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영역
금연 찻집인 ‘귀천’에서 잠시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왔다. 선생은 찻집 주인과 환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나 하늘로 돌아가고 싶다’는 천상병 선생의 귀천을 마음으로 읽으니, 귀동냥으로 들은 천상병 선생의 일화들이 낮게 날아오는 잠자리 날개처럼 떠오른다. 그 쓸쓸한 이야기들이 퇴락하는 가을날의 햇살 속으로 스며든다. 거리에 놓인 돌확에 고인 물방울들, 천상병 선생의 눈물이었을까 싶다. 빨리 담배를 피우고 들어갔다.
선생이 시인으로서 영향을 받은 스승이 궁금하다.
“내 시의 스승들은 내가 살고 있는 동시대의 시인들이에요.”
그래도 윤동주, 만해, 서정주와 같은 별들을 이야기한다. 이름만으로도 시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 사람들과 밥을 같이 먹었던 행복한 사람들. 그 다음엔 역시 김수영, 신동엽과 같은 시인들이다. 그리고 고독하게 선생의 정신에 자리하고 있는 시인이 김현승 선생이다.
“김현승 선생의 시를 열심히 읽었어요. 우리 시에서 고독의 영역을 넓히셨지요. 선생의 시가 좋아서 선생에게 개인적으로 시를 보내기도 했지요. 누군가에게 개인적으로 시를 보낸 건 선생이 처음이에요. 군종사병으로 있으면서 타자기로 정성스럽게 정리해서 보낸 거죠. 선생이 답장을 보내셨는데 ‘휴가 나오면 한번 들르라’고 했지요.”
김현승 선생은 당시 숭실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선생의 답장을 받고 나서 선생의 연구실을 들렀다고 했다. 그를 환하게 반겨줬다. 별 말씀은 없었지만 책 속에 파묻혀 있는 존경하는 시인의 모습만으로도 많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기독교적이고,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있는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김현승 시인의 이 말씀.
“고독의 영역은 신도 인간도 아닌 제3의 영역이다.”
이것이 아직까지 정호승 시인의 화두다. 이 가을날 고독한 시인의 고독에 대한 잠언은 우리 모두가 한번쯤 품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외로움은 상대적이지만, 고독은 절대적이지요.”
그리고 선생은 당신의 시가 윤동주나 김현승의 시처럼 명징하길 바란다고 했다.
“한때 저는 시가 사랑이라고 한 적도 있고, 명예라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게 아닌 거 같아요. 시가 뭐라고 이야기하기는 힘든 일이겠지만, 제 생각에 고통 없이는 시가 없을 겁니다. 그 고통이 시로 나타날 때 내 시가 명징해지지 않을까요? 중학교 은사님 말대로 열심히 살면 드러나는 충실한 삶의 ‘거시기’가 시가 아닐까 합니다.”

아련한 첫 키스의 추억
선생은 문득 어린 시절을 추억하면서 첫 키스 이야기를 했다. 어린 시절 먼 친척 누나에게 느낀 연정이었다. 친척 누나 역시 자신을 좋아한다고 느꼈다. 자신이 질겅질겅 씹어 먹던 오징어 다리를 쟁반에 올려놓았는데 누나가 그걸 거리낌 없이 집어 먹는 모습을 보고 ‘아, 누나도 나를 좋아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더러운 것을 더럽지 않게 여기는 것. 그것이 키스이고 사랑이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창가 쪽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데 누나가 창밖에서 자신을 불렀다.
“호승아, 뭐 하노?”
소년 정호승은 창문으로 누나의 예쁜 얼굴을 보았다. 소년이 대답했다.
“응, 공부한다.”
그러자 누나가 그 창문에 입술을 대었고, 소년 정호승도 그 창문에 입술을 댔다. 그게 시인의 첫 키스다. 창문이라는 투명한 마음을 매개로 한 이 키스는 육순이 되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라고 한다. 부끄러운 듯 웃으면서 “그 누나 상당히 미인이었어” 하는데, 소년보다 더 순수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 누나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처럼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아,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영원성을 지닐까.
“사랑은 근본적으로 모성의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조건적인 그 무엇 말입니다. 사람들이 사랑 때문에 고통 받는다고 느끼는 건, 조건이 많아서 그런 겁니다. 조건이 없는 상태, 어미가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는 심경. 그런 게 사랑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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