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말 두 필은 더없이 소중한 친구다.

1.31평짜리 독방
정치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다. “정치는 교도소 담장을 넘나드는 거라더니, 정말 아찔한 순간이 있더라”고 한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굴레를 그는 여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듯했다.
“면회 온 사람들 보기 좋으라고 가까스로 화를 눌렀지, 왜 치밀어 오르는 게 없겠어요. 내가 무슨 죄를 졌나 싶기만 하고. 난 분명 정치후원금을 받았는데 저쪽에선 뇌물로 본 거잖아. 다 해석상의 차이야. 난 분명 기금 만들려고 영수증 써가면서 받은 돈인데, 그걸 갖고 5년형을 때리니 화가 안 나나. 그래도 2년만 살고 나온 걸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해준 게 아닌가 싶어.
교도소를 옮길 때마다 수감자들에게 앙케트 조사를 해요. ‘검사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 있나, 판사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든 적 있나’, 그런 걸 물어. 감옥에서 그 생각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교도관이 하도 사정사정하니까 다들 아니라고 체크하는 거지. 그래도 난 그 칸 보곤 그냥 비워뒀어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래도 짧지 않은 수감생활은 그에게 상당한 마음의 여유를 허락한 모양이다. 휴식이랄 수는 없는 시간이지만 책도 많이 읽었단다. 스타일 빼면 시체인 왕년의 대배우는 교도소 안에서도 운동에 힘을 쏟았다고. 그래서 50대 초반 정도로밖에 안 보였다고 자랑을 이어나간다.
“주먹들도 나한테 와서는 ‘존경합니다 형님’ 그럽디다. 난 뭐 오는 사람은 항시 거부하지 않으니까. 성격이 워낙 긍정적이라 어딜 가나 최고로 적응 잘해요. 독방은 내가 자처해서 간 거였거든, 교도소장이 필요한 게 뭐냐고 묻기에 ‘여자’라고 답해줬지. 껄껄 웃으면서 그건 안 된대.
암만 그래도 1.31평짜리 독방에 혼자 앉아 있으면 당연히 고생스럽지. 그 추운데서 자면 뼛속까지 시렵더라고요. 그래도 마음 다스릴 수 있었던 건 아침마다 ‘반야심경’을 읽은 덕이지 싶어요. 그러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화도 누그러지고. 그렇게 편하게 마음먹으니 사람들이 ‘죄수복을 입어도 멋지다’고 하더라고.”
“나, 한나라당에서는 진보였어요”
돌이켜보면, 그의 기억 속에서 정치와의 첫 인연은 1970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평소 영화계와 친분이 두터웠던 김상현 전 의원이 DJ와 함께 신성일 엄앵란 부부를 찾아와 정치를 하자고 설득했다. 전성기가 끝나가던 영화시장에서 탈출할 방법을 꿈꾸던 그는 선뜻 응했지만, 아내는 생각이 달랐다. 아내는 친분있는 군 고위인사에게 부탁해 그를 겁주게 했다.
“정치 하면 공군에 있던 형님, 사업하는 형님, 다 다칠 수 있다는 거요. 가족들한테 해가 갈 수 있다는데 덜컥 겁이 났지. 그때 정치 했으면 아마도 얼마 못 가 감옥에 갔을 거예요. 10월 유신이 그 직후였으니까. 김상현 전 의원이 ‘그럼 기자회견 때 화환이나 보내달라’고 청하기에 보내줬더니, DJ가 미국 워싱턴을 돌며 모금활동 하러 갔을 때 엽서를 보냈습디다, ‘신 동지 화환 고마웠소.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오’ 라고요.”
수십 년 시간이 지나 국회의원이 된 것은, 앞서도 얘기했지만 ‘문화계 인사’ 자격으로서였다. 그런데 막상 정치를 해보니 국회의원은 간단한 자리가 아니었다. 항상 손님이 들끓었고, 전화가 끊이지 않고, 현장에 내려가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바빴다. 그렇게 전혀 다른 환경에서 헉헉대며 4년을 보낸 뒤, 그는 2004년 선거에서 공천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이 ‘한나라당은 노인당’이라고 한다고 해서 60세 이상은 공천에서 배제한다는 가이드라인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내가 그때 67세였거든. 물리적인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그 무렵 강재섭 대표는 나만 보면 피해다녔어요.
나는 한나라당에서는 진보적인 편이었어요. 철저하게 보수적인 사람들만 모인 한국예총 같은 데는 그전부터도 행사에 잘 안 나갔어요. 예총이 뭐예요, 예전 공화당 시절에 정치 행사장에 사람들 동원할 필요가 있을 때나 모이던 사람들 아니요? 그래서 민예총이 만들어진 거고.나도 예총이 더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난 대구 국회의원으로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운영기금 조성법’ 만들고 그랬어요. 당시 대구는 부채만 3조였거든. 그때 그법안 안 만들었으면 대회 못 치렀어. 그만하면 잘한 거 아니요?”
뒤늦은 이야기지만,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열국지와 삼국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전기를 읽었다. 그리고 정치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과정에서 희생됐는지, 위에서 던진 돌 하나에 얼마나 많은 이가 다치는지도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지역구를 관리하는 것과 공천을 유지하는 것은 별개라는 한국 정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했고, 찍을 사람이 없으면 무효표를 찍어야 할 텐데 정당만 보고 무조건 도장을 내미는 현실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 모든 생각이 부질없다 느껴졌다. 그렇게 그는 멀고 먼 길을 돌았다. “정순이는 의당 내게로 돌아와야지. 내가 그리워한 만큼 정순이도 나를 그리워했던 거야”를 되뇌던 ‘삼일천하’ 주인공처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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