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 없이 번 돈 몽땅 출판에 재투자 ] ****************************



20년 동안 '키출판사' 운영해 온 김기중 사장… 영어회화·수험서·PC 관련 책 등 베스트셀러


‘호시우행(虎視牛行)’. 소걸음에 호랑이 눈. 매사를 신중하고 끈기 있게 하되 판단은 날카롭게 하라는 불가의 가르침이다.

연 매출 20억원이 넘는 키출판사의 김기중(53) 사장. 혼자 시작했던 출판사가 이만큼 자리잡기까지 김사장은 소처럼 뚝심 있게 자기의 길을 걸었다.

성공하기까지 어려운 시간도 많았지만 묵묵히 사업을 계속했고 결국 성공이라는 단 열매를 얻게 된다.


* 설탕가격 예측해 큰돈 벌어

김사장은 한국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유복자로 태어났다. 공부를 잘 했지만 명문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시골 고등학교를 선택했다.
부유하지 못한 환경이었지만 학생회장을 할 만큼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1969년 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입대를 했지만 1년 정도 군생활을 한 뒤 ‘아버지가 없는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일찍 제대했다.

“학교에 복학하려면 돈을 벌어야 했지요. 먼저 친척들이나 지인들을 통해 과외를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벌었지만 많은 돈을 모으기는 힘들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71년 서울 군자동 어린이대공원 근처에서 4평짜리 구멍가게를 열었다.
그의 첫 사업이었다. 위치는 좋았지만 먼저 장사를 시작했던 사람들은 줄줄이 실패한 가게였다.

“너름 허름했나봐요. 저 혼자서 차양도 만들고 진열대도 새로 만들었죠.” 부지런히 일했고 근처 건국대 학생들까지 단골이 됐다. 2개월 뒤에는 조금 무리를 해서 냉장고를 들여놨다.
냉장고가 귀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시원한 음료수는 불티나게 팔렸다. 냉장고에 투자한 돈은 몇 달만에 회수했다.

그러나 그가 큰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설탕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이미 경제신문을 정기 구독했다. 지금은 경제신문 구독이 보편화됐지만 그때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경제신문을 읽다 보니 국제 사탕수수값이 오르면 4개월 뒤 설탕 값이 오르는 것을 발견했죠.”

사탕수수 값이 오르자 설탕을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위험 부담은 있었지만 확실하게 오를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쌓아둘 곳이 없어 친척집 창고까지 빌렸다. 예상은 적중했다.

4개월 뒤 설탕값은 크게 올랐고 김사장도 많은 돈을 벌었다.

“설탕 도매상들도 저를 찾을 정도였죠. 덕분에 당시에 40평짜리 집을 한 채 살 수 있을 만큼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돈 버는 데 매달리다 학업을 포기했다.

"처음에는 대학을 다니려고 돈을 벌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현장에서 일하면서도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자 대신 평상시 관심이 많았던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기원(棋院)을 냈다.
적당하게 일하면서 공부도 할 생각이었다. 가게를 판돈과 그동안 모은 수입금을 투자했다.

생계와 공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겠다는 처음 생각과는 달리 담배연기 자욱한 기원에서 바둑만 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기원의 경영도 악화돼 갔다.

“기료만 받아서는 수입을 올릴 수 없는 구조더라고요. 밤이 되면 마작이나 돈내기 바둑을 지원해 주고 돈은 어느 정도 벌 수 있지만 불법행위라는 점 때문에 외면했습니다.”
기원은 손해만 보고 8개월 만에 접었다.

김사장은 돈과 공부 두 가지를 다 노리는 것보다 돈을 버는 일에만 매달리는 편이 빠르겠다는 생각했다.

돈을 벌기로 작정하고 영등포에 고기집을 냈죠. 자본금이 없었지만 설탕사업으로 성공해서 그런지 친척들이 조금씩 도와주시더군요.”

김사장은 음식점에서 주방장을 하던 고향친구와 함께 8개월 동안 식당을 했다. 새벽5∼6시면 시장에 나가 고기를 샀다.
수입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홀어머니의 반대로 식당을 접고 75년 처음으로 취직을 했다.

