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하는 사회 - 우리는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
볼프강 라인하르트 지음, 김현정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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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음모론의 신봉자는 아니지만, 사실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은 조작되어 있고 포장되어 있으며 오해되고 있다. 거짓말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진실이 아닌것' 이라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거짓말 속에 둘러싸여 사는 셈이다. 이 책 <거짓말 하는 사회>는 우리를 둘러싼 거짓말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논하기 시작한다. 

논의는 여러 분야에 걸쳐 진행된다. 정치, 경제, 미디어, 일상생활, 심지어는 학문까지도!  각 영역에서 일어나는 거짓말은 명시적으로 진실에 반하는 것을 말함 뿐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은폐하거나, 소극적으로 일부러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거나, 사실 그대로의 어떤 면을 부각시키거나 혹은 없는 부분들을 덧붙이거나, 여러 종류의 포장으로서 그 본질의 오도를 유도하는 것이 포함된다. 예를 들어, 현대 민주주의 정치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민주권주의라는 것은 현대와 같이 거대국가 하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말뿐인 환상에 불과하고, 통계는 숫자에 대한 우리의 맹신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교묘하게 조작될 수 있으며 (본문에 나오는 네덜란드의 실업률 통계가 대표적인 예이다) 광고를 비롯 각종 영상매체를 쏟아내는 미디어는 거대한 거짓말 생산처이고, 학문적 주장에 따르는 근거는 일부 사실을 누락시키거나 해석을 달리함으로서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 심지어는 우리가 가볍게 나누는 인사마저도 거짓일 경우가 많다. '잘 지내십니까?'라는 인사에 '잘 지냅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 중에서 얼마나 되는 사람이 정말로 잘 지내고 있어 그리 대답하겠는가? 대부분은 잘 지내고 있지 않아도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할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렇게 말하니 마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란 거짓말로 굴러가는 거대한 거짓의 합체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저자의 주장도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거짓의 실체를 아낌없이 밝혀내던 저자는 그 질문에 대답하며 자신의 본래 의도를 마지막 장에 가서야 드러내는데. 그는 '눈을 뜨고 진실만을 추구하라'는 어쩌면 종교적일 수도 있고 또는 선동적일 수도 있는 결론을 맺는 대신, 진리와 거짓을 비교하며 특히 거짓말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과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에 시선을 돌린다. 거짓에서의 완벽한 탈피를 꿈꾸기 보다는 진실과 거짓의 조화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의 해악들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거짓에 대한 주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드러난다. (정확한 문구는 아니다)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거짓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다. 그럼으로서 거짓을 제거할 수 있다.'

저자의 이와 같은 태도는 진리를 찾아내기 위하여 진리 아닌 것을 밝혀내는 것이 철학의 과제라는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를 찾아내기 위하여 거짓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하는가? 

책 자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흥미진진한 구석을 많이 포함하고 있고 실례를 많이 들고 있지만 동시에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우선 한국의 독자로서 잘 알지 못하는 현재 독일과 유럽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예로 들고 있는데다 , 다소 이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논의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각주로 처리가 되어 있지만, 특히 마지막 장의 경우에 어느정도 배경지식이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결론이 다소 모범답안스럽게 또 너무 조심스럽게 표현되어 있는 점이 아쉽지만, 어떤 부분의 지적은 꽤 날카롭다. 특히 현대 국민주권과 민주주의 사상의 환상에 대한 논의는 평소 나의 생각과도 어느 정도 일치되면서 나의 생각보다 물론 훨씬 더 정리가 잘 되어 있어 무척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 같은데, 이 책은 거대조직의 음모론을 이야기하거나 소리높여 개선 혹은 혁명을 요구하는 책은 결코 아니며 이 책은 그런 점이 한계이지만 또한 장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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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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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대한 환상을 벗기려는 시도는 이제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탈근대,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재 대부분의 학문에 있어 중심 주제 중의 하나이며, 이는 단순히 새로운 사조가 아니라 각 학문이 가지고 있는 근대성에서 비롯된 모순과 문제점을 시정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마치 근대성이 전근대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과 수정을 시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특히 우리에게 있어 근대와 근대성은 서구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닌다. 바로 우리에게 있어 근대는 획득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며, 아니 일제침략 시대와 그 전후를 통하여 '강요되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몇몇 근대적 가치관과 근대적 상황은 희망인 동시에 억압이었으며, 식민지 수탈은 우리의 근대가 지니고 있던 다소의 희망마저 절망으로 바꾸어 버렸다. 일제패망과 함께 맞이한 해방 이후 역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의 근대성을 획득한 적이 없다. 일제침략 동안 억압과 수탈의 수단으로 강요되었던 근대적 가치관이 해방후에도 왜곡된 형태 그대로 고착되는 동시에,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문화에 대한 무비판적 모방까지 덧대어지면서  우리에게 우리자신의 근대성은 백일몽처럼 흐릿하기만 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 근대와 근대성을 살피는 일은 서구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에게 근대는 외부로부터 강요된 목표였으며, 그래서 아픔이었지만 동시에 희망이기도 했다. 우리의 근대성에 대한 추구는 고도의 경제성장등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성공적인 우리의 모습을 가능케한 동력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또한, 탈근대에 대해 논의하는 일 역시 우리에게 나름의 의미를 가질 터이다.

