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10년전에 취업하던 때가 생각이난다...
그땐, 대학만 나오면 기본적으로 자기본분도 모른채 대기업이나 이름들어본 회사아니면 상대도 안하던 정말 세상모르던 때였다.
동기중에 9급공무원 시험을쳐서 졸업전 일찌감치 취업한친구를 보면서 그땐 정말 그친구가 아깝다는 생각을했었는데...
썩어도 준치라고, 이름난 회사들만 시험치러다녔으나
서류전형에서 주루루.....
그시절엔 관심회사에 가서 서류를 받아서 자필로 회사양식에 맞춰 이력서작성및 증명사진을붙여서 내던때여서
취업철엔 친구랑 날잡고 서울시내를 몇바퀴씩 몇날며칠돌았었다....
그러다 간간히 면접보러 오라는 곳들도 만만하게 보고가서 면접때 한마디도 못하고 미끄러졌던.....
내가 생각해도 그순간들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도대체 아무생각없이 면접을 보러다니고 정말 아무생각없이 대답하고...
그러다가, 일년반동안 자의반 타의반 취업재수를했다.
지금처럼 직장이없어서라기보다는, 이름나고 좋은곳이란데를 들어가기위해....세상물정을 정말 몰랐다..
일년간은 여유를 부리며,,(여유있는 상황이아니었지만)
그때 처음 사귀게된 오빠의 지지를 받으며 도서관에서 능률오르지 않는 토익,상식공부를 한다며
결국 가을무렵 다시 취업철을 마지하며 그전해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이력서 쓰기 신공과 면접연습까지 준비했지만
몇군데 은행권과 통신업체시험에서 면접에서 낙방하는 분루를 삼켜야했다.
은행면접 최종에서떨어진 날이 지금도기억난다...
사귀던 오빠가 어떻게됬냐고 묻기에, 합격연락이안온다고....-_-
오빠가 집앞에 나오라고해서 갔더니 지금까지 안오면....-_-;; 하지만 괜챦아... 너에게 더좋은기회가 열릴꺼야.
근데, 이거 어쩌지...사실 너주려고 준비했었는데...품에서 "훌륭한 은행원이 되는 비결"이란 책을 꺼내다가
다시 뒷춤으로 치워버렸다... ㅠ ㅠ 그모습에 감격이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해서
그날 세시간동안 오빠품에안겨서 눈이 안떠질때까지 엉엉울었던 생각이난다...
그러면서 겨울을 맞이했고,,, 그해 겨울 아이엠에프라는 초유의 국가경제 비상사태를 맞이했다...
아이엠에프와 맞물려
몇년간 형편이 좋지않아 병원한번 안가던 어머니는 자궁제거 수술을 하러 입원하셨는데
5시간이 넘도록 수술실에서 나오지 못하시고 담임박사님은 아버지와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나팔관암 3기말입니다. 아마 3개월정도라고 생각하십시오......
순간 눈앞이 전기가 나간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않고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 한번도 좋은것 좋은옷 좋은곳에 가보지 못하시고 평생 고생만 하신엄마가 암선고...그것도 삼개월....
아버지도 나도 아무말도 못하고 그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버지의 연이은 실패와 부채로 어머니를 치료할 돈조차 없는데
그날....집에가서 엄마옷가지와 쓰시던 물건들을 보면서
혼절할때까지 통곡을하고 하늘을 원망하고 이렇게 엄마를 보내야만 하는 내처지가 한탄스러웠다.
엄마처럼 평생 가난하고 궁색하게 살지않겠다고 악을쓰며 대학을 갔던내가 엄마가 이제 우리곁을떠날지도 모르는데
아무것도 해줄수없는 내가 된것이...
엄마가 조금만 기다려줘서 내가 돈벌어서 엄마 제주도라도 한번만 보내드릴수 있을때까지 살아계셔달라고
하나님께 처음으로 서원기도를했다......
그날부터 난 내 자존심을 잊어버리기로했다...
엄마를 살릴수만 있다면 그럴수있는 돈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하기로했다...
