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년 외길 인생, 메이크업 아티스트 ] ***************************
“성실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어요. 전 19년 동안 한 번도 여름 휴가를 못갔는 걸요!”
텔레비전을 통해 비춰지는 여배우의 얼굴은 누구누구 할 것 없이 예쁘다. 그녀들의 얼굴을 예쁘게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전문가를 메이크업 아티스트라고 한다.
국내 내로라는 여배우의 얼굴을 책임지고 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청경씨(41).
타고난 재능과 노력, 성실함, 포기하지 않는 끈기로 이어진 김청경씨의 성공 이야기를 들어본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청경씨의 하루는 오전 5시부터 시작된다. ‘설마 새벽부터 메이크업을 할려구?’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그녀의 기상 시간은 항상 오전 5시를 넘기지 않는다. 기자와 인터뷰가 있던 날, 김청경씨는 오전 5시30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그 날 처음으로 숍을 찾은 이는 탤런트 김남주. 그녀의 뒤를 이어 손태영, 김정은, 강성연, SES의 바다 등 국내 내로라는 연예인들이 속속 김청경씨의 메이크업실을 찾았다.
화이트와 크림색으로 인테리어된 김청경씨의 메이크업실을 찾는 연예인들은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며 가장 먼저 “선생님,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한다.
이런 이들을 김청경씨는 “어서 와라”며 반갑게 맞이해준다.
1남 4녀 중 장녀, 집안일 책임지는 든든한 기둥수입의 전부는 어머니께, 부모님이 모르는 딴 주머니는 없다!
김청경씨가 분장일을 처음 시작한 지난 83년만 해도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사람에겐 분장사라는 호칭을 붙였을 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이름 뒤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그렇다고 해서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모든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선생님’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사람에게만 붙여주는 훈장과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Point 1. 일등을 할 수 있는 분야에 도전한다.>
김청경씨는 4녀 1남 중 장녀다. 그녀는 현재까지 미혼이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으며 아직 학생인 막내 남동생의 학비를 대주는 집안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 가족은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다. 김청경씨는 메이크업을 해서 번 돈으로 동생 세 명을 대학까지 졸업시켰고 그 중 막내인 남동생은 현재 미국 유학을 준비중이다.
그리고 처음 돈을 벌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어머니 모르게 딴 주머니를 찬 일이 없다. 그녀의 모든 수입금은 바로바로 어머니께 맡겨지고 있는 것이다.
“전 어머니를 꼭 닮았어요. 저희 어머니는 연세가 많으신 지금도 얼마나 셈이 정확한지 몰라요. 아버지는 정이 많아 자식들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셨고 어머니는 인자하면서 똑똑한 면을 많이 보여주셨어요. 두 분 모두 현재 저와 함께 살아요.”
김청경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된 것은 어쩜 집안의 피를 이어받아서 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손꼽놀이와 인형놀이를 즐길 나이인 4세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인형을 잡고 놀 나이에 크레파스를 쥐고 그림을 그리는 김청경씨를 보며 가장 흐뭇해 한 사람은 바로 그녀의 큰아버지였다.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셨던 김청경씨의 큰아버지는 그녀의 그림을 보고 “색을 사용할 줄 아는 아이다”라며 유난히 예뻐하셨다고 한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김청경씨는 색에 대한 감각이 남달랐던 것. 그것을 눈치챈 큰아버지는 중학생이 된 그녀를 고등학생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게 했을 만큼 그녀에 대해 큰 애정을 보였다.
그래서 김청경씨는 자신의 진로를 미술 선생님으로 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매진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대에 진학한 김청경씨는 대학에 입학한 후 자신의 꿈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미술 선생님보다 더 근사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직 여성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그녀는 어느날 갑자기 앵커우먼이 되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왜 앵커우먼이 되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똑똑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앵커우먼이 되기 위해 그녀는 다니던 대학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서울예전 방송연예과에 입학했다.
