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 삼각지에 있는 ‘열린화랑’의 김수영 사장은 쉰이 넘은 나이에 창업해 죽을 고생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화랑을 경영하며 꽤 여유가 생겼죠. 지옥과 천당을 오락가락한 셈입니다. 그는 올해 57세로 49년생입니다.

교사 출신인 그는 지난 2000년말 5천원짜리 그림액자 제조,판매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2003년 7월 용산세무서에 폐업신고서를 내고 한강으로가 깡소주 한 병 마시고 큰 일 낼 뻔 하기도 했습니다. 그뒤 정수기와 건강보조식품 외판원과 전철 행상,동대문상가 옷 장사 등을 거쳐 다시 삼각지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예전과 달리 고가 그림만을 판매해 꽤 성공했다고 본인은 자평합니다. 김수영씨의 지난 4년은 예사롭지가 않습니다.자칫 첫번째 사업 실패로 폐인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그의 뒤늦은 사업 경로를 쫓아가 보겠습니다.

창업을 꿈꾸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은 추적해볼 가치가 있는 생생한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김 사장은 2002년말 저희 한국경제신문과 중기청이 공모한 창업실패기공모전에서 입선했었는데 지난해말에는 창업성공기로 입선한 특이한 인생의 소유자입니다.


◆ 무모한 창업

김 사장은 50 평생을 학교와 학원에서만 보냈습니다.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었겠지요. 그는 ‘사나이답게 화끈한’ 사업에 도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2000년말 결심을 행동 으로 옮겼지요. 자신의 전공을 살려 소규모 그림액자 사업을 하기로 하고 경기도 김포의 허름한 농촌 창고를 빌려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직원은 4명.

하지만 사업을 시작하고 보니 부딪치는게 한둘이 아니었습니다.화장실이나 복도에 거는 1호짜리 소품용 그림이 주력 상품이었습니다. 5천원짜리 한개를 팔면 1천원 이 이익으로 남았죠. 마진율이 20%란 얘깁니다. 1천만원을 벌려면 무려 1만개를 팔아야 한다는 계산이니까 영업이 쉽지 않지요.모텔이나 사무실에서 사가는 물량은 30개가 고작입니다. 1만개를 팔려면 3백군데 이상 거래처를 터야 하는 것이죠. 전국 을 돌아다니면서 영업해도 실적은 시원찮았습니다. 더구나 중국에서 만든 제품들이 개당 2천원에 깔리기 시작하면서 가격경쟁에서 밀렸습니다.

여기에다 공장 기술자들은 성질이 거칠었습니다. 성격이 우유부단한 김 사장이 곤조통인 기술 자들을 장악하기란 영업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영업과 인사관리 모두 제대로 굴러간게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한번은 친구가 1억원어치를 왕창 주문하게 됩니다. 노다지를 잡았다고 처음엔 좋아했지요. 신 축 아파트에 그림액자가 무더기로 들어가기로 돼 있었죠. 납품은 다 됐는데 결제를 해줘야할 친구가 날라 버렸어요. 담보는 아예 잡지도 않았지요. 겨우 3천만원 건지고 7천만원을 허공에 날렸습니다. 안 그래도 근근이 사업을 지탱하던 김 사장은 이 사건으로 완전히 주저앉게 됩니 다. 집 팔아서 사업자금으로 댄 1억4천만원이 2년 반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2003년 7월 폐업신고를 하고 발길이 한강으로 향했습니다. 깡소주 한 병 비우고 죽을 생각만 하고 있는데 119구조대가 익사체를 건져가지고 먼 발치에 수습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됐지요. 축 늘어진 사체는 그야말로 인간이 아니라 돼지 한마리만도 못한 동물이었답니다. 죽을 생각을 접고 악착같이 살아보기로 했답니다,그 순간 말이죠.


◆50대의 인생유전

나이 든 전직 교사를 불러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장으로서 생활비는 벌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도리이니까요. 특히 자식들에게 패배의 그늘에서 빌빌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답니다. 이래서 시작한게 정수기 판매업입니다. 영세한 다단계회사 간부는 입에 침을 튀겼습니다. “잘만 팔면 한달에 1천만원은 너끈합니다요.” 하지만 문전박대를 받으며 발이 닳도록 뛰어다녔지만 한달동안 정수기 판매실적은 '꽝'이었습니다. 이 불황기에 먼지라도 마실 판인데 누가 1백만원짜리 정수기 선뜻 사겠습니까?

다음은 건강보조식품 외판원.모 건강식품 판매회사에 두달간 다녔습니다.외판 경험 이 없는 그가 기댈 곳은 친인척 밖에 없었습니다. 두달간 김 사장의 친인척들은 의무적으로 건강보조식품을 먹어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 쥐꼬리 만한 수입 때문이었죠.

그 다음은 전철 행상으로 변신하게 됩니다.수입이 괜찮다는 소문을 들은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루 수입이 20만원 이상 올랐습니다. 마진도 40%가 넘었습니다. 어려우나마 생활비는 벌 수 있었죠. 그런데 전철 행상에 익숙해갈 무렵 어느날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 납니다. 여느 날 처럼 승객들에게 판에 박힌 안내 멘트를 날리죠.

