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둑의 최고봉 이창호 ] *********************************



< "괴롭더라도 참고 기다리는 편이 기회가 더 많이 오죠!" >

이창호는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그런 이창호가 어떻게 지구상에서 가장 복잡한 게임이라 할 수 있는 바둑의 최고수가 되었을까?

이창호는 아주 느리고 고전적이다. 때로는 세월의 흐름조차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 이창호가 어떻게 스피드를 생명으로 하는 바둑판을 제압할 수 있었을까?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하는 첨단의 승부세계에서 어떻게 무적의 제일인자(第一人者)가 되었을까?

이창호는 촌스럽다. 좋게 말하면 소박하다. 남들이 세련미가 넘치는 멋진 감각으로 화려하게 앞서가며 한 건을 노릴 때 그는 묵묵히 후수(後手)를 감수하며 때를 기다린다.

지옥의 파수병처럼 언제나 그곳에 서서 기회가 오지 않는다면 영원히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다.

바둑계가 그런 이창호에게 최고의 영광을 준 배경은 무엇일까?

바둑에는‘실리’와‘두터움’이란 두 마리 토끼가 있다. 실리를 좇으면 엷어지기 쉽고 두터움에 치우치면 실속이 없기 십상이다.

실리는 눈앞의 현찰이고 두터움은 장래성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충돌한다.
드넓은 바둑판은 언제나 미지의 변화로 꿈틀거리고 미로와 함정, 유혹으로 가득한데 과연 어느 길로 나가는 것이 최선인가.

바둑은 끝없는 선택의 게임이며 선택의 기준은‘능률’이다. 이것이 최우선이다. 빠르되 뒤탈이 없는 행마가 가장 능률적인 것이니 바둑은 우선 스피드를 익혀야 한다.

그 다음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몸싸움의 능력과 수시로 변하는 형세에 대한 판단력을 갖춘 뒤 바둑판이란 대해로 나아간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는 경험과 용기, 그리고 인내로 역경을 헤쳐나간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점은 따로 있다. 용기는 간발의 차이로 만용이 되고 인내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소심의 낙인을 찍힌다는 점이다.

조훈현 9단은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이란 말 그대로 바둑계 최고의 속력행마를 자랑한다.
바람처럼 달리다가 순간적으로 날아드는 창은 화려의 극치다. 일거에 형세를 휘어잡고 불길처럼 일어선다.

조치훈 9단은 입에 단도를 물고 폭포를 거슬러올라가는 투사다. 역경에 처할 때마다 불같은 투혼으로 극복하며 온몸을 던져 승리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

일류들은 대개 그랬다. 일본을 휩쓸었던‘면도날 사카다’는 손만 닿으면 피가 배어날 정도로 날카로웠고 유창혁 9단은 여름 햇살처럼 강렬한 공격으로 지울 수 없는 이미지를 남겼다.

이창호는 그러나 이런 일류들의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어쩌면 누추하기조차 한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

강자는 혼란과 변화 속에서 더욱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기에 당연히 변화를 좋아한다. 그러나 최강 이창호는 될 수 있으면 변화를 피한다.

막강한 화력과 전술전략을 지녔음에도 그걸 사용하지 않고 평탄한 길을 가려고 애쓴다. 프로가 변화를 피하면 겁쟁이란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창호는 적이 대군을 몰고 달려오면 허리를 숙여 옆으로 피한다.

이창호는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는다. 전력을 다하는 첨예한 싸움은 어디서 묘수가 등장할지 모른다. 사태는 예상치 못한 곳으로 마구 흐르고 종종 백척간두에 서게 된다.

한 방에 성공할 수 있지만 한 방에 무너질 수 있다. 이창호는 이런 위험은 옳지 않다는 신념이 뼛속까지 배어 있는 청년이다.

반대로 이창호의 스승인 조훈현 9단은 ‘기세에서 밀리는 건 바둑도 아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그는 어린 창호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상대가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마라. 낯선 길을 두려워 마라. 그렇게 해야 오늘은 지더라도 내일은 이긴다.”

이창호는 스승의 가르침과 다른 방향으로 갔다. 그는 어려서부터 ‘실수’에 깊이 천착했다.
패배한 바둑을 밤새우며 복기하면서 승부는 결국 묘수가 아니라 실수로 판가름난다는 것을 뼈저리게 인식했다.