그 당시 김청경씨가 2년제 대학을 선택한 것은 앵커로 입사하려면 또래들과 대학 졸업 연도가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김청경씨는 서울예전에 입학한 후에야 깨달았다.
2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앵커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힘든 일이라는 것을 눈치챈 김청경씨는 새로운 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분장이라는 분야였다.
“그 당시 서울예전에서는 다른 학과 수업을 듣는 것을 학점으로 인정해주었어요. 그래서 2년 내내 연극과와 영화과의 분장학 수업을 들었죠.
어렸을 적부터 그림을 그린 것이 분장학 수업에 큰 도움을 주었어요. 교수님께서 그린 그림을 똑같이 흉내내면 친구들은 물론 교수님도 놀라셨어요.
전 중·고교시절 매일 노트와 연필을 가지고 다니며 아무 곳에서나 스케치를 했거든요. 특히 인물 크로키하는 걸 좋아했어요.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따라 할아버지의 얼굴에 자리잡은 주름살이 보이기도 하고 숨겨지기도 하죠.
이런 것을 그림으로 그리는 게 너무 재밌어서 매일 크로키를 하다보니 명암 표현과 선 그리기가 자연스럽게 완성된 거예요. 분장학 수업을 들으면서 제가 그림을 그린 것이 얼마나 잘 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죠.”
1년 8개월 동안 월급 10만원 받으며 악바리로 일 배우기하루에 엑스트라 80명에게 수염 붙여주며 순발력 쌓았다!
<Point 2. 악바리처럼 잠을 줄여라!>
대학 재학 시절 김청경씨는 학내 정오 뉴스의 앵커를 할 만큼 목소리가 좋았고 발음도 정확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주위에서는 성우를 하라고 권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앞으로 자신의 진로를 분장사로 정했다.
그리고 방송국에 입사 원서를 제출했다. 대학에서 방송연예과 수업을 들으며 김청경씨는 2년 내내 학교 행사의 주인공을 맡았다.
똑 부러진 말투와 정확한 발음 그리고 잘 생긴 외모를 가진 그녀는 학교에서 준비하는 공연에서 매번 주연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방송국의 탤런트 시험에 응시한 후 생각하니 남보다 자그마한 신장이 걸림돌이 되었다.
다른 배우들과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얼굴은 물론 신장도 얼추 맞아주어야 하는데 김청경씨는 또래들에 비해 조금 작은 체구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탤런트가 되는 것이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학 졸업 후 응시한 KBS 탤런트 시험에서 그녀는 탈락을 했다. 하지만 방송국이 좋았다.
대학 시절 실습을 통해 몇 번 방문한 방송국에서 그녀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방송국에서 할 수 있는 일, 그것도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분장사가 되는 거였다.
"그해 KBS 분장실에서 공채 사원을 두 명 뽑았는데 그 중 한 명이 저였어요. 제 동기는 현재 대하드라마 '여인천하'의 분장을 맡고 있는 이승남씨였구요.
그는 입사 4개월만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래서 저 혼자서 일년 동안 수습사원 생활을 했는데 월급은 10만원이었어요.
정해진 출퇴근 시간은 오전 9시와 오후 7시였는데 전 매일 아침 8시에 출근했어요. 제 위로 선배가 열 여섯 명 있었는데 저 혼자서 그분들 수발을 다 들었죠.
대학에서 연기를 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대본을 한 번 읽으면 사진 촬영을 한 것처럼 대본 한 바닥이 모두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그래서 선배들이 분장할 인물에 대한 캐릭터를 파악한 후 필요한 준비물을 아침 일찍부터 미리 준비했죠.
퇴근 시간이 7시였지만 입사 이후 단 한번도 정해진 퇴근 시간에 퇴근을 한 일이 없어요.
드라마 촬영이라는 게 한 번 시작되면 다음날 새벽이나 되어야 끝나거든요. 그러면 가정이 있는 선배들은 집안 일이 있거나 또는 아이들과의 약속 때문에 일찍 퇴근해야 하는 경우가 생겨요.