“잠시 실례합니다.이 소형 라디오는 등산중에도 잘 들리고 공부하면서 전철 안에서 음악을 듣는데 필수적이며 또 값이 가장 저렴합니다.” 한참 상품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한 학생이 조용히 다가왔습니다. “저…,선생님.미술 가르치신 김 수영 선생님 맞지요?” 학생은 미안한 표정으로 김 사장을 빤히 봅니다. 그는 “그…그래, 오랜만이다.다음에 보자”라고 말하고 황급히 자리를 떴습니다. 그날밤 아무도 없는 한강가 로 나가 두번째로 깡소주를 들이키게 됩니다. 아직 덜 배가 고팠는지 제자들을 보는 날이면 얼굴에 깐 철판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친구의 권유로 2003년 11월엔 동대문 누죤상가에서 여성옷가게를 열게 됩니다. 대안이 없었기 에 덤빈 일이지만 '패션의 패 자'도 모르는 그가 까다롭기 그지없는 옷 장사에 성공하기란 애당 초 힘든 일이었습니다. 소매점주들이 보내 전문 바이어들은 복도에 선 50대의 김 사장을 딱한 눈길로 바라볼뿐 구매는 하지 않았습니다. 동대문 패션 바닥에서 할아버지에 가까운 김 사장에 게 거래를 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옷 시장은 격변하게 됩니다. 초 겨울 한겨울 늦겨울 겨울떨이용 등으로 세분화되는 동대문 옷 시장은 겨울 한 철에도 1주일을 주기로 변화무쌍하게 디자인과 소재가 바뀌어 나갔습니다. 석달간 남들이 장사하는 것 빤히 구 경만 하고 옷 장사도 접어버렸죠. 지난해 1월의 일입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산다

2004년 봄 김 사장은 장고에 빠졌습니다. 결국 자신의 전공을 살려 삼각지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러나 자금이 문제였지요. 그는 아내를 설득,아파트를 전세로 주고 월세집으로 옮겼습니다. 친동생에게도 돈을 빌려 모두 8천 1백50 만원을 마련했습니다.

2004년 5월 25일 드디어 삼각지에 ‘열린화랑’ 문을 열었습니다. 4년전과 같은 그림판매업이었지만 점포가 일단 5배로 커졌습니다. 점포만 커진게 아닙니다. 사업방식도 완전히 바꿨습니다. 예전처럼 박리다매식의 소규모 액자사업이 아니라 고가의 예술 품을 취급하기로 방향을 턴 했습니다.

그러러면 일반인 대상의 영업은 소용이 없었죠.귀족 마케팅이 최선이었습니다. 그는 문화예술계의 많은 모임들을 찾아다니며 회원으로 가입하게 됩니다. 이른바 ‘성공한 사람들의 모임’에는 빠짐없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상류사회에 상품을 팔기 위해 선 ‘장사꾼’으로는 곤란했습니다. 미술교사 출신으로서 미술에 관한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그는 스스로 상류사회의 멤버로 변신했습니다. 타고난 얼굴까지 받쳐주니 금상첨 화였죠. 외판원과 지하철 외판원 할때 갈고 닦은 언변은 인맥을 넓혀 가는데 날개를 달아 주었 습니다. 고가의 미술품을 팔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춘 겁니다.

미술품은 정가가 없다는게 특징입니다.똑같은 물건이 없으니 비교도 불가능합니다. 오로지 파는 사람 능력이 가격을 좌우하는 신비로운 시장입니다. 30년이상 친분을 가진 가난한 화가 들은 그를 믿고 조건없이 작품을 맡겼습니다. 잘 팔아달라는 것이지요. 가격은 물론 얘기 안 합니다. 공급물량은 무궁무진한 셈입니다.

김 사장은 인적 네크워크를 갖춘 외에 안정적인 판로를 만들기 위해 미술품 판매전문가 두 사람과 인센티브 계약을 맺었습니다. 전시회 등 각종 이벤트를 열어 작품을 파는게 이들의 주 업무입니다.

2004년 7월 경남 창원에서 연 미술전시회는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1백호 짜리 대작 다섯점과 소품 54점이 전부 팔린 것입니다. 전시기간 14일만에 매출 6천만원,순익 2천4백만원을 기록했습니다. 이익금 일부를 창원시에 기부하기도 했죠. 돈도 벌고 좋은 일도 한 ‘유쾌한 대박’인 겁니다. 1년전인 2003년 7월 폐업 당시가 지옥이라면 이때는 마치 천당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김 사장은 최근 큰 빌딩 정문앞의 예술품 구조물이나 대형 벽화 주문을 따내는데 주력해 많은 성과를 내고 있습니 다. 그럴수록 더 이상은 실패하지 않기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아는 사람 만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던 지하철 행상 경험이 이처럼 자신감과 행운을 가져다줄 줄 몰랐다고 그는 회고합니다.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 독자 여러분도 다 아시죠. 김수영씨를 취재하면서 저는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는 통화를 끝내면서 저에게 넌지 시 물어봤습니다. "혹시 집에 그림 한 점도 없는것 아닙니까, 글 쓰시는 분이 그림 한점 정도는 있어야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