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여정을 간다는 것은 한걸음, 한걸음  그 한걸음이 모여서  이루는 마라톤과  같은 것이다.

 

 

 

 

후배가 코치로 있는 복싱체육관을 입관한 것은 작년 11월경이었다.

복싱체육관을 선택한 것은 나만의 몇가지의 생각에 독특한  발상이었다.

새벽에 시간을 이용하여 아르바이트를 한 업체를 하였었고 정상적으로 낮동안은  나의 일을 하고 있었지만 저녁이면  먼 미래를 위하여 나만의 준비를 나름데로 충실히 하고 싶었다. 

체육관에서  런닝머신을 많이 달려 보았었다.

건강을 위하여 뛸 수도 있고 체력을 기르려 뛸 수도 있다.

런닝머신 숫자에는 몇키로를 뛰고 있다고 숫자 상으로는 나오고 있다.  하지만 뛰는 순간은 언제나 제자리 걸음이 아닌가? 

 인생이라는 장에서 목표를 위하여  내 스스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지 않나 깊은 생각을 해 보았다.

수많은 성공학 서적과 마인드 강좌에서 나오는

"도전해보아라..!  "    " 시도해 보아라...! "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  "   라고 수도 없는 표현을 하고는 한다.  너무나 통속적인 그런 말들이 웬지 싫었었다.

그렇게 노력하고 성실히 최선을 다한다면 무언가 댓가가 어느정도는 도달해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럴까 ..!     과연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인가?

나는 인생이라는 단 한번 뿐인 마라톤에서 나는 런닝머신 앞에서 뛰는 것처럼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것인가?

아니면 42.195 km  를 위하여 땀으로 한걸음 한 걸음 쉼없이 전진하고 노력하는가...?

등산을 시작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나의 한걸음 한걸음이 정상을 밟는 희열을 자극한다.

코끼리를 한번에 다 먹을 수 없고 한입에 한번씩 먹다보면 서서히 다 먹을수 있다는 것처럼 나는 과연 끓임없이 얼마나 노력을 했다는 말인가?

 

살아가면서   말과 행동이 다르고 이중적인 표현을 하는 사람을 간혹 가다가 보고는 한다. 나도 포함이겠지만  돈은 중요한것이 아니더라... 마음만 편하면... 그저 내 등뉘이고 먹고 살 걱정 안하고 살면 되지 않겠나... 하는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은  이랬다.    " 이놈의 경기가 문제야 ! "      " 대통령을 잘못뽑고 정치하는 이들이 항상 쌈 박질하니 우리같은 서민들은 다 죽으라는 것이냐 ! "    " 추석지나고 김장철이라서 더 경기가 이모양이고 장사가 안되는 것이야....  "    정말 말들도 다 제각각이다.

하지만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경기탓, 대통령 정치인탓, 겨울로 오는 초입의 어려운탓이라고 말들을 할 수도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 탓이다.  내 노력이 부족한 탓이다. 더 열심히 하지못한 내 게으른 탓이다.  돌파구를 찾아야한다,  돈이 되는 일들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한다. 

이러한 현실적이고 냉정한 판단을 내리고 자신을 반성하는 이들을 본적이 없다.

세상을 바꾸려 한적은 없다.  가장 쉬운 내 자신도 바꾸지 못하고 있는데...

모든 것을 쉽게 판단하고 결정짓는 자기 합리화인 것이다...

 

나에게서 수많은 돈에 대한 사연들이 많지만 이 지난3 가지 이야기는 참으로 잊혀지지도 않고 각기 다른 느낌과 아픔과 생각을 하게 만든 일 들이었다.

나는 생각의 전환이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한다.

생각의 전환은 굉장한 힘을 지니고 있다.  내 몸안의 또다른 나이자 동반자라고 생각한다. 지난 3가지 이야기는 내 삶에서 결코 잊고 싶지도 않고 나를 키운 거인같은 반성과 지혜를 주는 이야기이다. 

되돌릴 수는 없지만 나에게 깊은 반추를 상념케하는 나의 지난 이야기속으로 나는 떠나 보기로한다...

 

 

 

 

 

 

 

 

 

 

어린시절 지난이야기 1.

 

 

 

 

어린시절  동생과 나는 심부름을 하고는 했었다.

한달에 한번 정도였을 것이다. 간혹 가다가 두달에 한번 일  때도 있었고 ...

그것은 내가 살던 집과 참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시공부를 하시는 삼촌에게 김치며 여러 반찬을 가져다 주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참으로 자동차로 십여분이면 가는 길이었지만 그 예전 그 도로는 비포장에 굽이 굽이 멀기도 참으로 먼 곳이었다.  

