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야간여고,점원 .... 사시합격까지 ] ****************************



< 김미애씨 "저에게도 아픈 과거...방황하는 청소년 도울겁니다." >


만나기 전부터 가슴 설레는 사람이 있다. 이력서 한 장에 담기 어려운 내공을 쌓은 사람들이 그런 경우다.

지난 4월 2일 만난 김미애(34)씨가 그랬다. 그녀를 만나기로 한 일산까지 가는 버스는 달릴 만하면 멈춰서 나를 감질나게 했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유쾌했다.

미애씨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녀는 방직 공장에 다니며 야간여상을 졸업했다. 쇼핑센터에서도 일했고 초밥집을 하며 생계를 꾸려가기도 했다.

그녀는 지난해 말 사법시험에 합격해 현재 일산 사법연수원에서 법조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미애씨의 이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겪어보지 않은 일은 알 수 없다는 그녀의 철학은 경험에서 체득한 것이다.

미애씨는 판·검사가 되든, 변호사가 되든 청소년 선도를 위해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다. 젊은 시절 방황하는 청소년들에게서 미애씨는 그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 기억 하나

자궁암 말기로 핏기 하나 없이 누워만 계셨던 어머니 기억이 나요. 중학교 2학년 때였죠. 어머니는 제주도 해녀 출신이거든요.

따개비다, 군소다, 바다에서 나는 것들을 잡숫고 싶다고 찾으셨죠. 전 어른 해녀용 고무 장화를 신고 바다로 나가곤 했어요.

어머니가 아프다니까 신(神)을 찾게 되더군요. 하소연할 데가 필요했어요. 어머니를 리어카에 싣고 교회로 나갔죠. 하나님 도와주세요.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 기억 둘

아버진 사업에 실패하신 뒤로 별다른 일이 없었어요. ‘명문학교’에 가겠다고 고집을 피워 포항여고에 입학했는데 도움을 구할 곳이 없었죠. 아침마다 동네를 돌며 차비 빌리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어요.

1학년 5월쯤이었는데 반 아이들이 갑자기 저더러 교실 밖에 나가 있으래요.

‘불우이웃 돕기’였죠. 애들이 걷은 돈을 받는데 어찌나 얼굴이 화끈거리던지. 조회시간에 교장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 칭찬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셨죠. 제가 그리웠던 건 따뜻한 말 한마디였고, 살가운 관심이었는데….

자존심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전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둘 결심을 했어요.


◆ 기억 셋

1학년인 그때가 85년이었지요, 부산에서 공장에 다니던 친구들이 포항에 올라왔어요. 그애들을 무작정 따라나섰죠. 방직공장에 취직해 허드렛일을 했어요.
하루 8시간 꼬박 일했는데 피곤해서 쓰러질 정도였죠. 밤엔 여상에 다니면서 학업을 이어갔죠.

돈을 좀 모아 15평짜리 초밥집도 냈어요. 주방장도 하고, 주문도 받고, 계산도 하고 1인 3역을 했답니다.
손님들은 ‘나이 어린 아가씨가 고생한다’면서 기특하게 여겼고 단골도 제법 생겼어요.

그런데도 이게 아닌데,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닌데…. 자꾸만 허기졌고 목이 말랐어요.


◆ 기억 넷

27살이던 96년에 대입 수능공부를 시작했죠. 이듬해 동아대 법대에 입학해 학교 고시실에 들어갔어요. 입실 시험에서 1등을 한 덕분에 학교에서 보조금까지 받을 수 있었죠.

그 후로 매일매일 감격하며 살았어요. 다른 생각없이 공부만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뻐서. 돈을 만져도 기쁜 적이 없었죠. 내 안엔 채워지지 않는 게 있었으니까요.

전 도서관 창가에 자리를 정해두고 앉았거든요. 어느날 창가에 햇살이 비치는데, 햇살이 나만 비추는 것 같았어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마냥 울었죠. 제 자리엔 항상 성경책이 함께 했구요.


◆ 기억 다섯

96년부터 지난해까지 7년이네요, 사법시험에 매달린 시간이. 하루 열두시간 책상에 앉아 있었죠. 정말 즐거웠어요. 부모 잘 만나 줄창 “대학 가라”는 소리 들은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전 좋아하는 것 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죠.

2차 공부 땐 있는 돈 죄다 모아 서울서 학원에 다녔구요. 뭔가 할 때마다 미리 돈 계산을 하는 게 익숙해요. 누군가 알아서 도와주는 행운이 제겐 별로 없었거든요.

1차 시험 붙고 대학에서 매달 받은 보조금이 42만5000원이었어요. 동아대는 제게 꿈을 열어 준 곳이예요.



◆ 꿈 하나

꿈은 꾸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아이들 말예요. 얼마나 아까워요. 저처럼 힘들게 지낸 아이들을 돕는 게 제 꿈이예요.

딱딱한 말로 하면 청소년 선도. 그런데 누굴 도우려고 보니까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어요. 1년동안 한 학생에게 매달 조금씩 후원해 준 적이 있는데, 미리 약속 했어요.

절대 학생에게 제 이름을 밝히지 말 것. 가끔씩 집에 들러 먼 발치에서 학생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만 지켜봤는데, 어릴 때 생각 안났다면 거짓말이겠죠.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이제 한 고비 넘겼으니 또다른 고비를 향해 올라가야죠.

그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했다. 그녀가 믿는 하나님은 막다른 골목에서 절망했을 때, 수중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손을 뻗쳐 준 유일한 ‘친구’라고 했다.

인간의 얄팍한 지식으로는 풀 수 없는 숙제를 그녀는 신(神)에게 맡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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