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사주세요”


“그때 어려운 집안 사정에도 부모님이 매달 5000원을 보내주셨는데, 2500원이 방값이었어요. 유부국수가 30원 했는데, 방값 내고 남은 돈으로 매일 유부국수 세 그릇 사 먹으면 바닥나게 돼 있었죠. 한창때라 밥을 많이 먹고 싶은 나머지 전농동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한 밥집에서 한 달 2500원을 내고 밥을 먹으면서 학교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그 무렵 교정에서 어떤 여학생이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땡전 한 푼 없는 고학생 정호승. 하지만 문예장학생이라선지 그의 남루한 옷차림도 여학생의 눈에는 낭만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여학생을 선생은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차비가 없어 집까지 걸어갈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떡하긴 어떡해, 그냥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갔지.”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었다. 필자는 40대 중반, 선생은 50대 후반(12년 차이의 소띠 띠동갑이다). ‘우리 기쁜 젊은 날’엔 그렇게 못 들은 척하면서 지나간 일들이 많았다. 선생이 대학을 계속 다니려면 신춘문예에 당선하는 길밖에 없어 학교 도서관에서 신춘문예 준비를 고시 공부하듯 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해 조선일보에 응모했는데 최종심 4편에만 이름이 오르고 낙방했다. 2학년을 다닐 수 없게 된 것이다.
“휴학을 하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당시 동대문 전차 종점 자리가 헐리고 호텔이 들어섰는데 그 호텔 사우나에서 카운터를 봤습니다. 6촌 아저씨의 배려였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계산이 매일 틀리는 거야. 늘 조금씩 모자라 아저씨가 ‘호승아, 니는 이런 것도 못하나’ 하면서 눈치도 주고,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그렇다고 나를 생각해주신 아저씨 처지를 생각하면 무작정 그만둘 수 없고 해서 부모님께 편지를 썼지. 여기에 있기 힘드니까 그냥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 한 장 보내달라고 말이야. 그래서 서울을 떠날 수 있었어요. 1969년이었지요.”
정호승 선생은 전보를 받자 그 길로 경주 외할머니 댁으로 갔다. 토함산 기슭에 보덕암이라는 초가 암자가 있었다. 객실과 부처님을 모셔놓은 작은 방이 있는 초막이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그곳에서 시를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했지만 또 낙방이었다. 이제는 다른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이 훗날 ‘첨성대’라는 시를 쓴 뿌리가 되었을 것이다. 정호승은 군에 자원입대했다.
군에서도 어떻게 시를 써야 하나 궁리하다, 군 막사 밖에 있는 군 교회 군종들의 생활이 좀 여유가 있어 보여 군종사병이 되었다. 군 교회의 시멘트 바닥에 해진 매트리스를 깔고 전우들이 잠자리에 들며 전 부대가 소등을 하면 그 교회에서는 별이 떠올랐다. 군종사병 정호승은 올빼미처럼 일어나 시를 썼다. 그때 별빛이 아니라면 무엇을 보고 시를 썼을까. 그에게 시는, 그리고 신춘문예 등단은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학교를 다니느냐 못 다니느냐의 갈림길이었다.

특별한 크리스마스 선물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72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대한일보 문화부’ 발신 소인이 찍힌 노란 전보용지 한 장이 군종사병 정호승 병장의 손에 쥐어졌다. 응모한 시 ‘첨성대’가 당선된 것이다.
“당선을 축하한다는 노란 전보용지, 지금도 아마 서재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정말 그때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노란 전보용지는 시인에게 기다림이란 무엇이고,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면 응답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성경책 한 쪽과 같았으리라. 그래서인지 선생의 e메일 주소는 ‘첨성대’다. 그의 첨성대는 눈물로 쌓아올린 화강암이었다.

할머니 눈물로 첨성대가 되었다.
일평생 꺼내보던 손거울 깨뜨리고
소나기 오듯 흘리신 할머니 눈물로
밤이면 나는 홀로 첨성대가 되었다.
-시 ‘첨성대’의 첫 연

선생은 이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도 당선됐다. 상금 7만원. 이 돈으로 어머니께 틀니를 해드렸다고 한다. 그리고 춘천 우두동에 있는 군대 교회에 성막을 만들어 기증했다. 그 성막의 맨 아래에는 ‘병장 정호승 증’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남루한 이야기이지만, 가난이 저를 만들었습니다. 어머니가 파출부를 나가기 위해 당신 이름 대신 직업소개소에서 부여받은 번호로 자신을 소개하며 전화를 거는 모습. 그야말로 ‘숟가락 몽둥이’ 하나 없이 가난하게 살던 일. 그때 저는 나는 절대 가난하게 살지 않겠다, 가족 부양은 하겠다는 결심을 했지요. 그리고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게 살았어요, 허허.”
시는 돈과 절대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선생은 직장을 선택한다. 첫 직업은 숭실고등학교 국어교사. 하지만 3년 정도 아이들을 가르쳐보니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나를 위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임을 하고 ‘주부생활’ ‘여성동아’ ‘월간조선’ 등의 잡지사 기자 생활을 한다. 선생의 주옥같은 시집들은 모두 이 시기에 출간된 것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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