우연히 영어학원 강사 구인공고를 보고 지원했던 것. 평상시 영어에 관심이 많았고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영어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종로의 한 영어학원 강사로 채용됐다.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좋아하는 영어와 관련된 일이라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자신만의 영어학습 노하우를 전수한 덕택인지 수강생도 많이 늘었다.

자신이 생긴 그는 5개월 만에 서울 이태원에 조그만 사무실을 임대해 책상 몇 개 갖다놓고 독립했다.

“6개월 동안은 수강 인원이 매달 10명을 넘기지 못했죠. 수업료 받아서 사무실 임대료 내기도 빠듯하더군요.”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강의를 했고 수강생도 꾸준히 늘어났다. 1년 뒤에는 13개반을 운영할 만큼 수강생이 늘었다.

김사장은 “하루 10시간 이상씩 밥 먹을 새도 없이 강의를 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그는 평소 친분이 있던 주한미군의 소개로 용산 미군기지 내에 있는 외국대학 분교에 등록했다.

이태원에 있던 사무실도 남영동으로 넓혀 이사를 갔다. 간판도 없는 허름한 학원이었지만 거의 최초로 외국인 강사를 초빙했다.
미국인 친구들이 생기자 이들을 학원강사로 끌어들인 것.

요즘 유행하는 외국인 강사를 25년 전 처음 시작했다. 용산에 있는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2∼3년 될 무렵 그 동안 차곡차곡 모아왔던 미국 대학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유학정보 사업을 시작했다.
동시에 번역과 학원에 강사를 소개하는 일도 했다.

“한 회사에서 급하게 한국 사설을 영어로 번역해 오라고 하더군요. 급하게 하는 바람에 몇 가지 실수를 했죠. 그런데 그게 장기적으로 일을 맡길 수 있는지 테스트하는 거였대요. 작은 실수로 큰 사업을 놓친 셈이죠.”

그는 “실력이 있으면 기회가 온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일은 열심히 했지만 좀처럼 재산이 불어나질 않았다. 81년 문화어연(정철카세트)에서 유학안내실장으로 오라는 제의를 받고 다시 취직했다.

“사업을 하다 지쳤나봐요. 영어와 관련된 일이라 욕심도 났구요.”
나중에 교재를 제작하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영어 교재 제작일을 맡았다. “지금 출판업을 하게 된 것은 그때의 영향이었죠.”


* 출판 사업 6년 만에 자리 잡아

김사장이 출판업을 시작한 것은 84년의 일이다. “정보가 큰 부가가치를 낼 것으로 내다 본 거죠. 당시만 해도 출판이 거의 유일한 정보제공 수단이었습니다.”

출판등록증은 2백50만원을 주고 샀다. 종로구 관철동 15평짜리 사무실은 역시 친척들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첫 번째 책은 영어회화 서적이었다. 책표지 디자인은 부인이 맡고 나머지는 자신이 담당해 제작비를 최대한 줄였다. 이렇게 1년 동안 2권의 영어책을 냈지만 시장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다. 2명의 직원은 이미 떠났고 돈은 바닥이 나고 있었다. 정말 벼랑 끝에 서 있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서점에 들러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한군데 모여 북적북적하더군요. 뭘까 싶어 가 보았더니 공인중개사 수험서를 보고 있습디다.”

12권으로 구성된 공인중계사 수험서가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목격한 그는 이거다 싶었다.

문제는 자금. 강사료로 근근히 사무실을 운영하던 그에게 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유일한 재산인 물려받은 선산을 담보로 1천만원을 빌렸다.

필자는 당시 회계사였던 조카에게 부탁했다. 모든 것을 다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달 만에 나온 책이 「공인중개사 20일 합격」이라는 책이다. 이 책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책을 찍어내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김사장은 “아파트 몇 채 살 정도”로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수험서로 재미를 본 그는 이번에는 ‘공인노무사’에 관한 책을 펴냈다.

이번에는 대 실패. 정부에서 각종 자격 시험이 이상 과열현상을 보이자 이를 방지하는 정책을 내놓은 것. 수험서적에 대한 관심은 급속히 줄었고 김사장이 내놓은 책은 몇 권 팔리지 않았다.

