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는 어머니에 대한 글은 쓰지도 못해도 아버지에 그리는 글은 쓸 수 있을 것 같다.

내 어머니에 대한 글은 어디서부터 또 어떻게 써야 할지에 대하여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긴 역경 속에서 사셨던 분이라서 마음이 항상 아프다. 그렇다고 내가 어머니께 효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들이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아버지...




아버지를 생각하면 먼저 술이 떠오르고 술에 취해서 아무데서도 잠드신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술을 몇 달간이고 안 드실 때면 근엄하게 항상 열심히 일하신 모습이 떠오른다.

저녁 일을 마치시고 어머니와 잠자리에서 두런두런 들리는 이야기꽃이 아들인 나는 이것이 행복이구나를 느끼게 하는 순간들이고는 하였다.




어린 나의 기억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외딴집으로 이사간 것이 내 유년시절의 기억이다.  아버지는 항상 술에 취하신 모습이셨고 여름이면 저 멀리서 들려오는 우리 형제들 부르는 소리에 마중을 나갈때가  참 많았다.  너무 술에 취하신 날에는 부축을 할 수가 없으니 니어카를 가져다가 모셔오고는 했다. 어느 날에는 술에 취하셔서 언덕에서 굴러 넘어져서 얼굴을 다치시고는 하고 어떤 날에는 교통사고로 입원을 하시기도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 40대 초반이셨겠구나.  지금 내 나이하고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았을 적의 일이구나.

나는 지금도 궁금하다.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드시고 어머니를 그렇게 힘들게 하셨는지를..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시절.

제각이라는 곳에서 놀다가 2미터 높이에서 떨어져서 기절을 한적이 있었다.

눈을 떠보니 아버지가 계셨고 나는 이내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내 큰아들이 나와 같이 자기를 바라는 맘이 이런 것일까?

나하고 자면 든든하고 하나도 무섭지가 않다고 한다.

나도 그런 경험을 그때야 한 것이다. 아버지는 기절에서 깬 나를 보시고 쾐찮냐고 물어보시고 젠 걸음으로 아무 말씀도 없이 앞장 서 가셨다.




동생과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먼 동네에 잔치나 결혼식장을 따라가고는 한적이 많았다.

그곳에 가셔서 항상 안주를 많이 드시지는 않으시고 술을 급하게 많이 마시는 것을 뵈었다.

술이 세신 편은 아니었는데 잔도 큰 잔에다 따라 마시고는 하였다.

금새 취하시고는 아무렇게나 주무시거나 하시면 동생과 나는 인적이 드문 곳에 모셔다가 술이 깨시기를 기다리다가 가까운 곳에서 동생과 놀고는 하였다.

언젠가는 수확이 다 끝난 과수원에 갔다가 그 곳에서 복숭아와 사과를 정말 많이 따 먹고는 하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가 원망스럽기 보다는 불쌍하다는 느낌과 안스러움이 항상 가슴을 짖누루 고는 하였다.

여름날에는 주무시는 옆에서 파리나 모기를 쫒는 것이 고작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 보다는 항상 밑의 남동생을 예뻐 하셨다.

오죽했으면 네 동생 변이나 햟아 먹으라고 농을 하셨을까...

그 당시 동생이 잘하긴 잘 했다. 손재주도 좋았고 나름 데로 똑똑한 동생 녀석이었다.



어느 겨울날 저녁 먹다가 내가 밥투정을 부렸는지 아버지가 식사를 하시다가 말고는 그만 먹고 가라고 하신 적이 있다.

눈물이 나도록 배도 고프고 서러웠는데 저녁 늦게 아버지께서 라면 한 봉지를 주시면서 끓여먹으라고 주셨다.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는지 그리고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그 라면이 지금도 기억이 나지만 아마 킹라면 이었을 것이다...

그때 만큼 라면을 맛있게 끓여먹었던 기억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중학교때의 일 일 것이다.

형은 고등학생으로 성숙한 나이 일 때였다.

어느 토요일저녁에 아버지와 형이 심하게 다투었다.

형은 아버지를 지서에 고발한다고 하는 것이엇다.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를 고발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것인가.   아버지가 심하게 하셨던 형의 기분은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되는 일이 있고 되지 않는 일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안되는 것이다.

니어카에 아버지를 태우고 가는 도중 나는 형에게 짱돌을 찍어서라도 말려야 된다는 심정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일이 잘 해결되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때  정말 큰 사고를 쳐버린 일이 있었다.




이제 취업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사고를 저질러 버렸다.

친구들과 중앙시장에서 술을 마시고 혼자 귀가하는 도중 누군가에게 전화을 하였다.

어떤 격한 감정에 전화통화을 한후 주먹으로 유리창을 쳐버렷다.

그 강한 유리창이 박살이 나기는 커녕 그대로 무슨 일이 있냐는 듯이 붙어 있엇다.

수화기로 내리쳤다.

