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른손마비 극복 한국화가 오태학 ] *****************************



‘분노를 삭이니, 왼손이 보였다’
“움직여야 살고, 살아야 그림을 그린다”


한국화가 산동(山童) 오태학(吳泰鶴). 오전 5시20분이면 어김없이 신발끈을 졸라맨다.

10개월여 부인과 함께 나서는 운동. 연희동 집에서 연세대 북문을 거쳐 산책로 따라 동네를 도는, 그래봬도 시간 반 코스다.

정상인이라면 세번 왕복할 시간이지만 풍을 맞은 그에겐 결코 녹록지 않다. 연대 기숙사 앞 급경사에서는 부인의 팔에 의지해야 한다.

예순넷, 대가의 인생 역정을 밟으며 무슨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 그렇게 느릴 수 없다. 지난 몇 년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아직도 꿈속인 양 실감이 나질 않는다.


1999년 7월2일. 중앙대 부총장직을 맡고 있던 그는 강원도 고성에서 짧은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혼자 며칠 간 작업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린 그는 냇물에 막 낚시를 드리웠다가 뇌출혈로 쓰러지고 만다.

그 뒤 한 달 반만에 의식을 회복했지만 몸은 이미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운명을 탓해봐도 승복할 수가 없었다.

좌절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닥치는 대로 원망하고 욕을 퍼부어 봤지만 허사였다.

“처음엔 죽고 싶었습니다. 한 주먹씩 주는 약도 먹지 않아 혈변·혈뇨를 보았어요. 그 모든 화풀이와 투정은 죄없는 아내 몫이었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집을 나가려 했고요. 내 인생은 모두 오른손으로 이뤄졌는데 왼손으로 오점을 남길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산동의 오른손은 실로 위대했다. 홍익대 3학년 시절 국전에 특선하고 24세에 국전 추천작가를 완료해 그 천재성을 일찍이 인정받았다.
이당 김은호에서 운보 김기창으로 이어진 우리나라 정통화맥을 계승한 적자라는 사실도 자타가 공인한다.

양립이 어려운 채색과 수묵에서 모두 일가를 이룬 유일한 화가다. 그림 속 천진한 어린이들처럼 꾸밈이 없어 시세 편승과 타협을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산동의 재능은 특유의 ‘호언’과 ‘허세’와 어우러져 항상 ‘견제’와 ‘질시’의 대상이 될 정도로 도드라졌다.


산동의 제자들은 그의 호언·허세를 ‘산동 데포르메’(대상을 왜곡·변형하는 미술기법)라 부른다. 그 모든 것은 또한 완벽성을 추구하는 자신감에서 비롯됐음을 믿는다.

사고 후에도 동료·후배들의 전화라도 받을라치면 “모든 것이 잘 되어간다. 그림도 곧 그릴 것이다”라는 호언은 여전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초조했다. 몸이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던 까닭이다. 자폐아처럼 자꾸 움츠러들었다. 바깥에 나가지 않았을 뿐더러 누가 찾아오는 것도 싫어했다.

그러나 기적은 싹트고 있었다. 수도여사대(현 세종대) 재직시절 제자 신분으로 인생의 반려가 된 부인 김영신씨와 1978년 이후 중앙대에서 가르친 제자들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씨앗이 됐다.

특히 ‘사은의 간호’는 산동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강선구·서정태·김진관·김선두·박완용·김덕기·조상열씨 등 20여명은 사고 직후 4명 1조를 이뤄 은사의 굳은 몸을 24시간 주무르는 노고를 자청했다.

몸은 조금씩 풀렸다. 운동 역시 제자들이 주도했다. 휠체어에 산동을 태워 바깥으로 나온 후 걸음을 걸렸다. 첫날 100m를 20분에 걷고는 사제가 모두 눈시울을 적셨다고 한다.

산동의 마음도 함께 열렸다. 얼마나 집착하던 오른손인가. 용하다는 의원도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중국에서 침 치료를 받은 것만도 두차례에 6개월이었다. 하지만 오른손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까운 시간을 계속 허비할 수는 없었다. 작년 가을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부인과 함께 운동을 시작하고 붓을 잡았다. ‘현실을 인정하고 환경에 순응하자’. 고집불통인 그가 왼손에 새로운 인생을 거는 데만 2년이 걸린 셈이었다.

“이제껏 완성한 그림은 사슴과 어린이를 그린 ‘동화’와 아버님 초상 등 2점입니다. 지금은 95년 백두산 여행의 스케치 등 40여점을 동시에 작업하고 있어요”

지난 9월 운보갤러리 개관전에 사고 후 첫 작품을 냈을 때에는 그를 아끼는 동료·후배들이 몰려와 기적의 회생과 재기의 집필을 축하했다.
이전의 세련된 맛은 덜해도 더 순수해졌다는 이야기와 자신감보다는 겸손함이 배어 있다는 말들도 했다.

그들은 그러나 왼손 창작의 고통을 모른다. 작업이야 종일 일이지만 왼손이 생각과 달리 자꾸 무너진다.

힘도 너무 들어 10분 일하고 한 두시간 쉬기 일쑤다. 왼손을 긴장해서 쓰다보면 마비된 오른손과 다리가 강직(强直)되고 이내 몸 전체가 굳어진다.
몸이 풀릴 때까지는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요즘 그의 작업은 자연히 암채를 반복해서 색을 올리는 채색화뿐이다. 수묵은 일필(一筆)이 불가능해 당분간 하지 못한다.

산동이 제자에게 일깨운 교훈 중 하나는 “그림에는 완성이 없다”이다. 영화 ‘취화선’의 ‘귀거래도’ 부분에서 주인공 장승업이 스승에게 혼나는 장면에서 이 메시지가 나온다. 이 영화의 자문을 맡았던 제자 김선두씨(중앙대 교수)가 산동의 가르침을 ‘취화선 버전’으로 만들었다.

“예전에는 표현력의 확신으로 화폭을 채워나갔으나 이제 그것들을 하나씩 비워나갈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린다는 것도 살아있음의 증거지요. 내년쯤 정년퇴임을 기념해 왼손 신작전을 가져볼 작정입니다”

비록 어눌한 붓질이지만 그는 오늘도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화판에 펼치고 있다. 어눌함. 달인·명인의 세련된 단계를 초월하는 최고의 격조가 이 어눌함에서 이루어질지 기대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