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뇌성마비 장애인 벤처기업가의 '화려한 시절' ] ************************
** 뇌성마비 장애를 딛고 학창시절 ‘스타 투자가’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 서른 번이나 취직원서를 냈으나 모두 거절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은 AIG생명에 입사, 6개월 만에 최연소 팀장에 올랐던 사람. ‘노리넷’을 설립하여 모바일 분야의 유망 벤처기업으로 만들어낸 오대규 사장의 ‘화려한 시절’을 들어본다. **
계단을 오르다 몇 번을 주저앉았는지 모른다. 불편한 몸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사업계획서를 보고 냉랭한 반응만 보이는 담당자들을 보노라면 투자받을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대규 사장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한껏 가미되어 잘 정리된 사업계획서를 본다면 누구라도 감탄하게 될 것이라 확신했었다. 그러나 10군데, 20군데, 거절을 받을수록 점점 암담해져갔다.
어느 해외투자자는 사업계획서를 쭉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회사는 기껏해야 100만 원 정도 가치밖에 안 된다."
오대규 사장은 순간 오기가 끓어올랐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30군데 가량의 문을 두드렸지만, 누구도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지 않았다.
40군데를 두드렸지만 역시 되돌아온 것은 거절뿐이었다. 주변에서는 이야기했다.
“그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야.”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그래 그럼 바위가 부서질 때까지 계란을 던지면 될 거 아냐. 결국 43번째 방문한 창투사로부터 투자를 받아냈다.
모바일 분야 유망벤처기업 노리넷(norri.net)은 그렇게 설립되었다. 노리넷은 KTF를 통해 일곱 가지의 게임을 선보이고 있으며, 특히 ‘루나리스사가 - 영웅탄생’이라는 게임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최근 성심병원으로부터, 휴대폰을 통해 예약 및 환자 체크 등을 할 수 있는 단문메시지 서비스(SMS) 프로젝트도 수주했다.
2002년에 들어서면서 바야흐로 모바일 서비스 산업이 본격적인 성장세에 들어섰다. 그 선두에 노리넷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 “내가 마음 아파하면 엄마는 어떻겠어요”
오대규 사장과의 인터뷰를 위해 약속시간에 노리넷 사무실에 들어섰다. 급한 일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웠다는 오사장이 10분쯤 지나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어들어왔다. 뇌성마비로 인해 불편한 몸을 끌다시피하며 계단을 뛰어올라온 것이다.
미안하다며 웃는 특유의 순박한 모습에 기자의 모든 부담감이 일순 해소되었다. 그에게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거기에는 어떤 핸디캡도 느껴지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였어요. 뇌의 한 부분이 죽는 것인데, 다행히 육체적인 분야를 관장하는 뇌 쪽이 죽었어요. 그래서 정신지체아가 되진 않았어요.”
마치 남의 얘기하듯 자연스레 이야기한다.
그는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한쪽 팔을 사용하진 못했지만 다행히 지적 능력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핸디캡이 많았겠어요. 애들한테 놀림도 많이 받았을 텐데요?”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마음 아파하면 엄마는 더 마음 아파할 거라구요. 놀림받을 때, 정작 저는 괜찮았는데 저의 어머니가 몹시 힘들어하셨죠.”
오대규 사장의 오늘이 있기까지에는 그의 어머니의 힘이 가장 크다. 그가 입학할 나이가 되었을 때, 당연히 장애인학교로 가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만은 생각이 달랐다. 아들이 장애인처럼 성장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일반 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출발이 좋았다. 처음 치는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한 것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그의 육체적 핸디캡을 많이 커버해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남들보다 탁월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 그는 오로지 집과 학교밖에 몰랐다.
“공부는 잘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쫌팽이었어요. 오로지 제 길만 있었죠. 남과의 교류는 없었어요.”
당시 그는 서울대를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그것만이 불리한 여건에 있는 자기 인생의 든든한 받침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의대를 희망했던 그는 자신의 신체적 조건으로 인해 의대에 진학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크나큰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 후로 그는 방황하게 되었고, 대학을 떨어지고 말았다.
* 5수 시절에 신념을 배우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기를 꼽으라면 5수 시절을 꼽는다. 어떻게 보면 가장 참담했을 수도 있을 시절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에게는 보약이 된 시절이었다.
“재수, 삼수 시절에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어요. 주변에 저만큼 실력 있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그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격도 외향적으로 바뀌게 되었어요.”
외향적으로 바뀌었다기보다, 그의 속에 숨어 있던 적극성·외향성이 드디어 세상을 향해 튀어나온 것이다. 그 시절 그는, 자신 역시 여느 누구와 다름없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와 서울대는 끝내 인연이 없었다. 공부하는 맛에 흠뻑 빠져들었던 삼수 시절에 모의고사에서 전국 1등을 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지만, 결국 서울대에는 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또 한 번 좌절을 겪었다. 그러나 그의 의지만은 꺾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이와 같은 좌절을, 편견 속에서 홀로 서기를 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결국 입시요강이 바뀌면서 5수 끝에 서강대 경영학과에 전체 수석으로 입학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사실 연세대 경영학과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것도 불안하게 여겼던 어머니가 고등학교 때 담임과 짜고 저 몰래 서강대에 원서를 넣었더라구요.”