와장창하고 부서져버렸다.

그리고 나는 걸어서 나왔다. 순간 욕설과 함게 중년의 남자가 내 허리띠를 잡아 버렸다.

힘을 전혀 쓸 수가 없었다.

           

들었던 생각은 그저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집에 전화해서 물어 주겠노라 하고 전화하는 시늉을 하다가 잽다 달리기 시작했다.

당시 아디다스 슬리퍼가 유행이었는데 죽기 살기로 뛰엇는데 속도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뒤에서는 저놈 잡아라 하고 뛰어오지  막다른 길에서 나는 간다는 것이 친구 자취방으로 가버린 것이다. 숨어 버리면서 친구가 하는 말이 무조건 취한 척 하라는 말에 나는 취한 척 해버렸다. 이어서 경찰을 대동하고 그 문제의 자동차 주인이 온 것이다.




나는 내일 파출소로 출두하라는 소리을 들었다.

다음날 출두하여 들으니 견적이 80만원 가까이 나왔다는 것이다.

일이 바쁘고 돈이 있으실리 없는 부모님게 차마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고 나는 일단 무대포롤 기다려보자 하다가 저녁무렵 경찰서로 연행이 되버렸다.




경찰서에서 조서를 되는데 몇장에서 수십장으로 불어났다.

여러 가지 죄목이 붙기 시작한 것이 이 즈음 이다.

결국 시골에 게신 아버지께 전화를 드리게 되었다.

정말 너무 죄송한 전화엿다. 전화를 받으신 아버지는 알겠노라며 금방 갈터이니 기다리라고 하셧다.

유치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철장에 갇히노라니 마음이 그리 참담할 수가 없다.

밤이 깊을 수록 부모님은 오시질 않으셨다.




아침 일찍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오셨다.

밤에 도착했는데 면회를 시켜주지 않아서 여관에서 자고 이렇게 아침에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너무 죄송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든든하고 힘이 되었다.

아버지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하셨고 어떻게든 일이 잘 해결되길 바라고 계셨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아고 차만 고쳐주는 문제를 떠나서 기물 파손, 폭력등 공공 등등 많은 죄목이 붙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천재일우 인지 정말 좋은 형사과장님을 만나서인지 서류를 흟어보시고서는 어린 학생에게 너무 일방적이라고 하시면서 이리저리 알아보시더니 그 차가 요즘 멀로 하면 대포차로 공중에 든 차였던 것이다.




그 차주가 반 건달이었다.

왜려 상황이 역전이 되어서 그 사람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정말 너무 좋은 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니면 정말 유치장에 갈 것 인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아버지께서 공중전화 다 교체 해 주시고 여러 훈방에 대한 서류를 꾸미고 나는 24시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 것 이다.




부모님과 자취방에 돌아오자 친구녀석들의 어지러운 술과 담배공초들을 치우었다.

나쁜 녀석들... 어찌 저리도 생각이 없는지.




어버지께서 방에 앉으시자마자 돈을 주시면서 막걸리와 두부를 사오라고 하셨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다리 하나 부러질 정도로 맞나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에서 막걸리를 사와서 아버지께 한잔 따라 드렸다.

정말 가슴이 조마 조마 한 시간이엇다. 내가 저지른 실수로 인하여 부모님께 힘들게 했고 돈과 바쁘신 시간은 누가 변명하는가 말이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래 남자라면 한번은 그럴 수다 있는 것이다.

아버지가 한마디도 안하마   내일 못자리 벼농사 준비해야 하니까 아침 일찍 내려오거라  하는 말씀이셨다.  나는 차마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께서 당하신 그 수모와 여러 일들에 대해서는 일언바구도 없으시고 자식을 위하여 ....

다음날 나는 일찍 내려갔다.







그리 한 참후 나는 아버지와 같이 군산을 가게 되었다.

그일로 인하여 검찰청에 가서 검사앞에서 반성문 비숫한 것을 써야 하기에 아버지와 함게 군산을 일찍 가게 된 것이다.

정말 죄송한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검사 앞에서 연신 고개를 숙여셨고  여러 서루에 다시는 이런일을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는 사과문을 작성하셧다.




일을 마친후 아버지와 군산터미널에 같이 가게 되었다.

슈퍼에서 소주 한 병과 찐 계란을 사신 아버지는 종이컵 가득 소주를 따르시고는 쉬지 않고 잔을 비우셨다. 그리고 아들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거라.

한 대 맞거나 욕을 들었으면 더 서러웠을 것을 아버지는 특별한 말씀이 없으셨다.

남은 소주를 다 드시고는 계란을 드셨다.

아버지는 전주행 나는이리행을 끊어 주시면서 잘 들어가거라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너무도 안되어 보이고 죄송한 마음이 한이 없었다.

그렇게 차장가에서 아버지를 배웅하고는 아버지가 타신 차를 멀어질때가지 보고만 있는 자식의 심정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는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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