'나비와 전사'란 다소 시적이기까지 한 제목을 단 이 책은 바로, 그런 지평에서 우리의 근대와 탈근대를 논하고자 한 책이다. 특히 우리에게 근대성이란 화두가 여러 종류의 의미를 띄고 다가왔던 개화기 시절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삼고, 그 대척점에 현대의 것이 아닌 근대 이전의 텍스트를 두고 있다.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무척 인상 깊다. 우리에게 근대가 특별한 만큼, 근대 이전 아니 근대와 현대에서 근대 이전을 보고 있는 눈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근대화를 부르짖은 사람들이 근대이전의 상태에 대해 비판적 논조를 취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의 근대 이전은 그를 넘어 식민지 시대 동안과 그 이후 왜곡되고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많은 것들을 잃었고, 그 중 어떤 것들은 분명 우리가 지금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근대 이전을 복권하는 일은 우리가 근대의 어떤 모순들을 탈피하는 출발점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 이 책의 그러한 시도는 성공적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기독교와 근대화의 연결점을 살피는 부분과, 소월과 만해의 '여성-되기'에 대해 논하고 있는 부분은 흥미로운 주제만큼이나 인상적인 전개와 결론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저자의 글쓰기가 그런 장점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저자의 유머스러우면서도 가볍지 않은 글투는 그 자체만으로도 재미있어서 손에 놓기 싫을 정도였다. 어려울 수도 있는 화두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는 저자의 능력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렇지만 후반부, 특히 근대가 우리의 몸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논한 부분은 다소 집중하기 어려웠다. 저자의 전체적인 논조가 근대 이전의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려는 쪽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너무나 근대 이전의 것으로 기울었다 싶다. 내 자신이 근대의 의학적 사고에 푹 젖은 현대인인 탓도 있겠지만, 근대 의학이 우리의 근대에 미친 영향 보다는 근대 이전의 의학을 소개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 데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근대 이전의 재발견이 근대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부의 문제가 아닐테고, 근대 이전 또한 그 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한 쪽에 대한 소개와 옹호만큼이나 근대와 근대 이전을 조화롭게 보려는 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었고, 그 점이 아쉬웠다. 이 부분이 이 책 전체의 이미지나 주제와 다소 맞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런 아쉬움이 더욱 크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의 첨부파일은 솔직히 조금 난해했고, 덕분에 앞부분과 같이 빠져들어 읽기는 어려웠다. 앞부분의 주제와는 다소 동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연암과 다산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다. 나도 근대의 잘못된 것들에 꽤 젖어있었던 모양이다. 나 자신도 내 안의 왜곡된 근대성을 탈피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s : 별은 정확히 말하자면 세 개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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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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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 한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소년은 곧 응급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응급실 담당의사가 그 소년을 보더니, 놀라서 외쳤다. "내 아들이에요!" 어찌된 일일까?