이럴 때면 선배들은 “청경아, 너만 믿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비웠어요."
군대만큼이나 엄격하기로 유명한 방송국에서 김청경씨는 입사한 지 서너 달이 지난 후부터 선배들로부터 '일을 맡겨도 괜찮을 인물'로 낙점된 것이다.
1년 8개월 동안 방송국 생활을 하며 그녀가 쉰 날은 열 손가락에 셀 수 있을 정도였다.
새벽까지 계속된 촬영 때문에 졸린 눈을 부비며 동이 틀 무렵 집으로 향했어도 오전 8시에 출근하는 것은 한번도 어긴 적이 없을 만큼 김청경은 악바리처럼 일했다.
선배들의 수발을 제외하고 당시 그녀에게 배당된 일은 ‘전설의 고향’과 대하 사극의 엑스트라들에게 수염을 붙이는 일이었다.
그 시절에는 사극 촬영이 유난히도 많았다. 엑스트라가 많은 날은 하루에 80명까지 수염을 붙여봤다는 김청경씨. 엑스트라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기 전에 수염을 붙이는 일은 엄청난 스피드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열심히 수염을 붙였다. 그래서 한동안 방송국에서는 김청경을 두고 ‘수염을 가장 예쁘게 잘 붙이는 분장사’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수염을 붙이던 실력은 어느새 그녀에게 손놀림을 빨리 하는 습관을 갖게 했다.
연예인들의 메이크업을 하다 보면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면 그녀의 수염 붙이기 실력은 어김없이 발휘된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대학을 졸업하고 1년 8개월을 월급 10만원씩 받고 다니던 김청경씨에게 어느 날 굿 뉴스가 전해졌다.
선배 중 한 사람이 퇴사를 한다는 것. 그것은 그녀가 정식 분장사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녀의 상사는 그녀에게 한 달에 16만원이라는 월급을 제시했다. 그런데 회사측과 한번 월급 협상을 하고 나면 4∼5년 동안 월급이 오르지 않는 병폐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16만원이라는 터무니없는 월급에 사인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선배들 역시 ‘버티라’며 무언의 압력을 주었다. 선배들 말만 믿고 ‘버티기’를 하던 그녀에게 얼토당토않은 루머가 생긴 것은 그 무렵이었다.
“새벽까지 일하고 아침에 일찍 나와서 청소하고 책상 정리하고 분장 도구 준비를 하는 저를 누가 안 예뻐하겠어요. 제가 워낙 열심히 하니까 남자 선배들이 커피도 뽑아주고 점심도 사주면서 격려해줬는데 제 상사가 이상한 루머를 퍼뜨린 거예요.
행동이 불미스런(?) 아이라고. 그 일 때문에 함부로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대 선배인 상사와 큰 소리를 내며 싸우고는 쫓겨나다시피 방송국을 나왔어요.”
< Point 3. 나이는 필요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 >
광고 메이크업 시작한 지 일년만에 정상 차지!!!
지난 90년 초 한 달 수입 6백 만원을 기록하며 급성장 방송국에서 쫓겨난 후 김청경씨는 ‘10년 후에 보자’며 이를 갈았다.
그러나 방송국을 나온 후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건 너무도 힘들었다. 그녀와 언성을 높인 상사가 그녀의 일을 계속 방해했기 때문이다.
김청경씨에게 KBS 출입 금지령을 내렸고 그녀가 메이크업을 하는 연예인은 KBS안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조치를 하는 거였다.
심지어는 다음날 새벽에 약속된 스케줄까지 펑크를 내게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경우까지 당하면서도 김청경씨는 그에게 굽히지 않았다.
