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동안 12만쪽 그려




‘식객’을 그리고 있는 허영만 화백.

그는 초등학교 때 교사이던 누나가 들고 온 ‘학원’ 잡지에서 인생의 진로를 바꾸어놓은 만화와 첫 대면을 했다. 김용환(1912∼98)의 ‘코주부 삼국지’였다. 전쟁 직후 일본 만화를 번역한 것이 대부분일 때 김용환의 코주부는 거의 유일한 순수 국산 만화였다. 지난달 세종문화회관 광화문갤러리에서 코주부 김용환전(展)이 열렸다. 만화와 첫 인연을 맺어준 사부인지라 허 화백은 이 전시에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
초등학생 때 가방에 늘 만화책을 넣어 다니고 이웃 만화방의 단골손님이 됐다. 학교에서는 쓱쓱 만화를 그려서 급우들한테 회람을 시켰다. 그림을 잘 그려 교실 환경미화를 도맡았다.
“아버지의 멸치어장이 망하는 바람에 미대 진학을 포기했어요. 김홍조 옹은 멸치어장으로 돈 벌어 김영삼 대통령을 만들었다지만 우리 아버지는 어장이 망해 저를 만화가로 만들었죠. 4년 정도 흉어가 들어 망했어요. 아랫녘에 이런 말이 있어요. ‘바다 사업하고 여자 밑에는 배가 일곱 척 들어가도 돛대 끝이 안 보인다’는 거죠. 육지에서 공장이 망하면 땅이라도 남지만 바다에서 망하면 흔적도 없어요.”
배가 가라앉아도 돛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바다가 깊은 것은 알겠는데 여자가 그렇게 깊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마 주색에 빠지면 재산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뜻일 터다.
“고등학교부터 광주에서 유학할 준비를 하고 있다가 포기하고 여수고에 들어갔죠. 8남매 중 셋째였거든요. 대학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더라고요. 미대 입시 공부하던 친구들하고 같이 지냈어요. 그 친구들이 입시 공부할 때 저는 만화만 그렸어요.”
여수고를 졸업하자마자 어머니가 챙겨준 3만원을 들고 상경했다. 행당동 박문윤 화백 화실에서 1년간 공부하고 이향원 화백 문하로 옮겨 실력을 인정받았다. 1974년 한국일보 신인만화 공모전에 ‘집을 찾아서’가 당선돼 데뷔했다. 당시 대학 나와 대기업에 다니던 친구보다 월급을 세 배나 더 받았다.
허 화백은 30여 년 만화인생에서 만화를 몇 권이나 그렸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살기 위해 부지런히 그려야 했거든요. 하도 오래돼서 뭘 그렸는지도 가물가물해요. 옛날에는 원고를 돌려주지 않았어요. 책으로 남아 있는 만화도 친구들이 놀러왔다가 집어가버리는 바람에 없어진 것이 많아요. 제가 크게 아픈 적 없고 쉰 적이 없으니 30년 동안 한 12만쪽은 그렸을 것 같아요. 책으로 몇 권 분량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요. 만화책은 60쪽짜리도 있고, 200쪽을 넘는 경우도 있으니까.”
만화는 대부분 대본소에서 빌려주는 형태로 보급된다. 1970∼80년대에는 컴퓨터 게임이 없었을 때라 대본소가 잘 됐다. 전국에 대본소가 5000∼6000개 있었다. 한 대본소에서 같은 만화를 2∼3권씩 사갔다.
“과거에는 경기가 나쁘면 오히려 만화방이 잘됐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경기가 나쁘면 집에 앉아 컴퓨터 자판이나 두드리고 움직이려고 하질 않아요. 인터넷에서 공짜로 보는데 익숙해 인터넷 만화는 크게 돈벌이가 되지 않아요.”
재밌는 진단이다. 컴퓨터 때문에 불경기가 심해진다는 경제학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하긴 만화만 힘든 게 아니라 종이매체가 다 힘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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