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가 최고다”
-‘전국 노래자랑’을 보면 대체로 전통가요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제작방향에 따른 겁니까. 아니면 출연자나 관객들과 호흡을 맞춰서 그런 제작 멘탈(mental)을 유지하는 것인지요.
“트로트는 우리 것이지요. 전국 노래자랑은 가장 한국적인 프로그램입니다. 나이가 젊거나 늙었거나 트로트에 다들 젖어 있어요. 요즘 젊은 세대들은 랩이다 뭐다 해서 흥얼거리지만 세 곡만 부르고 나면 질리기 시작해요. 다시 트로트로 돌아오고 말아요. 트로트는 누구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국민가요 하면 트로트를 연상하게끔 돼 있어요. 누구나 쉽게 부르고 또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으니까요. 트로트를 음악 중에서도 뒤처진 것으로 폄하하는 경우를 더러 보는데 음악에 천한 것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음악이란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있을 수가 없는 거지요.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 괜히 서구음악에 젖어서 세련된 것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트로트는 왜풍이고 낡았다고 하는데 우리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음악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입상자 중에서 생각나는 사람이나 성공한 사람을 소개해주시죠.
“인기상 장려상 우수상 최우수상을 주고, 월 최우수상, 상반기 최우수상 하반기 최우수상, 연말 최우수상, 이런 식으로 입상자를 선발합니다. 입상자 중에는 장미화가 있어요. 아마 장미화가 노래자랑 출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또 가수 오은정 오세근도 있습니다. 이중 오세근은 인간승리감이었죠. 부천에서 출연을 했는데 가수가 되기 전에 아내가 도망을 가고 비참한 밑바닥 인생을 살았어요. 그런데 전국노래자랑에서 입상한 뒤부터 사정이 좋아졌습니다. ‘그 사람이 보고 싶다’의 현진우, 개그활동으로 전업한 조영구도 알고보면 노래자랑 출신이죠. 김미성도 있는데 ‘울렁증’이 있어서 코미디로 전업을 시켰죠”
-노래자랑의 심사기준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물론 심사기준은 엄격합니다. 그리고 나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내 심사 기준도 있다는 겁니다.”
그는 노래의 가창력 음정 박자 등을 따지는 것은 기본이지만 재미가 있어야 하고 특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되풀이 강조한다.
-‘전국 노래자랑’을 통해서도 우리의 가요사를 읽을 수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트로트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현미 김지애 등의 노래가 많이 불렸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이른바 숨가쁜 신세대 노래가 나오는데 나 역시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신세대들도 이런 노래를 세 곡 이상 부르지 못해요. 결국 트로트로 돌아와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그들 역시 가장 편한 트로트로 돌아오고 말죠.”
시청자들은 때때로 송해씨가 악단원의 색소폰을 빌려 멋드러지게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해 ‘전국 노래자랑’ 특집 프로에서도 그는 색소폰으로 ‘오 대니보이’를 완벽하게 연주, 언제 저런 실력을 길렀나 하고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나 그는 음악학교에서 정식으로 기악을 전공한 음악학도다.
송해씨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8·15 해방 이후 해주 음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도립악단에 취업했고, 얼마 뒤에는 국립극단 단원으로 발탁된다. 4개 이동 예술대에 편입돼 북한 전역을 돌며 순회공연을 했다. 이때 무대를 진행하는 방식을 배운 셈이다. 이 경험이 큰 자산이 되어 오늘날까지 무대에 서는 동력이 된 것이다.
그는 이남으로 피란오면서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그리고 3년8개월 동안 군예대에 편성돼 전후방 사병을 위한 위문공연을 다녔다. 사회를 보고 노래도 하고 악기도 다루면서 자신의 끼를 맘껏 펼친 것이다.
군에서 제대한 이후 창공악극단에 입단한다. 주로 지방공연을 다니는 극단이었는데 여기서도 역시 사회자와 가수, 악단원으로 활약했다. 방송 입문은 1960년대 초 동아방송에 출연하면서부터. 라디오의 전성시대였던 1960년대, 그는 동아방송의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인 ‘스무고개’와 ‘재치문답’에 출연, 동료 박시명씨와 콤비를 이뤄 코미디를 한 꼭지씩 했다.
“스무고개에는 저명한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 등이 나왔어요. 이분들의 재치와 지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는데 우리는 막간을 이용해 코미디 한 꼭지를 했죠.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동아방송 교통프로인 ‘나는 모범운전사’를 17년 동안 진행했습니다.”
이 프로를 진행하면서 방송의 위력을 새삼 느낀 때가 있다. ‘나는 모범운전사’ 시그널 뮤직을 불루벨스가 불렀는데 방송이 나간 이틀 후 무교동 낙지집에 갔더니 젊은 손님들이 술을 마시며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파의 위력밖에는 생각이 안납디다. 라디오가 국민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던 때의 일입니다만, 그래서 우리도 자부심이 대단했죠.”
텔레비전으로 넘어간 것은 1960년대 후반.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면서 동시에 KBS TV의 광일쇼에 나가면서다. 당시에는 일동제약의 ‘일동 스포츠’ 광일제약 제공의 ‘광일쇼’ 등 광고를 내는 회사의 이름을 따서 프로그램 이름으로 붙였는데 그는 광일쇼에서 콩트를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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