죽음이 있었다. 섭정 또한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다는 인물 유형이다. 그는 효자다. 옛 나라의 근본 사상인 충효의 모습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섭정은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피해 어머니, 누이와 함께 제나라에서 개백정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최대한 신분을 낮추어 구설에 오르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 오빠에 그 누이
섭정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은 엄중자다. 엄중자는 한나라 애후를 섬겼는데, 애후는 한나라 재상 협루와 사이가 나빠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래서 협루를 제거할 인물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섭정을 만나게 된다.
엄중자는 섭정을 찾아가 선비의 예를 갖추어 사귀고 막대한 황금을 주면서 섭정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했다고 한다. 물론 그 황금은 거사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색은 감추었다. 효자 섭정은 기구한 사연으로 개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보고 과감한 투자를 하는 고위관리인 엄중자에게서 군자의 덕을 보았지만,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처지이므로 엄중자의 청을 거절했다. 그리고 섭정의 어머니가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자, 이번에는 자신이 엄중자를 찾아가 속마음을 물었다. 내 몸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가?
엄중자는 한나라의 재상인 협루라고 밝힌다. 하지만 그는 세도가로 경비가 삼엄하니 수레와 말, 장사들을 데리고 갈 것을 권한다. 하지만 섭정은 영민한 사람이었고, 엄중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객으로서 말했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가까이 있고, 지금 그 나라 재상을 죽이려 하는데, 그가 또 그 나라 왕의 친족이라면, 이러한 형세에서는 많은 사람을 써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많으면 생각을 달리하는 자가 생길 수 있고, 생각을 달리하는 자가 생기면 말이 새어나갈 것이며, 말이 새어나가면 한나라 전체가 당신을 원수로 여길 것이니 어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엄중자의 걱정을 뒤로하고 홀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단숨에 관청의 단청에 앉아 있는 협루를 찔렀다. 협루의 부하들이 섭정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수십명이 섭정의 칼날에 베어졌다. 그런 뒤 섭정은 자신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고 죽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한나라에서는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자객의 신분을 확인하려 하였다. 섭정의 시체는 시장통에 전시됐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섭정의 누나 섭영이 찾아와 울부짖었다.
이미 엄중자와의 만남을 알고 있던 그녀는 엄중자가 섭정을 알아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장통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어찌 이 위험한 인물을 안다고 하느냐고 염려하였다. 하지만 섭정의 누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소리로 자신이 살아 있기 때문에 동생은 신분을 감추기 위해 처참하게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동생이 선비로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섭정의 죽음을 애도하다 그 자리에서 자신도 목숨을 놓아버렸다. 한나라 주위에 있던 진나라, 초나라, 제나라, 위나라에서는 모두 섭정만 위대한 것이 아니라 그 누이도 장한 여인이라고 애도했다.
“장사가 한번 떠나면…”
이상 소개한 4인의 자객은 하나같이 대의를 위해 목숨을 버렸다. 그들은 살아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자객의 죽음은 때론 주군의 한을 풀어주기도 하고, 주군의 뜻을 이루기도 한다. 이들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 지금 시대에 이러한 방식으로 뜻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칼로써 자신을 뜻을 전하는 시대가 오지 않기를 당연히 바란다. 칼로써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말이 되고, 그 말이 행동이 되어 예의가 갖추어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싶어한다. 때론 어설픈 폭력이 속 시원하다는 이도 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이 단적으로 그러한 심정을 대변한다.
개인사에서도 그러하다.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그때 자객들을 생각하면 알량한 개인적인 원한을 가볍게 여길 수도 있다. 운전을 하다가 싸우는 사람들, 돈 거래를 하다가 주먹다짐을 하는 사람들, 일상사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원한은 옛 자객들의 처연한 행동에 견주면 티끌 같다. 거기에 목숨을 걸지 말아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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