취업도 힘들었지만, 가만있지 않기로했다.
수술후 거동을 못하시고 그후로 아무도 생각지도 못하게 8년을 살아주신 엄마를 병원이며 집이며 왔다갔다하면서
살림하고 직장생활하면서 이렇게 악바리가 되었다.....
백화점 세일기간이 되면, 면도기와 전동칫솔을 수입하는 회사에 전속 소속이 되어 미친듯이 물건을 팔았고
열성을 인정받아서 나중엔 아르바이트를 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로 승진했고
취업하기전까지 세일때마다 불려다니며 일을했다.
아침 아홉시에 출근해서 밤 여덟시까지 한번도 못앉고 다리가 부었지만 일을 할수있다는데 감사했다.
그당시 하루에 4만원의 일당이었으니 나에겐 정말 큰돈이었다....
세일이끝나고 일이없을땐, 안산역에있는 일용직센터를 찾아가서 아무일이나 좋으니 일하게 해달라고하고
공장으로 다니며 전자기기에 기름을 닦거나 조립하고 포장하는 일등을 했다.
라인에서는 중국에서 온사람들과 아주머니들이 대학졸업생이라는 나를 신기한듯관심을 가져주셨고
그분들의 따듯한 온정을 느낄수있었다.
그리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아무곳이라도 나를 써주시면 미친듯이 일하겠노라 구직을 하러 다녔다.
집앞 국밥집에 새벽에 서빙하는 아르바이트를 구한다고해서 자정부터 새벽 다섯시까지 일을 도왔지만
지금말하자면 취업사기었던지 사장은 돈없다면서 노동한 댓가를 주지 않기도 했다...
아이엠에프로 꽁꽁묶인 취업시장은 올해의 졸업생도 받아주지 못하면서 취업재수생까지 흡수할순없었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어머니의 첫 수술비및 화학치료비를 치룰수있었지만
니가 꼭 일해서 스스로 어머니치료해야 하고 나중에 수입이 생기면 꼭 갚아야 한다는 말슴에
반드시 그 은혜 잊지않겠노라고 다짐했는데
사회는 아무 경험도 없고 이력도 없는 여자 대졸재수생을 받아주는곳이 없었다...
그러다, 기회는 우연챦게 한꺼번에 몰려왔다.
취업이 도통 되지 않아서 지금생각하면 구청이었던것 같은데 취업을 원한다는 취업의례서를 작성해서 제출하고
잊고있었는데 , 마포에있는 한 무역회사에서 부름이있었다.
사장님도 무척 좋으셨고 일도 많이 배울수있는곳 같았다...
그러다가, 친구가 우연히 발견했다며 안산에있는 미국계 부품회사인데 집도가까우니 어머니 병간호도 하면서
다닐수있을것 같다고 도전해 보라고했다....
무역회사는 거의 확정상태였고 사장님과 연봉을 협상하던 상태였고
그래도 집에서 가까운곳이라면 엄마와 멀리 떨어지지 않을수있으니 안산에있는 회사에도 도전했다...
지금생각하면, 그땐 가깝단 이유하나로 그바닥에 발을 디뎠지만
미국계 회사에 발을 디딘것이 지금으로선 나에게 좋은 출발이 되었다.
그회사에 지원하기위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데
어디서 끌어올랐는지 미친듯이 신들린듯 자기소개서가 술술써졌다....
사람이 너무나 절실하면 없던 초능력도 나타나는지.... 지금생각하면 그당시 어떻게 그런 자기소개가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얼마나 이일이절실하며 얼마나 내게 일자리가 필요한지
난 추상적으로 이일이 나의 자아발전에 기여한다는 생각까진 할여유가 없다
하지만, 내가아니면 어머니를 살릴길이 없으니 아픈엄마를 배수의 진이라 생각하고
더이상 뒤로 갈곳이 없단 각오로 미친듯이 일하겠다
아무리 험하고 힘든일이라도 맡겨주시면 자존심 다 버리고 열심히 일하겠다.
