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진 찍는 건 이적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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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평 남짓한 공간에 빽빽이 들어찬 책들은 그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원천이 됐다.
그날 이후 카메라를 놓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날마다 자갈치 시장바닥이나 판자촌을 돌아다녔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내년이면 사진 찍기 시작한 지 50년, 그는 카메라를 통해 서민의 주장을 널리 알렸고 사회 모순을 고발했고 인간의 존엄을 증언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정면에서 찍는다는 건 일종의 도전이었다. 대담성과 용기가 없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내도 필요하고 민첩성도 필요하고 요령도 필요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사진 찍다 멱살을 잡혀 파출소까지 끌려가거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듣는 건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노숙자나 노동자의 사진을 찍다 몸싸움으로 옷이나 살이 찢기는 일도 흔했고 카메라가 박살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무엇보다 다 찍은 필름을 뺏길 때가 제일 아깝지요. 고발당해 법정에 선 것만도 서너 차례 될 걸요. 공모전에 당선돼 사진이 신문에 나면 사진 찍힌 이의 가족이라는 사람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와요. 허가 없이 찍었다는 이유로 보상을 요구하는 거지요.”
간첩이라고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 출동한 건 이루 셀 수도 없다. 얼추 잡아도 일년에 여남은 번씩은 된다. 한번 잡혀가면 짧으면 한 시간, 길면 이틀씩 경찰서에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우리나라 사람의 반공의식이 얼마나 철저한지 놀랄 지경이죠. 간첩 하나 잡으면 3000만원인가를 준다고 하니 일단 신고부터 해놓고 보는 거죠.”
그의 ‘휴먼’ 1집이 처음 나온 건 1967년이다. 이듬해 울릉도에서 간첩단이 잡혔는데 그들의 소지품 중에 최민식의 사진집이 섞여 있었다. 밑바닥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찍은 사진들이었다.
“수류탄, 자살용 앰플, 난수표와 함께 내 사진집이 턱 나오는 겁니다. 만일 그 책 안에 내가 한 사인이라도 있었더라면… 영락없이 간첩으로 몰렸을 거예요. 무섭던 시절이니 당장 처형당했을지도 모르고. 허허.”
군사정부 시절 내내 그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가난하고 삶에 찌든 사람들에게만 렌즈를 들이대는 그를 정권이 미워했다. 등 뒤를 따라다니는 전담형사가 있었다.
“발전하는 조국의 모습을 자랑해야 할 텐데 어쩌자고 보여주기 싫은 밑바닥 사람들의 모습만 자꾸 찍어대냐는 거지. 자고 있으면 밤중에 경찰이 들이닥쳐요. 권총 차고 두 놈이 오지. 이런 사진을 찍어대는 건 결국 이적행위 아니냐는 거였어요. 1970년 군사독재에 항의하는 부산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하면서부터는 더욱 노골적으로 박해했고….”
그의 사진 인생 50년 중 35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쫓기고 가난했고 천대받았다. 1967년 영국의 대표적 사진연감에 그의 사진이 실리면서 ‘스타 사진작가’로 선정되고 ‘카메라의 렘브란트’란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대접은 달라진 게 없었다. 일본, 독일, 미국의 사진 잡지에 그의 작품이 수백점 실렸지만 한국에선 사진에 그나마 관심을 가졌던 동아일보사에서 첫 사진집 ‘휴먼’ 1권을 출판해줬을 뿐이다. 사진을 찍을 자유는 있었지만 발표할 자유는 없었다. 시상식이 있어도 여권이 안 나오니 참석할 수 없었다. 서양 신부님의 호의로 분도출판사에서 ‘휴먼’이 잇달아 출판됐지만 판매금지로 묶여버렸다.
그러다 환갑을 넘긴 이후에야 비로소 살 만해졌다. 한 예술가의 인생이 환갑이 될 때까지 가난과 억압으로 묶여 있어야 했다니! 이젠 정권의 압제도 없어졌고 간첩이란 의심도 ‘해당사항’이 없어졌으며 책도 여러 권 나와 알아주는 사람도 제법 생겼다. 원고료나 강의 수입도 들어오기 시작했고, 상도 여러 개 받았다. 그는 천진하게도 그동안 받은 상금을 손가락을 꼽아가며 나열한다. 그리 큰 액수 같지도 않건만 그에게는 생애 최초로 사진을 통해 벌어들인 목돈이었던 모양이다.
“2000년도 부산방송 문화대상을 받았어요. 상금이 1000만원이었어요. 지난해에는 부산 시립미술관이 내 사진 50점을 영구보존한다면서 1200만원을 주데요. 올해에는 동강 사진전에서 또 1000만원을 받고…. 요즘도 집사람에게 한 달에 100만원씩은 준다고요. 상금으로는 아프리카에 가려고 해요. 돈이 뒷받침이 되어야 사진의 앵글 각도가 넓고 깊이가 생기는 건데…. 현장에 가서 1년 내내 살아야 해요.
10여 년 전부터는 나도 한국을 벗어나 인도 네팔 티베트 이집트에 사진 찍으러 다녀요. 그렇지만 잠깐 만에 후딱 찍고 돌아오니 뭐가 돼야지. 브라질 인도 중국까지 다니며 노동자만 찍어대는 살가도나 집시만 찍는 쿠델카의 사진을 보면 입이 딱딱 벌어진다니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