그는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당시 서강대 박홍 총장이 직접 찾아와 그를 한 시간 동안이나 설득했다. “자네 같은 사람이 우리 서강대를 빛내줘야 한다”는 말에 그는 고집을 꺾었다.
*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한마디씩 성장한다
대학 1학년 때 그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 그는 이성이 자기를 좋아하고 따른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1년쯤 사귀었을 무렵 여자 측 부모로부터 인사하러 오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명문대고 수재고 간에 무조건 안 돼, 당장 헤어져.”
어떤 이유나 설명도 할 틈이 없었다. 그의 사랑은 이렇게 깨어졌다. 그는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렸다.
“그때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더라구요. 절 위해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던 어머니를 저버릴 수가 없었어요.”
그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도약할 계기를 찾았다. 마침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투자수익률 게임이 열렸다.
오래 전부터 나름대로 투자를 해왔던 그는 집중적으로 투자기법을 다듬고 그것을 가지고 수익률 게임에 도전했다.
그리고 그 게임에서 엄청난 수익률을 올리면서 일등을 차지했다. 스물 여섯 살 젊은이가 개발한 투자이론은 당시에 커다란 화제가 되었다. 그는 다시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내몰았다. 조금의 위축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틈이 없을 만큼 자신을 내몰았다. 교수들을 좇아다니면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하고, 또 교내 아르바이트도 했다.
“저는 나서는 것을 아주 좋아해요. 그리고 뭔가 좀 튈려고 하구요.”
재학 시절 서강대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었다. 대학생 주식도사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는 친구 어머니들 대상으로 10억 원 규모의 사설 펀드(오대규 펀드)를 운영하기도 했다.
매년 수익률을 30% 이상 유지했으며, 타 대학에 강연도 다녔다. 대학교 3·4학년 때는 무려 50번 이상의 미팅을 하기도 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했어요. 제가 좋아하기도 했고, 또 후배들이 알아서 약속을 잡아놓는 거예요.”
그는 그 많은 미팅에서 애프터 신청을 해서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비결요? 글쎄요. 다들 제가 편안하대요.”
대학 시절 그에게 핸디캡이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열정적인 활동에 보통 학생들이 핸디캡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의 후배들은 그를 보면 이렇게 말한다. “형! 형 얼굴에는 아예 ‘거만’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 이 시절 오대규 사장은 크고 작은 모임의 장을 맡아 이끌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야말로 잘나가던 그는 졸업을 눈앞에 두고 또 한 번 제도권의 벽에 부딪힌다.
서강대에 전체 수석으로 입학하고 과 수석으로 졸업한 그였지만, 면접에서 번번히 떨어졌다. 무려 30군데나 취업원서를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면접볼 때 저는 제가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안 했었어요. ‘난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날 안 뽑아주느냐’는 식이었죠.”
어떻게 보면 간단한 문제였지만, 당시 그에게는 큰 벽이자 시련이었다. 평소 따르며 조언을 구하곤 했던 심리학 담당 최혜림 교수를 찾아갔다.
“교수님께 제 상황을 말씀드리고 도움을 구했죠. 그랬더니 대뜸 이렇게 물으시는 거예요. ‘자네,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그랬지. 그럼, 저기 가서 저거 한번 들어봐.'
그러면서 구석에 있는 무거운 짐을 가리키는 것이었어요. 당연히 못 든다고 그랬죠. 곧바로 교수님이 일갈했어요.”
“그것 봐, 다 할 수 있긴 뭘 다 해. 장애자라는 것을 인정해. 그것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취직이 돼지. 그렇지 않으면 결코 취직이 될 수 없어.”
당시 그는 마치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잘난 자기가 무너지면서, 세상이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
“제가 다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제가 잘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최대한 만족을 시켜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삼성전자·현대종합상사·AIG생명 등 무려 다섯 개 회사로부터 취직 통지서를 받았다.
* AIG생명보험에서 돌풍을 일으키다
현대종합상사에 입사했던 오사장은 조직의 시스템이 자신과는 너무 맞지 않아 곧바로 그만두고 AIG생명을 노크했다.
AIG생명에서는 매니저만이 그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그러나 부지점장과 지점장은 그가 영업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정을 내렸다. 매일 찾아갔으나 헛수고였다.
“저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하던 매니저가 하루는 저를 부르더라구요. 그러더니 몇 월 몇 일에 전무님이 새로 부임해 오시니 그날 나와보라는 거예요.”
AIG생명에 새로 부임한 전무는 그를 흘깃 보고는 망설임 없이 한마디했다.
“저 친구, 잘하겠는데.”