나를 채용해주신다면 결초보은의 심정으로 모든일이든 하겠다.
이미 난 공장에서도 일해보았고 여자라고 해서 힘들고 지저분한일 못한단 생각은 버렸다.
대학을 나와서 공장단지에서 일하는게 문제라고 생각해본적도 없다.
꼭 나에게 기회를 주시라고.... 야심찬 부하직원이 여기서 회신을 기다리겠노라고.....
나중에 알고보니 아이엠에프 덕분에 사장님이 대학졸업자도 한번 싼맛(?)에 써보잔 생각도 있으셨고
회사를 확장하면서 여성인력이 필요했다고 하셨다.
경쟁률은 420대 4였으니 백대일을 넘는 경쟁이었던것 같다.
인사부장님이 연락오셔서 면접을보러오라고했다.
여의도에 있는 서울사무소에서 면접이 진행되었는데
사장님은 처음부터 나를 경계하시면서 압박 질문을 던지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인사부장님께서 나와같은 사람을
채용해야 한다 하셧고 사장님은 이렇게 돈이 절실한 사람이 들어오면 노조결성하고 평화를 깰수있겠다고 경계하셨다고 한다.
사장님은, 집이 몇평이냐 아버지가 왜 젊은나이에 놀고계시냐 당신이 왜 소녀가장처럼 일해야 하냐
그럼 놀고있으면 친구만날때 밥은 누가사냐? 매일 얻어먹고다니면 아주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거냐
당신은 우리회사 들어오면 사람들 선동해서 노조결성할것 아니냐? 등등등.....
적대적으로 압박하는 면접이 한시간 동안 치뤄졌다.
같이 참석하셧던 본부장님이나 이사님들은 사장님의 심한 질문과 냉소에 미안했떤지 내눈치를 오히려 보고계셨고
난 심하게 구겨지는 자존심앞에 눈물이 앞을가렸지만 이를 악물고 주먹으로 허벅지를 누르면서
그앞에서 울지않았다.
전 젊기에 아무일이라도 닥치는대로 할수있지만 아버지는 연세도 있으시고 차마 놀고계시지만 아무일이나 하시기 어려울것이라
생각됩니다. 아버지가 용돈도 못주는 처지이시지만 그때문에 부모님을 원망해 본적이없습니다.
어려운가운데서도 저를 이제까지 포기하지 않고 키워주셨고 전 부모님들도 누리지 못한 교육혜택까지 받았으니 감사할뿐입니다.
사장님은 친구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어려울때 밥한끼 기꺼이 사줄수있는 친구가 없다면 세상을 헛살았다고 해야 하지않을까요?
제주변엔 제가 언제까지 백수로 있더라도 기쁘게 맞아줄 친구가 많습니다. 저또한 제가 형편이 좋아져 친구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마찬가지로 모른척 하지 않을것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람을 선동하고 더많은것을 취하기위해 룰을 깨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사장님의 편견이십니다.
한참의 정적이 흐른후 사장님은 마지막으로 할말이 없냐 하셨고
난 눈물이 나오려는걸 억지로 참으며 잠기는 목소리를 열어 담대하게 말씀드렸다.
"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면접실을 돌아나오는데, 면접수고했다고 경리가 2만원의 차비를 손에 쥐어주었다.
난 그돈을 쥐고 여의도 공원에 앉아서 두시간정도 혼자 서럽게 울었다...
내 형편과 내처지가 한탄스러워서 ..... 내가 이렇게 나를 구겨가면서도 일자리가 필요하단 절실함에 북받쳐서....
그날 친한 친구를 만나서 이렇게 힘들었던 면접이야기를 하고 , 만나던오빠를 만나서 또 펑펑울었다....
그런곳에선 오라고그래도 안간다고 ㅋㅋㅋ
그후 마포에 있는 무역회사를 가기로했고 이미 결정했는데 압박면접을 햇던 곳 인사부장님이 전화오셨다.
면접에 합격하셨는데 안산에 있는 본사로 언제 교육받으러 나오십시오.