추리소설은 탐정역과 범인의 싸움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책 밖에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은 바로 작가와 독자이다. 그 주제의식이나 목적은 수 가지일 수 있어도, 추리소설의 외피를 입은 소설들을 읽는 재미의 상당부분은 작가가 내놓은 기상천외한 트릭을 푸는 데 있을 것이다. 추리의 형식이 잘 쓰였으면 쓰였을수록 독자는 작가가 낸 문제게 쉽게 빠져들어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는, 보통의 경쟁자들과는 달리, 자신이 승리하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더더욱 능동적이고 더더욱 이기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는 한 번도 추리소설의 작가가 되어 본 적이 없지만, 작가들의 고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좋은 추리소설 작가들은 대개 독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상천외한 트릭을 고안하고, 명쾌하고도 창조적인 해결책을 내어 놓는다. 여기서 트릭은 물리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정신적인 영역의 문제인 경우도 있다. 또한 대개의 트릭은 책 속에 위치하지만, 가끔은 책 밖에 숨은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 작가는 탐정이라는 좋은 방패막을 어느정도 포기하고 독자와 정면대결하는 셈이다. 그래서 위험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무척 인상적으로 독자들 각자의 마음에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나'라는 독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책이다. 책 속에서, 그리고 책 밖에서.  진짜 놀라운 것은, 패전의 원인은 바로 내 자신에 있었다는 점이다. 내 속에 존재하는편견과, 인식의 구멍. 작가는 정말 교묘한 솜씨로 이 둘을 조종하고 이용한다. 작가가 어떤 정보들을 누락시킴으로서 독자와의 싸움에서 무기평등의 원칙을 어기고 있다는 느낌이 살짝 들지만, 내가 손에 쥔 칼의 끝을 바로 내 자신에게 돌려버리는 그 교묘한 솜씨에는 입 딱 닫고 백기를 흔들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더 이상 이야기하다가는, 책의 반전에 대한 힌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추리소설 리뷰는 이것이 힘들다.) 그리고 또한, 반전의 예측에 전력을 다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작가가 책 속에 만들어놓은 이야기 역시 매혹적일 정도로 탄탄하기 때문에 그 재미를 놓치기는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또 책의 내용 자체가 그 속의 재미를 따라가야 책 밖의 재미도 만끽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편안한 마음으로,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작가가 만들어놓은 반전과 그 속에 숨은 자신의 인식의 구멍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때로는 나처럼 책을 두 번 읽는 수고, 아니 재미도 마다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영향이 엿보이는 내용 자체가 주는 재미나 깨달음도 크기 때문에 미스테리의 해결에 집착하느라 그것을 잃는 일 또한 아깝다. 특히 서양의 스릴러물에 비교해 볼 때,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들에서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소설 역시 그렇다. 이 소설에서 탐정과 대결하게 되는 외로운 노인들을 현혹시켜 의료기기나 건강식품등을 비싼 값에 팔아먹는 사기꾼 조직은 우리 나라에서도 현실로 존재하며, 그들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여러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처한 비슷한 현실이 소설을 읽는 내내 오버랩되어, 단순히 범죄를 추적하고 범인을 쫓는 것을 넘어서 주인공과 함께 분노하고 작가와 함께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작가가 숨겨놓은 '회심의 반전'은, 단순히 독자에게 뒷통수 맞은 재미를 선사하는 걸 넘어서 책 속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독자의 마음에 각인시키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몇 번을 생각해봐도, 참으로 대단한 솜씨라 아니 할 수 없다.

나는 간만에, 작가에에 완전히 졌다. 그리고 동시에 졌기 때문에, 무척 기분이 좋다. 독자로서 좋은 책을 만난다는 것, 특히 추리소설 독자로서 좋은 속임수를 만난다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다. 솔직히 처음엔 내 편견을 뻔뻔히 이용하는 작가가 밉기도 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좋은 '한 판'이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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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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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삼월은 붉은 구렁을'  난해한 것도 같고 단순히 말이 안 되는 듯도 싶은 제목부터 심상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내용에 대한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킬 것 같으면서도, 정작 미루어 짐작해 보려 하면 비눗방울처럼 손에 잡히지 않고 툭, 터져버린다. 단순히 멋을 부리고 있는 제목일 지도 모르고 불가의 선문답처럼 뭔가 심오한 내용을 담은 종류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그 제목이 머리속에 달라붙어 도저히 떨어져 나가려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때문에,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두근거리림을 안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두근거림은 당연히 '이 책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에 대한 것이었고.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런 면에서만 보면 나의 기대는 조금 어긋났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책은 읽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종류가 아니라,.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 , 나아가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좋은 이야기에 대한 탐구라는 표현보다는, 이 책에 나온 기발한(또한 마음에 쏙 드는) 말처럼, '이야기가 열리는 나무'를 찾기 위한 여행이 아닌가 싶다. 뚜렷한 계획은 없지만 특별히 좌충우돌하지도 않는, 마치 며칠 동안의 긴 산책과도 같은 그런 여행 말이다.

그 여행은 네 파트로 나눠진다. 첫번째 파트는 존재하지 않는 책을 찾는 이야기이다. 즉, '쓰인 이야기'에 관한 야기인 것이다. 때문인지 이 파트에서는 독서의 여러 방향들이나 경향들에 대한 거칠거칠하지만 뼈있는 이야기들이 오고가고, 덕분에 직접적으로 작가가 등장한다고도 볼 수 있을 마지막 파트보다 오히려 더 작가의 목소리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파트였다.  

그리고, 흥미진진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마지막 까지 잃지 않는 첫번째 이야기는 바로 그 '존재하지 않는 책'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즉 '쓰였던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번째 이야기와 두번째 이야기는 환상의 책 <<삼월은 붉은 구렁을>>와 관련을 맺고 있어 세번째 파트나 네번째 파트에 비해 이질감이 덜한 편이고, 여행을 해나가면서 미스테리를 풀어간다는 구조의 힘을 빌어 가장 빠져들듯이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이 파트에 등장하는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관한 이야기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게 남은 구절들을 쏟아낸다. 리뷰의 제목으로 삼은 '이야기가 열리는 나무'라는 표현을 비롯해서.