선생님은 실수도 내일의 밑거름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실수가 하나의 습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9단은 실수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았다. 상대를 경시하는 마음, 상황을 쉽게 보는 경솔함, 내쪽도 불안하기는 하지만 상대가 그 정도로 완벽하겠느냐는 오만함, 서로 모르는 길이니까 어떻게 잘 되겠지 하는 안이함.
이런 것들은 습관이 된다. 그것을 근절해야 한다.

사람이 어떤 것을 안다는 것과 그 해결책을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창호는 달랐다. 그의 자세는 더욱 신중해졌고 그의 바둑은 점점 더 견실해졌다.
1백점짜리 수를 찾기 어려우면 70점이나 80점짜리에 만족했다. 1백점짜리 수가 번쩍번쩍 빛을 내며 유혹을 해도 그 수가 0점의 위험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못 본체 참았다.

뛰어난 사람일수록 한계에 도전하는 법이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즐기는 법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더라도 바둑두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발견한 묘수를(설령 그로 인해 파멸을 겪는다 하더라도) 자랑하고 싶은 법이다.

이창호는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 속에서도 1백점짜리 묘수를 쓰레기통에 던졌다.

조훈현 9단은 언제나 그 장면의 최선, 즉 1백점짜리 수를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다 0점 짜리를 둔 적도 많다.
하지만 자신에게 1백점 짜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포기한 적이 없었다.
이창호는 따지고 보면 스승 조훈현 9단과 정반대의 길로 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이 생겼다. 견실하면 느리다. 느린 것은 치명적이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 이창호의 저 유명한 ‘기다림’이 등장한다.

곧은 낚시를 드리운 채 세월을 낚았던 강태공처럼 이창호는 천변만화(千變萬化)를 등 뒤로 흘려보내며 무한한 인내력으로 때를 기다렸다.

이창호는 스승의 집에서 기거하던 7년 동안 발소리 한 번 크게 내지 않고 살았다.
밤엔 새벽 2시나 3시까지 매일 공부하며 자신의 바둑에서 단 한 수라도 실수를 지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이런 수도승 같은 타고난 기질이 그의 바둑스타일에 그대로 배어들었다.

이창호 바둑은 이런 식으로 하나의 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감각의 화려함을 중시하는 바둑계에서 이창호를 바라보는 시선은 미묘했다.

승률은 좋으나 품격은 초일류가 아니라는 말이 많았다. 특히 형태의 아름다움과 능률을 중시하는 일본은 이창호의 가치를 노골적으로 폄하했다.

한 판의 불꽃놀이 같은 조훈현의 바둑에 비할 때, 이창호의 바둑에선 바닷물이 소금이 되는 길고 긴 세월이 느껴진다.
상대가 찌르면 그는 물러선다. 상대가 빈사상태의 미생마를 놔둔 채 활개치고 다녀도 그는 공격하지 않고 못 본체 한다.

대신 이창호는 서부영화에 나오는 인디언 추적자처럼 줄기차게 상대를 추격해 간다.

상대는 문득 뒤돌아볼 때마다 언제나 저만큼 떨어져 묵묵히 추격해 오는 이창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처음엔 그런 이창호의 모습에서 지겨움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나 이윽고 모든 프로기사들은 뒤를 돌아볼 때마다 전율에 가까운 공포를 느끼게 된다.

“사실은 추격하는 내가 훨씬 괴롭다”고 이창호 9단은 말한다.

“화려한 바둑은 보기 좋다. 나도 그걸 안다. 하지만 바둑은 장기전이고 자신과의 힘겨운 줄다리기다. 승부는 이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게 본질이니까 이기려면 실수를 줄이고 괴롭더라도 참고 기다리는 것이 현실적이다.”

이창호를 보면 몇 가지 기훈이 떠오른다.

▶선작50가자필패(先作五十家者必敗)=먼저 50집을 지은 자는 반드시 진다는 얘기이니 너무 앞서가려고 서두르지 말라는 얘기다.

▶묘수를 3번 두면 진다=한 번 두기도 어려운 묘수를 3번이나 두었는데 왜 질까. 재주가 너무 승(勝)하면 위험하다는 경구다.

▶하수(下手)는 겁이 없다=조훈현은 전류처럼 빠르다. 그러나 그 빠름 속에 숨은 과속의 위험성을 지적할 만한 능력자가 없었다. 지금은 이창호라는 교통순경이 종종 딱지를 뗀다.
오랜 바둑사에서, 아니 세상살이에서 이창호는 속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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