죄송하지만, 전 가기로 한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면접을보면서 사장님의 인품과 사상을 엿보고
그회사에 가지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쉽지만 포기하겟습니다.
그때 나를 잡아주신게 인사부장님이셨다. 본인또한 대기업에서 노동위원장을 하시다가 해고당하시고 오랜 어려움끝에
취업을 하셨기에 나의 어려움을 가장 잘 이해하시고, 사장님께 마치 자기일처럼 나를 어필해드리고 결국 사장님의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셨다고 한다.
사장님이 인성테스트삼아서 심하게 한것이니 이해를 하고 꼭 다시 오라고., 나를 봐서라도 꼭 다시 오라고...
결국 우여곡절끝에 다시 그 나를 구박하던 회사로 다시 들어갔고
입사동기는 최고명문여대및 미국유학출신자 언니, 미국학교 졸업자, 명문여대출신의 빼어난 미모의 동생...그리고 보잘것없던 나..
이렇게 네명이었다.
파이널 리스트를 보면 알겠찌만 사장님의 엘리트추구정신은 정말 타의추종을 불허하셔서
최고의 학력과 최고의 집안환경을 보고 합격자를 결정하셧다고 한다... 난 그야말로.....이악물고 덤빈 승부근성 하나...-_-
그후로도 사장님은 최종합격자들앞에서 연설을하시면서도 굳이 나만꼭 찝어서 앞으로 데모하지말라고 하질않으시나
나만 차별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으셨따.
나중에 옆에 언니가,아니 학교다닐때 데모주동자였나요? 사장님이 왜저러세요? -_-
그후로, 사장님은 세사람은 편안하고 나름대로 하이클래스스러운 일을 시키시고
난정말 막말로 뺑이친다는 부서로 보내주셨다.
학교다니며 배운거라곤 책을 파는일밖에 없었는데, 여기저기 드르륵드르륵 서류 전표 돌아가는소리와
급하면 공장에 뛰어가서 같이 아줌마들하고 라인돌리고 포장하고 손톱이 부러저라 노동을 해야만하는
하루 삼분의 이는 노가다에 가까운일을 하는 전투부대로 배치가되었다.
일복은 이때부터 타고나서, 입사하자마자 7년경력 전임자가 나입사한 3일만에 주산끼가 있어서 애를 낳으러 가버리고...-_-
인수인계받은것도 없는 나는 바로 현업에 뛰어들어 서류 보는것 수주처리하는것 고객전화상대하기 납품하기
공장가서 체크하기 여기저기부서알아보기 주간월별 레포트 만들기 등등
아침 일곱시 출근하면 밤 열두시나 되야 집에들어가고, 남들 다 쉴때 혼자 불도 안들어오는 공장사무실에 앉아서 두손 호호불어가며
주말내내 그 밀린일 마치느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출근을하면서
3년 반을 보내야했다....
일이 너무나 고된회사였기에 여직원 평균 근속이 1년을 넘지못했고 내밑으로 뽑아서 가르쳐 놓으면 몇달안가서 그만두기 일수였고
결국 회사서 어렵고 까다롭고 힘든일은 다 나를 시켰다.
사장님은, 나를 안뽑았으면 어쩔뻔했냐고 정말 아찔했따고 겉으로만 말씀하시면서, 여전히 인센티브등등은 같이 입사한
후광이 비추는 여사원들에게 더많이 준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일이 너무 힘들고 모시던 부장님은 정말 싸이코고 힘들고 지쳐서 매일매일 울고
집에가면 엄마한테 엄마때문에 일도 못그만둔다고 원망하며 소리지르고
만나던 오빠에겐 업무상의 이야기로 스트레스를 주다가....결국엔 내가 먼져 헤어지자고 그러고...
그만두기 일보직전엔 해외업무를 보던 분이 그만뒀는데 그일마저 나더러 하래서 화딱지가 났다가
이 해외업무를 조금 해본것이 경력이 되어서
나중에 미국반도체회사로 경력이 인정되어 이직을할수있게되었다. 연봉이 두배가까이 뛰면서....