삼촌은 마을과 두어시간 떨어진 곳, 마이산이라고 근처에 있는 이산묘라는 절에서 고시공부를 십년가까이 한 듯 하다.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리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와 내 동생은 계절마다 반찬을 가져다주는 그 일들이 많이도 힘들었다.

 

외딴집에서 걸어나와 정류장까지 1시간을 걸어야했다.  만만찮은 무게의 반찬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게의 강도가 더해갔고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들은 언제나 지겨웠다.

늦게나마 도착한 버스를 타고 십여분을 가서는 화전마을에서 내렸다. 그 마을에서 부터는 또 한시간을 더 걸어서 들어가야만 했다. 김치며 국물이 있는 반찬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요동질에 새기도한다.

팔은 참으로 아프다.  이 쪽 팔로 조금가다 이 팔로 다시 바꾸기를 수십번 하는 내내 참으로 힘이 들다는 것은 몸으로 느꼈다.

어린마음에도 내가 왜 이렇게 고생을 하여야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3시간여를 고생고생하여 삼촌있는 그곳에 도착하면 삼촌은 그리 반가운 얼굴이 아니었다.

어린조카들이 몇시간을 고생하여 땀 흘리면서 가져온 그 음식들을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항상 받으셨다.

그리고 이렇다할 여러 말들도 없이 동생과 나는 다시왔던 그 길로 되새김을 하듯 다시 걸어오고는 했다.

양손에 들것이 없다는 그 사실 만으로 기뻣다.

삼촌은 특별하게 차비를 준다던가..  아님 과자값을 준다는 그런 정은 없었다.

그저 그 배송이 끝나면 다시 집으로 갈일이 남았구나   하고 돌아오근 했다...   그때가 국민학교 5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버스시간이 맞지 않았을 때에는 자전거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길이 힘들기도 했지만 음식들이 무거워서 팔이 빠질 것 같아 어쩌면 요령이 생긴것이다.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도 만만치는 않았다. 족히 자전거로도 두어시간을 갔지만 길은 비포장에 울퉁불퉁하여 모난 곳에서는 넘어지는 일들도 즐비햇다.   가다보면 덥기도 했었고 허기가 져서 배가 고프기도 했었다.    그러던 언젠가 한번은 토마토밭을 지나다가 몰래 토마토를 몇개 훔쳐먹은 일이 있었다.  얼마나 급하게 먹었는지도 모르고  입안 가득 집어 넣은지 한시간만에 설사와 복통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 그 이후로 나는 도마토를 싫어한다.)

그렇게 항상 고생고생하여 찾아간 삼촌에게서는 항상 따듯한 말 한마디도 그리 들은적도 없었고 돌아가면서 차비나 아이스크림 값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린나이 였지만 참으로 싫었다.

씨...   과자값이라도 좀 주지.... 내 안에서의 솔직한 바램이었다.

어머니가 주신 차비로 가다가 아이스크림이나 사먹고 걸어가거나 아님 자전거로 가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어려서 마음만으로 삼촌을 이해하지도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렸다.

댓가를 받는 생각보다는 내가 고생한 그 부분의 따뜻한 말과 정을 느끼고 싶었다. 내가 고생한 일들을 칭찬받고 진심어린 말 한마디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정있는 눈빛으로 차비와 아이스크림 값으로 내 노력의 댓가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백번의 마음속 고마움보다 한번의 행동을 바랬다.   몇년이 흘러 내가 중학교 초기까지의 일이었다...

 

 

.

.

.

.

.

 

 

 

 

열아홉살의 지난이야기 2.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취업을 나가서 6개월 가까이 중소기업에서 근무를 하고 취업기간을 다 채워

웠다.   취업기간내 꼭 한번 가고싶었던 곳이 있었다면 내가 몸담았던 학교였고 그때의 친구들 이었다.

지금것 살아오면서 나름데로 행복한 날들이었다지만 고교시절 만큼 열정과 힘이 있는, 철 모르고 즐거웠던 시간은 다시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돌아가고 싶다...

이리 (익산)까지 가는 시간은 정말로 일사천리 였고 너무나 친숙한 듯한 그 도시의 향수들을 즐겼었다.

그러던중 고교때 유난히 친했던 친구와 연락이 닿았는데 이리에서 3시간여 떨어진 목포에 있노라고 모든 것을 다 책임질테니 몸만 오라는 소리에 한 달음에 목포에 갔었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앞해도라는 섬으로 배를 타고 30여분을 들어갔다.