이로써 오대규 씨의 입사는 결정이 났다. 그리고 그 전무의 안목은 정확했다. AIG생명의 신입사원들은 입사 후 처음 7개월 동안 일정액의 계약고를 올려야 비로소 정식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 약정액은 사회생활을 처음 하는 신입사원에게는 벅찬 액수였다. 오대규 씨는 단 2개월 만에 그 계약고를 채우는 기염을 토했다. AIG생명 설립 사상 최단기 기록이었다.
처음에 오대규 씨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유일한 백그라운드인 모교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다시 도서관 주임의 소개로, 연대 신방과 교수로 있는 그녀의 남편을 찾아갔다.
“나이도 얼마 안 되고 입사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놈한테 어떻게 돈을 맡기냐?”
당시 연대 교수는 마치 시험이라는 하는 듯한 투로 오대규 씨에게 물었다. 한 번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자네, 주식 좀 한다며?”
그러더니 500만 원을 건네주며, 말일까지 20% 수익만 내오라고 했다.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는 것이었다. 그날이 12월 1일이었으니 딱 한 달의 기간이 주어진 것이다.
오대규 씨는 단 3주 만에 50%의 수익을 만들어 찾아갔다. 교수가 수익액을 돌려주려 했지만, 오대규 씨는 돈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며 고사했다.
그것을 인연으로 그 교수는 물론, 그 교수를 통해 30여 명의 교수가 단체로 보험에 가입했다. 그 후 6개월 동안 그는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비결이라면, 보험상품을 고가·중가·저가로 다양하게 설계해 고객의 급여 정도와 필요성 등을 따져서 가장 경제적이고 저렴한 것을 권했어요. 고객의 돈을 제 돈처럼 소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영업방식은 생명보험업계의 영업 패턴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오대규 씨의 신화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최단기간인 6개월 만에 최연소 팀장으로 발령받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전무실 직속기관인 기획실에 배치되어 상품개발을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그가 개발한 ‘에버레스팅’이라는 연금상품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지금도 인기 상품 중의 하나이다.
* 동생한테 진 빚을 갚기 위해 벤처기업 시작
“동생한테는 항상 빚진 심정이었어요. 가족들의 시선이 항상 저를 향하고 있었으니 동생은 상대적으로 많은 박탈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의 동생은 지금 노리넷 개발팀장으로 있는데, 오대규 사장의 초·중·고 후배이기도 하다.
주변의 모든 시선이 오대규 사장에게 집결되니 동생은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꼈으며, 방황도 많이 했다.
오대규 사장은 그런 동생에 대해 항상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동생이었는데 어느 날 친구 둘과 함께 모바일 게임을 개발했다며 형에게 도움을 청해왔다. 사업화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 스물 아홉 살의 오대규 사장은 AIG생명에서 그야말로 잘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생에게 진 심리적인 빚을 갚을 때라고 생각했다.
순풍에 돛을 달려는 찰라에서 AIG생명을 그만두고,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인 벤처기업가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투자를 이끌어냈으며, 노리넷을 설립했다.
“2000년도 초반 노리넷을 설립했을 때는 벤처 열풍이 막 막을 내리던 시점이었어요. 결국 우리가 시작했을 때는 벤처기업으로서 최악이었지요.”
당시 모바일 분야는 누군가는 시작해야 할 시점이었지만, 수익과는 거리가 먼 시점이었다. 더군다나 경기 위축으로 모든 이동통신사들이 금고를 꼭꼭 걸어 잠가버렸다.
“영업을 뛸 데라도 있었으면 어디든지 다녔겠지요. 우리가 상대해야 할 곳은 통신사 네 군데뿐인데, 그곳에서 빗장을 걸어 잠가버리니 다른 데 갈 데도 없는 거예요.”
대학입시 때 겪었던 어려움, 취업 때 겪었던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지난 2년간 회사 문을 들어서기가 마치 지옥문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고 한다.
“정말 자살도 생각할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팀원들이 회사를 너무 잘 지켜주었어요. 그들 때문에 저 역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01년 가을부터 모바일 산업은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진입했다. 이제 매년 300% 이상 성장할 것이라는 것이 오대규 씨의 예측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 노리넷이 있는 것이다.
“우선 회사가 성공해야 됩니다. 그래야 저의 성공도 있고, 직원들의 성공도 있습니다. 모바일 게임 컨텐츠 분야에서 세계 제일의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의 다음 목표는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는 것이다. 장애인으로서 겪어왔던 자신의 어려움을 바탕 삼아 좀더 현실적인 복지정책을 수립하고 싶다는 것이다.
사실 그가 훌륭한 벤처기업가로서 노리넷을 최고의 기업으로 키워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장애인들에게는 그 어느 복지정책보다 더 크고 값진 가치를 전달해줄 것이라 생각된다.
이미 오대규 사장은, 사람을 완성시키는 것은 어떤 외형적인 완전성의 여부가 아닌 내면적인 요소, 이를테면 신념·꿈·인내 등의 힘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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