일이 너무 힘들어서 원형탈모가 생기고 성질 더러워지고
아무튼 참 힘든 시작이었다.....
그래도 회사를 그만두겠따고 하니, 사장님이 집으로 두세번씩 전화해서 만류하시고 일시키지 말라고그러고
사장님실에 불러놓고 며칠동안 잡으시려 하고
직급도 올려주고 월급도 올려주고 인센티브도 더주겠다고 하셨지만
이미 사장님께서 앞에서나를 위하시면서 뒤로는 후광비치는 사원들에게 실질적으로 더 챙겨주신것을 알기에
앞에서 티는 내지않았찌만, 너무 감사하지만 저의 더 큰발전을 위해 이직결정했습니다. 놓아주세요.
언젠가 제가 다시 업무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해서 다시 사장님과 일할수있는 기회를 꼭 기다리겟습니다.
그때까지 많이 배워올테니 저를 이쯤 놓아주십시오.
사람이, 나올때 아쉬운사람이 될수있단것...그만둘때 많은사람들이 고생한 보람있네 어딜가나 잘살꺼야 라며
등두드려주시고 웃는낯으로 다시보자고 아쉬워하던모습들을 생각하면
그래도 내가 그고생했찌만 헛살지 않았딴 생각이들었다....
두번째 회사에 면접을 갈때도
항상없을땐 없고 있을땐 몰린다고, 힘들게 회사다니면서 이직을 알아보았찌만 이미 이십대 후반이 가까와서
옮기기가 쉽지가 않았는데 영어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그러다가
일본계 유명기업에 합격하여 최종협상을 하러가야 하던날 우연치않게 발견한 사이트에서 이력서를 제출했더니
연락이와서 하루 월차를 내서 두군데를 다 면접보러가게되었다.
사람이 오라는데가 많으면 또 베짱이 생긴다고
이 미국계 반도체회사에 오전일찍 당도하니 사장님이 미팅중이라 약속한것보다 한시간이나늦게 부르셨다.
이번 사장님은 또 아주 특이한 개성의 소유자로서 나중에 알고보니 톡톡튀는사람을 좋아하셧따고 한다.
난 이미 붙을데 붙었고, 여기도 되면 교통좋으니깐 좋지만 잘 모르겠다 생각하고있는데
사장님이 뭔가를 자꾸 물어보시고 길게 끌어주신다....
사진은 왜케 여시토깽이같은걸 붙이셨나? 부터해서....술은 얼마나 잘마셔? 여느 면접과또다른 종류의 테스트였다...-_-
사실 면접이력서 사진이,, 꽃밭에서 턱괴고 앉아서 찍은 만나던오빠가 이쁘게 찍어준사진이었는데
알고보니 사장님이 괴짜시라서, 사진보고 바로 뽑으라고 했다고 한다...ㅋㅋㅋㅋ
저 죄송하지만, 다른곳에 면접이 또있는데 약속시간이 다가오니
사장님 빨리 결정해주십시오. 저를 채용하실건지 안하실건지.....-_-;;
어이없는 사장님은 니 지금 뭐라했나? 하시면서 갑자기 오기에 불이 붙으셨다.
야...거기가 더좋아 여기가 더좋아?
제생각엔 둘다 좋지만, 교통으로따지면 여기가 더 좋은것 같습니다.
뭐? 교통만 좋아? 야 거기서 얼마준데냐?
얼마얼마 주기로했는데 최종협상 남았습니다.
오냐.. 내가 거기다 삼백 더 붙여준다 . 그럼 여기 다니는거다?
-_-? 네? 아...네...!
정말 운좋게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면접이었지만 사장님과 내 코드가 맞아서 일사천리로 그냥 그자리에서 연봉협상이랑
입사날짜까지 잡고 나와버렸다....-_-
이 괴짜사장님과 얽힌 이야기는 그후로 책 세권분량의 에피소드가있지만 여기서 이야기하자면 나는 아마
며칠날밤을 새야 할것이다...