강한 것에는 강하고 약한 것에는 약한 것이 그녀의 특징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잘못하지 않을 일을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것만큼은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분장 일은 해야 했다. 돈보다 일년에 단 열흘을 쉬지 않을 만큼 바쁘게 생활했는데 갑자기 집에서 빈둥거리는 신세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에 2만원의 일당을 받으며 남산에 위치한 국립 극장에서 분장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김청경씨는 광고 분장을 시작했다. 광고에 출연하는 모델의 메이크업을 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광고 분장을 하는 사람은 다섯 명뿐이었다. 이중 김청경씨의 실력은 탁월했다.
“어려서부터 미술을 배운 것과 KBS에서 분장사로 일하면서 익힌 노하우가 있으니까 언제 어느 순간에서도 당당하게 일할 수 있었어요. 광고 메이크업을 시작한 지 일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화장품 브랜드 8개의 모델 메이크업을 담당했을 정도니까 능력 발휘를 빨리 했죠.”
김청경씨는 광고 메이크업 분야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급속도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KBS 분장실에서 쫓겨날 때 ‘10년 후에 보자’던 약속도 3년만에 이룰 수 있었다.
지난 89년 김청경씨는 자신의 이름을 건 숍을 오픈했다. 또 같은 해 분장협회에서 주관하는 행사에서 화장품 광고에 대한 강의를 했다.
이 행사는 분장 종사자들이 모이는 곳이었는데 여기서 광고 메이업을 강의했다는 것은 김청경씨가 광고 메이크업 분야에서는 최고라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그런데 이 행사의 맨 앞자리에 앉은 이를 보는 순간 그녀는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3년 전 그녀를 KBS 분장실에서 쫓아낸 상사였던 것이다.
“그때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10년 후에 보자’는 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과 그 상사를 일로 이겼다는 것이 너무 큰 기쁨이었어요.”
그 이후 김청경씨는 한 달에 25건 이상의 일을 맡으며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했다. 25건 중에는 1박 2일의 출장 스케줄도 있었던 만큼 그녀는 한 달에 단 하루도 쉬지 못했을 만큼 일속에 파묻혀 살았다.
지난 83년 KBS 분장실의 월급 10만원 짜리 수습 사원으로 시작한 김청경씨는 10년이 지난 후인 지난 94년에는 패션과 화장품 업계의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최고의 아티스트가 되어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일하던 중 쓰러져 나흘 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위험한 순간을 두 번이나 경험했다.
그리고 새벽까지 촬영하고 혼자서 운전을 하고 오다가 졸음운전을 해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김청경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단 한번도 여름 휴가를 떠나지 못했다.
패션 일번지로 일컫어지는 강남구 청담동에 ‘김청경 헤어 페이스’라는 숍을 오픈한 후에도 그녀는 직원들이 휴가 떠난 자리를 메꾸며 정작 자신의 휴가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한다.
앞으로 5년 후까지 자신에게 휴가란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김청경씨. 그녀는 자신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잠을 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도 그녀의 기상 시간은 오전 5시를 넘기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89년부터 98년까지 메이크업 학원을 운영한 김청경씨는 학원에서 강의하며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달에 분장학원에서 배출되는 분장사는 수백 명이 넘는다. 이렇게 많은 인원 중 살아남는 사람은 30∼40명 뿐이다. 그렇다면 1백대 1, 2백대 1의 치열한 경쟁자를 물리쳐야하는데 몇 백명의 경쟁자가 있는 지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살아 남는 한 사람의 분장사가 바로 내가 될 수 있게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포기하지 않는 인내력이 가장 필요하다.”
김청경씨의 ‘포기하지 말라’는 말은 학원생 뿐 아니라 그녀 자신에게도 적용된 것이었다.
김청경씨는 남들이 말하는 ‘성공’이라는 위치에 오른 지난 94년 서른 네 살이라는 나이를 등에 업고 이태리 밀라노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10년을 뛰면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B.C.M이라는 분장 학원에서 열심히 학업에 열중한 덕분에 그녀는 그곳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어느날 B.C.M 분장 학원의 관계자가 그녀에게 ‘언어를 열심히 공부해 학업을 마친 후에는 이곳에서 강의를 하라’는 제의를 했던 것.
