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방에서 벗어나지 못한 패션 감각은 한여름에도 긴소매 옷을 입고 다니고(우리 대학시절에는 한여름에 긴 외투나 두꺼운 군용 야전점퍼를 입고 다니는 것이 문예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사회성이 없어 학생들 간의 농담을 ‘쌩까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학생이었다. 예쁘장한 여자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농담을 못 받아들이는 모습을 그려보니 웃음이 나기도 한다.
지금 내 앞에 앉은 세련된 패션 감각의 조경란과 그 시절의 조경란은 다른 여자인 것이다. 우리 몸의 세포는 태어나고 죽는다. 과학적으로 인간의 몸은 10년을 주기로 다른 몸이다. 하물며 정신이야 오죽하겠는가. 고여 있지만 않다면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를 수 있다. 정신의 세포는 오로지 내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기에, 그것은 또한 보이지 않기에 바꾸기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그녀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이미 고인이 된 오규원 시인을 비롯해, 김혜순 시인, 남진우 시인, 평론가 류보선, 박혜경 등이 강의를 했다. 이렇게 그녀는 청춘의 고치에서 벗어났다. 20대 초반의 5년, 그리고 고교시절 3년 자신을 방에 가뒀던 그녀는 날개를 달았다. 시를 향해 비상하는 검은 날개의 제비나비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시 쓰기에 몰두하던 어느 날, 서울예전 교지 편집실에서 그녀의 운명을 바꾸는 천둥 같은 한마디를 듣는다. 스승인 김혜순 시인이 한마디를 툭 던진다. 고요한 연못에 떨어지는 빗방울이다.
“경란아. 너, 시는 안 되겠다.”
연못 위에 떨어진 물방울이 그 고요함을 흔들어 모든 것이 흔들리듯, 그녀는 스승의 한마디를 ‘온전히’ 알아들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시의 족쇄를 풀어버린다.
“시는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죠. 각별한 재능이 있어야 절창이 나온다고 봐요. 타고난 것이 있어야 되지만, 소설은 다르죠. 소설은 인내와 용기만 있으면 쓸 수 있어요.”
이 말은 그녀가 소설가라는 말이다. 시인은 반대로 소설가가 타고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화가나 작곡가에게도 적용된다. 재능이 쏠리는 곳이 있다. 조경란은 소설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녀는 시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시가 그녀를 놓아주었다고 생각했다. 가난한 시가 예쁜 경란을 놓아주었다. 나보다 더 좋은 소설을 만나라고. 젊은 날 새벽녘에 시를 만나 지독한 사랑을 하고 나서인지, 소설을 만나서는 습작을 그리 많이 하지 않고 등단한다. 그 다음해 쓴 ‘불란서 안경원’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선, 대학 2학년 때 덜컥 소설가가 되었다.

시가 그녀를 놓아주다
이탈리아나 칠레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와인 병을 따고 시음을 하고 커다란 와인 잔에 붓고 그것을 흔들어 잠자는 풍미를 일깨우듯, 지금 우리의 와인 잔에 탐스럽게 고여 있는 잘 숙성된 와인 같은 그녀의 이력을 살펴본다.
단편으로 등단한 그해에 제1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다.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문학적인 행로다. 당선작은 ‘식빵 굽는 시간’이다. 이 시기에 지난해 출간한 소설 ‘혀’를 구상한다. 그때 ‘혀’를 쓰지 못한 이유는 당시 음식을 소재로 한 영화가 판을 치던 형국이라 부화뇌동하기 싫어서였다.
그렇게 10여 년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에 창작집 ‘불란서 안경원’ ‘나의 자줏빛 소파’ ‘국자 이야기’ 등의 소설집과 중편소설 ‘움직임’, 산문집 ‘조경란의 악어 이야기’ 같은 책을 내고 독자와 교감했다.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올해 그녀의 문학상 수상 이력이 하나 더 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요즘은 단편집 ‘풍선을 샀어’ 원고를 매만지고 있다. 이 책은 5월쯤 독자를 찾아갈 예정이다.
단편집 ‘국자 이야기’를 2004년 겨울에 출판하고 나서 다시 암울한 시기가 찾아왔다. 잦은 여행 때문이었다. 2004년부터 외국에 나갈 일이 많이 생겼다. 그간 암울했던 시기를 벗어나 날개를 달았으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파김치가 됐다고 한다.
“몸이 책상을 떠나 있으니까 마음이 골목 밖을 나가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보니 집에 돌아와서도 마치 호텔방에서 자는 것처럼 문을 걸어 잠그기까지 했지요. 그래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힘들어지더군요.”
작가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인간이다. 책상을 깨물고라도 앉아 있어야 된다는 카프카의 말처럼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았지만, 앉아도 잘 되지 않았다.
“전 몸 에너지가 약한 편인데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 그걸 다 써버린 느낌이에요. 점점 나이가 든다는 이야기인데, 그게 좋아요. 그건 20대의 힘듦이 빠져나간다는 소리잖아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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