그곳에서 또 차를 타고 20여분을 또 들어갔다.

웬지 고립되어버린  세상과는 차단된 곳으로 유배를 떠나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친구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나와 친구는 새벽녁까지 소주에 술잔을 기울리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했었다.  그리고 내일부터 같이 일을 도와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섭섭치않게 일당도 조금 주겠노라는 말도 들었다.  친구 끼리 일당은 뭐하고 돌아갈 때 차비나 두둑히 주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친구는 포크레인 운전을 하였었다. 나는 옆에서 도와주는 잔일을 하는 조수역할을 했었다...

당시 나는 몇천원도 남지 않은 신세였다...

 

몇일을 도와주는데  이것은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지못한 친구의 이기적인 모습들이 하나둘 보이는 것이었다. 친구의 우정으로써 데려운 것이 아니고 이 답답한 섬에서의 시간을 같이 보낼 그런 시간의 대상으로 나를 데려온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같이 2년을 같이 함께했고 좋은 친구라 느꼈었지만 나는 의리라는 청춘의 가소로음을 믿고 있었던 그 당시였고 지금은 먹고 사는데 어쩌면 투쟁하는 삶 앞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나는 친구에게 짐을 느꼈나보다...  친구라는 의리로 나는 친구의 진정한 포장을 벗겨 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친구의 삶이 있듯이 나의 삶도 있었다.

이 외딴 섬에서 내가 하는 포크레인 조수일이 나의 일은 아닌 듯했고 섬의 답답한 기운이 싫었다.

나는 다시 가야만 했다.  내가 가고 싶은 인생이 있는데 정지해버린 것은 삶이었다.

그날 밤 친구와 소주한잔을 하면서 살며시 이야기를 꺼냈다.

눈치를 챘는지 웬지 서운한 기색이 보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목포까지는 데려다 줄 수는 없다고 했다.

하루에 배편이 두번있는 날도 있었지만 그날은 한번 뿐이었었고 시간이 늦어 탈수가 없었다.

다시 하루를 기다라자니 답답해서 도저히 그럴 엄두가 나지않았다.

친구에게 부탁을 했다. 저너머에서 배 (택시)를 불러 달라고 주민들이 애용하는 교통 수단이었다.

친구는 굉장히 아까워하는 듯 하다...

 

그리고 나에게 차비나 하라면서 만원을 건네는 것이었다.

만원이면 서울 까지 가는 기차비에 인천까지 가는 전철비하면 딱 맞는 금액같았다.

도저히 담배를 사거나 밥을 한끼 먹고는 갈 수가 없는 금액이었다.

야 !  친구끼리 일당을 달라고 한것도 아니고 빌려서라도 다오   내가 나중에 갑을 테니까...

친구는 돈이 없다고 했다...

나는 친구의 눈빛을 보았다.  내가 사람을 아주 잘못보았구나...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다 내 탓이다.   그래 차비주는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하더냐...

배를 타고 목포로 가는 배에서 바라본 몇일동안의 그 섬은 웬지 슬쓸해 보였다. 내마음도 차가운 바닷물처럼 처량맞는 느낌이 업습했다...

 

 

주어진 만원한장으로 배에서 내려 먼저 한일이 담배를 한갑사는 일먼저 했다.

그리고 머리속으로 머리를 굴려보았다.

허기진 배를 채우면 남는 돈은 오천원 가량...

밥을 먹지 않는다면 서울 까지는 갈 수 있지만 지금 당장 나는 배가 고프다. 다른 것은 다 참아도 배고픈 것은 잘 참지못하는 것이 내 성격이 아닌가...

그렇다면 일단은 먹고 보자... 남은 돈이라면 이리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것이다. 서울까지 가려면 이리가 딱 중간지점이 아니던가...   어떻게든 되겠지.... (이것이 항상 문제였다.   무책임하고 안일한 이 생각들이 항상 문제이다. )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맛나게 국밥 한 그릇을 국물 한방울 남기지않고 깨끗이 먹어 치웠다.

맛나게 담배를 한대 물고 저멀리 몇 일있었던 그 섬을 바라보았다.  다시가고 싶지는 않은 곳이구나... 사람은 그저 사람사는 곳에 있어야한다.

나는 그렇게 목포에서 서울행 통일호 기차에 올랐다.   그때가 해가 누엿누엿 저가는 차가운겨울 그리고 내 열아홉살의 12월의 중순경이었다....  그리고 기차는 쉿소리와 요란한 바퀴소리를 내면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