아무튼 이 두번째 회사에서 난 정말 개성으로 똘똘뭉친 직원들과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듯한
사이키 악동기질의 카사노바 사장님을 삼년간 모시며
정말 많이 웃고 많이 울고 또 많이 감동받으며 많은 배려속에
엄마 간병하라고 병가도 내주시고, 후원금 걷어다 주시고, 엄마 돌아가시고나서까지 특별배려를 해주셨다....
변사장님 싸랑해요~~~~
그리고 이곳에서 타고난 일복을 자랑하듯 정말 많은 일거리를 영어로 하면서
영어능력이 일취월장되면서 또 한번 이직의 기회를 가질수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엄마돌아가신해에 결혼하려생각햇던 사람과 종교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헤어지고말았다.
두달텀으로 일어난 이 힘든상황에 어디론가 또 챌린지를 찾아 떠나곳싶었고
지금의 회사로 이직할수있었다....
첨에 어딘지도몰랐는데 알고보니 이바닥에선 유명한 회사...-_-
삼차의 영어면접을 통해서 합격되었고( 합격의이유는 언어적 능력이 제일 중요시 되었다고 한다..그러니 영어공부들 하시길..)
회사가 막 확장일로에 있어서 셋업시기라
배울것도 많고 부닥치며 내가 세워야 할일도 많고 아주 회사를 하나 차리는 단계를 배우는거나 마찬가지였다.
겁없이 미국에 건너가서 프로그램과 하는일 전반에대한 교육을 짧게 받고돌아와서
모르면 여기저기 해외전화 돌려서 물어보고 옆나라 슈퍼유저들한테 부탁하고 물어보고 하면서
또다시 정말 일은 힘들어죽겠지만, 업무능력이 일취월장해서
지금은 어디다 갔다놔도 살아남을수 있을것만 같아졌다.....
회사에서 중요한 사람이 되는건 , 어려운일일지라도 기꺼이 맡아서 실패하면서 배워가면서 끝장을 보는 경험을
계속해서 쌓아가는 일.......
일이 많아져서 밑에 한명을 더 채용했었는데 일주일만에 힘들다고 도망가버렸다....
입사한지이제 이년을 넘어섰는데 이년동안 한번도 맘편하게 일이 마무리된적이 없다....
늘 긴장의 연속이다.....
지금은 무척 일이 고되다...
새벽 네다섯시까지 일해야 할때도있고 주말에도 공휴일에도 늘 전화오면 로긴해야 하고 새벽까지 기다려서 국제전화해야 할때도많고
다국적의 인간들의 정서와 문화적 차이를 이해해가면서 일해야하고
사람사이에 부딪히는 일들도 많다......
하지만.....
십년전 그때 국밥나르며, 다리가 부어가며 아르바이트하며, 공장에서 기름칠을 하면서
어디서 밥한술이라도 주면 경험이라도 조금만 쌓게해주면 배수의진을 치고 결초보은하겠다던
처음 시작의 자세를 잊지 않는다.....
이렇게 어려운시기에
힘들어도 내가 아침마다 가야 할곳이있고 내가 없으면 안되는 환경이 있다는것
매일매일 사표쓰고싶다가도 마음을 다잡고
이렇게 일할수있는 곳이 있다는것에 오늘 하루도 감사하며 내일을 기다린다......
내가 평생 또 어떤일들을 할수있을지 모르겠찌만
험하고 힘들어보이는 일 , 사실 바로 그일을 할수있는 사람이기에 내가 어떤일도 할수있는것이리라.......
정말 그땐 피하고 싶고 힘들어서 죽을것만 같아도 극복하고 지나가면
나에게 엄청난 발전을 가져다 주는 기회였다는걸 알게되는 깨달음....
그리고, 열심히 악착같이 일하고 모아서
반드시 힘있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한다......
뜻있는곳에 힘을줄수있는 그런 선한부자가 되고말것이라고~~~
이렇게 나는 오늘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