세계의 내로라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모이는 이 학원에서도 김청경씨는 손이 섬세하기로 유명했다.
< Point 4. 포기할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라! >
오래도록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남는 것이 소원!!!
지난 해(2002년) 여름, 지금보다 3배 넓은 숍으로 이전하는 게 흐뭇. 그러나 김청경씨의 유학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유학 4개월만에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한 것.
이때 생각으로는 아버지의 병세가 호전되면 다시 밀라노로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연세가 있으신 아버지는 그녀의 생각처럼 빨리 회복되지 않았다.
그 바람에 김청경씨는 다시 밀라노로 떠나지 못하고 국내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아쉬웠던 일이에요.
그런데 아파서 누워 계신 아버지를 보며 ‘다시 밀라노로 떠나면 아버지와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라구요.
전 우리 부모님을 너무 사랑해요. 지금도 분가하지 않고 두 분을 모시며 살고 있어요. 한동안은 일산에서 청담동까지 출근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숍 근처에 오피스텔에서 살았어요.
그런데 가끔 일산 집에 갈 때면 아버지, 어머니가 너무 반갑게 맞아주는 게 마음이 아파서 다시 집으로 들어갔어요.”김청경씨는 오는 여름, 숍을 이전할 예정이다.
그녀가 점찍어 놓은 새 숍은 가정집이다. 그곳을 개조해 앞마당이 넓고 시야가 뻥 뚫린 숍을 마련할 예정이다.
그곳은 현재의 숍에 비해 3배 가량이나 넓어지는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
그녀는 그 사실이 너무도 가슴 설레 개조 작업을 서둘러 달라고 재촉했다가 공사 담당자에게 핀잔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김청경씨의 숍에는 그녀의 둘째와 셋째 동생이 함께 일하고 있다. 첫째 동생은 결혼과 함께 잠시 일을 쉬고 있지만 그녀의 여동생들은 모두 메이크업과 관계된 일을 한다. 아마도 큰 언니의 영향을 받아서 인 듯하다.
막내 남동생은 컴퓨터 공학도인데 현재 유학을 준비중이다. 김청경씨는 지난 90년 초 한달 수입이 6백 만원 선이었다고 한다.
이 당시 가장 유명한 앵커 황인용씨의 수입이 6백 만원이어서 그의 별명이 ‘황육백’이었는데 김청경씨의 수입이 그와 같은 수준이었던 것.
웬만한 월급 사장이 한 달에 2∼3백만원의 월급을 받은 것에 비하면 그녀는 그 당시부터 고소득을 올린 거였다.
앞으로 김청경씨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프랜차이즈 숍을 오픈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욕심은 내지 않을 거라고 한다.
김청경은 한 명인데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곳저곳에 숍을 오픈해 오히려 역효과를 내지나 않을까 고민도 하고 있다. 그래서 사업 확장은 조심스럽게 진행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메이크업 아티스트 김청경씨가 가장 소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래도록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남는 거예요. 나이가 들면 현장을 지키는 것보다 사업가가 되거나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관리만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전 나이를 먹은 후에도 현장에서 메이크업을 하고 싶어요. 사업가나 무슨 협회의 감투직을 수행하는 것보다 평생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남는 것이 제 진정한 소원이에요.”
인터뷰를 마치며 김청경씨는 성공에 대한 포인트 몇가지를 짚어주었다.
첫째,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내가 이 일을 해서 1등을 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
둘째, 잠을 줄여야 한다. 남과 똑같이 잠을 자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그러니까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
셋째, 성실함과 끈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경쟁자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살아남는 한 사람이 자신이 될 수 있을 때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다섯째는 세상의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청경씨는 메이크업 아티스트로서의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여자로서의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은 아직까지 미지수로 남겨두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에 대해 ‘하느님은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