공인중개사 수험서로 번 돈도 고스란히 날렸다. 이후 4∼5년간 키출판사는 어려움을 면치 못했다. 변변하게 팔리는 책 한 권 없이 내리 5년을 그렇게 보냈다.

모자란 생활비는 구청이나 사회단체 등을 전전하며 영어강의를 하면서 충당했다. 그런 생활이 오래되다 보니 셋방살이 하는 집 가구에 차압 딱지가 붙을 정도까지 됐다.
그는 그때 붙은 딱지를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패의 쓰린 기억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쓰라린 절망의 시간이었지만 출판을 포기 할 수 없었다. “이미 발을 빼긴 늦었다는 생각도 들었고 분명 출판 시장이 클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지요.”

키출판사가 회생하는 계기는 컴퓨터라는 새로운 흐름이었다. 컴퓨터가 막 보급되기 시작할 90년 무렵 ‘저는 컴퓨터를 하나도 모르는 데요’라는 책을 냈다.

90년부터 99년까지 교보문고에서 팔린 컴퓨터 관련 서적 가운데 2위를 차지할 만큼 베스트셀러 중에 베스트셀러였다.
이후 키출판사는 안정된 성장을 해 오고 있다. 매년 10권 이상의 책을 내고 있고 판매도 호전돼 적절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김사장은 90년 과천에 38평짜리 아파트를 장만했다. 마흔이 넘어서야 내집마련을 한 것이다.
다른 재테크 방법을 몰랐던 그는 한눈을 팔지 않고 출판사업에만 전념하고 있다. 번 돈은 새책을 만드는 데 재투자했다.

“재테크요? 출판사업하면서 번 돈으로 건물 샀으면 10층짜리 건물 서너개는 샀을 겁니다.”

김사장은 부동산에는 관심도 없었고 흔한 국민주 한 번 사본 적이 없다.
“주식을 하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시간도 많이 투자해야죠. 그럴 바에야 사업을 열심히 하는 것이 낫죠.”

그의 유일한 재테크 수단은 사업이다. 남는 돈은 은행 PB팀에 맡겼다. 그에게 은행은 돈을 잘 간수해 주는 곳인 셈이다.

"출판산업은 자전거와 같아요. 늘 새로운 책을 내 놓지 않으면 금방 쓰러집니다. 다른 재테크를 생각할 겨를이 없던 거죠."

20년간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지금까지 3백권의 단행본과 4종류의 학습지를 개발했다. 그는 그것을 무엇보다 큰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많이 늙었어요. 참신한 기획이 나오기 힘들다는 생각도 들죠.” 김사장은 2년 후면 은퇴하고 제주도에 가서 살 계획이다.



* 김사장의 10억 만들기 연보

- 1971년 식품점 창업.
- 1976년 영어학원 설립.
- 1981년 정철영어 입사(월급 70여만원).
- 1991년 과천 주공아파트 구입(31평형. 현재가 4억 5천만원).
- 2003년 강남 도곡동 타워팰리스 입주(63평형. 전세 5억원)

- 84년 ∼ 현재 키출판사 경영(매출액 22억 6천만원. 2002년 기준)
- 99년 ∼ 현재 키미디어(학습지판매)겸업.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사랑 2008-01-30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분을 너무 잘 압니다. 바로 저희 사장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이 분을 존경합니다.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분입니다. 사장님께선 자신을 '사업가'라고 말씀하시지만, 저희 직원들 눈엔 학자보다 더 학자다운 '학자'이십니다. 잘 팔리는 책을 만들려고 하시기보단 유익하고 학습 효과 높은 '좋은 책'만을 고집하시기 때문입니다. 좋은 책, '명품'은 언젠가는 선택받는다는 믿음으로 25년간을 출판해 오신 분입니다. 사실 가끔은 사장님이 답답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냥 쉽게 잘 팔릴 수 있는 책을 만들면 안 되나'는 생각을 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희 사장님은 이에 꿈쩍도 안 하십니다. 이 점이 못마땅한 부분이지만 동시에 존경하는 부분입니다. 가볍고 편한 것을 좇는 오늘날의 세태에 귀감이 되시는 분. 이 글 참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저희 사장님께도 이 글을 보여드려야겠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