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훈장과 일본 밀항

그러다 전쟁이 났다. 이 시절의 고단함은 듣는 것만으로도 진저리쳐진다. 불과 50년 전 일인데 도무지 실감할 수 없는 비현실이다. 먹고 살 길이 마땅찮아 차라리 군대에 지원하기로 했다.
“지원하는 바람에 수송부대인 병참단에 배치됐어. 보병에 갔으면 나는 전쟁 중에 죽었을지도 몰라요. 훈련이 끝나자마자 원산까지 밀고 올라갔지. 나중에는 우리 부대가 함흥, 청진까지 갔다고! 미 10사단 소속이었어. 군수물자를 기차로 지원하는 일을 맡았어. 중공군이 투입되면서 후퇴했는데, 후퇴하면서 함흥의 만세교를 폭파하라는 명을 받았어요. 나는 중사였어. 졸병 5명과 함께 그 다리에 폭탄을 설치해놨다가 다리에 인민군이 가득할 때 버튼을 눌렀지. 끔찍했지.”
그 참전 공로로 최 선생은 무공훈장을 받는다. 나중 지리산 빨치산 토벌로 다시 훈장 하나를 추가해 그는 6·25전쟁 중 두 개의 무훈을 세우는 전쟁 공로자가 됐다.
나는 바로 이 연재 기사에서 지리산에 숨어 살던 빨치산 할머니를 만난 적도 있고 중국 인민해방군의 자격으로 인해전술에 참가했던 분도 인터뷰했다. 다 선량하고 정의감 넘치는 이들이었다. 자연과 인간과 예술을 특별히 사랑하던 그들, 유난히 미감이 발달하고 감격하기 잘하던 그이들이 서로 총을 겨눈 채 죽고 죽였다는 걸 자랑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전쟁이었다.
전쟁 중 그가 속한 부대는 전남 순천까지 후퇴한다. 전시였지만 성당에는 빠지지 않고 나갔다. 성가대 가운데 선 예쁘장한 아가씨 하나를 눈여겨본다. 청년의 가슴에 연정이 타올랐다. 미행해 집을 알아뒀다가 나중에 찾아가서 정식으로 청혼한다.
“우리 장인은 고향이 의주인데 한때 우리 동네(연안)에 피난 와서 살았더라고요. 알고 보니 집안끼리 서로 아는 사이야. 그 바람에 혼인이 빨리 성사됐지요. 나는 스물다섯이고 우리 집사람은 열여덟인데 그때만 해도 그게 노처녀였어요. 계급이 상사니까 적기는 해도 월급은 몇 푼 나왔지….”
그러나 휴전과 동시에 제대를 선택한다. 손위 처남이 부산에 살고 있어 그 곁으로 살림을 옮긴다. 아이 둘이 태어나고 네 식구의 가장이 됐지만, 전쟁판에서 숱한 죽음을 겪었지만 그의 뇌리엔 여태도 생생하게 ‘훌륭한 화가’란 말이 맴돌고 있었다.
마침내 1955년 그는 일본행 배를 탄다. 밀항이었다. 형편이 괜찮던 처남에게 얼마간의 돈을 융통했다. 고맙게도 아내와 아이 둘도 처남이 맡아줬다.
“이맘때였어요. 가을밤이었지. 16명이 부산 영도 해변에서 자그만 어선에 올라탔어. 사흘 만에 일본 규슈에 닿았어요. 다행히 나는 일본말에 익숙해서 검문 때마다 위기를 넘겼어요. 도쿄에 무사히 도착한 후 알아봤더니 같이 간 사람들 중 둘만 빼고 열넷은 잡혀서 오무라 수용소에 갇혔다가 본국으로 강제송환됐더라고요.”
스타이켄과의 조우
도쿄에 도착하니 수중엔 20일 정도 지낼 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직장을 구하다가 어느 식당에 취직했다. 그 집 주인 딸이 마침 중앙미술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당장 중앙미술학원 야간부에 입학했다. 그토록 오매불망하던 그림공부였다. 희열 그 자체였다. 돈이 필요해 낮에는 미술학원 학생들과 어울려 고물 수집을 하러 다녔다.
“당시 일본은 넝마주이 벌이가 괜찮았어요. 학비와 용돈이 나오고 책 살 돈도 나오고 그렇게나 갖고 싶던 중고 카메라도 한 대 샀다니까요.”
헌책방을 도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 헌책방에서 그는 인생을 바꿀 책 한 권을 발견한다. 미국 사진작가 스타이켄이 편집한 ‘인간가족’이란 사진집,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다 죽는 인간사의 반복을 영상언어로 보여주는 책이었다.
“카메라의 성서, 인류라고 하는 드라마, 신비를 수놓은 서사시였어요. 신을 향한 인간의 고백이었고 관객과 사진작가가 손을 맞잡고 올리는 기도였어요.”
치열하게 일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다름 아닌 자신의 모습이 그 흑백사진집 속에 담겨 있었다. 놀라웠다. 사진이 이렇게 울림이 큰 것이라면, 그림보다 사진을 하고 싶었다. 새로 산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림 대신 사진이론과 촬영 연구에 몰두했다. 삶의 진실과 인간 본연의 적나라한 모습을 사진 속에 담는 일에 미칠 듯이 빠져들었다. 힘든 일을 해도 지치지 않았다.
마침내 2년제 미술학교를 졸업했다. 그제야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공부의 목적을 발견했고 방법도 알았으니 돌아가도 좋았다. 1957년 그는 중고 카메라 석 대와 부속품, 수십 권의 사진집을 사들고 다시 밀항해 부산으로 돌아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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