세번째 파트는, 처음엔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로 분위기와 내용이 달라져 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란 환상의 책과 연관을 맺고 있는 첫번째 두번째 파트와는 동떨어져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이러한 동떨어짐은 표면적으로만 그러하다는 점을, 마지막에 가서야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세번째 파트는 '쓸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란 제목은 단순히 책속에 등장하는 책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서부터 <삼월은 붉은 구렁을>만의 개성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의 소설처럼 단순히 잘 쓴 이야기를 내놓은 것이 아니라, 잘 쓴 이야기를 찾기 위한 여행을 하는 과정중에 있는 소설이라는 점을 느낀 것도 바로 여기서부터였다.

그런 느낌은 네번째 파트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네번째 파트에 자의적으로 이름을 붙이자면 '쓰고 있는 이야기'라 하고 싶다. 이 파트에는 작가가 직접 등장하여, 책 '밖의' 책 <삼월은 붉은 구렁을>을 쓰는 과정을 보여주거나, 전혀 다른 내용의 쓸 이야기를 펼쳐놓는다거나(역자의 글을 읽어보니, 실제로 이 이야기는 이 책에 등장하는 다른 이야기들과 함께 별도의 소설로 되었다고 한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 소설에서 내가 덜 다듬어진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면, 바로 이 파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거칠거칠한 감촉은 마치 처음엔 별 맛이 없다가도 씹으면 씹을수록 단물이 배어나오는 음식과도 같다. 이 소설과 비슷하게 '소설을 쓴다는 것' 혹은 '이야기를 찾는다는 것'을 표현했다고 생각되는 소설 중에 폴 오스터의 <신탁의 밤>이 있었다. 이 소설 중에 등장하는 소설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에 비해 잘 다듬어져 있고, 꽤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덕분에 나는 이 소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바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의 미완성이 내 비위를 건드렸던 것이었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가장 잘 어울렸을지도 모르는  '미완성'이란 선택은 어쩌면 그 반질반질함 때문에 '이야기 안의 이야기'에 나를 집착하게끔 만들었고 결국 작가의 뜻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납득은 하지 못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런 점을 깨닫게 되어 <신탁의 밤>을 다시 보게끔 만든 것은 바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힘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별 하나를 제외하기로 하였다. 반 개의 별은 마지막 파트의 진행이 다소 산만하고 때로는 불성실하게 다가온 것에 대한 '감점'이다. 미스테리 소설을 좋아하는 만큼 '결말'에 집착하는 개인적인 성향이 영향을 미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반 개의 별은 책 밖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 즉 온다 리쿠의 다른 소설들의 자리이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란 소설은 결국 한 사람의 작가로서 온다 리쿠가 세워놓은 계획서 같은 소설이고 결국 나는 시쳇말로 '낚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뭐, 이 정도로 괜찮은 낚시질이라면 한 번쯤 낚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 '낚시의 정당성'에 대한 평가는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이 작가의 '앞으로'를 언제나 그렇듯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따라가면서 내려도 늦지는 않을 것 같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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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묘촌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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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묘촌'을 소개하는 매체들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꼭 언급하는 사실이 있다. '킨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많이 영상화 된 작품' '세 번의 영화, 여섯번의 드라마로 만들어진...' 단순한 광고문구나 사실소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책을 다 읽고 받은 느낌은 "그럴만 하다"라는 것이었다.

여러번에 걸친 영상화의 이유는 물론 작품의 인기와 지명도, 그리고 작품성에 있다고 하겠지만, '팔묘촌'이 단순한 퍼즐 미스테리가 아닌 모험소설로서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는 점도 들 수 있을 것 같다. '팔묘촌'의 이러한 특성은 작품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에서부터 드러나는데, 바로 '나'라는 일인칭의 화자를 등장시켜 사건을 진행시켜가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팔묘촌의 환영받지 못하는 이방인이자, 과거의 대량살인과 현재의 연쇄살인에 모두 연관되어 있는 듯한 인물이지만, 정작 스스로는 자신과 팔묘촌에 얽힌 악연(?)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채 마치 우연이나 운명의 장난처럼 사건에 휘말려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팔묘촌을 다시 한 번 뒤흔들어놓는 살인 사건과 이 마을의 숨겨진 또 하나의 비밀 속에서 목숨의 위기를 겪거나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친애하는 우리의 명탐정 킨다이치 코우스케는 조연의 한 사람으로서 바람처럼 나타나 머리를 북북 긁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잠깐 늘어놓은 다음, 다시 홀연히 사라질 뿐이다. 모든 것이 설명되는 후반부에서도 그의 활약은 크지 않아, 명탐정의 활약을 기대했던 독자로서는 다소 김이 빠질 수도 있다. (게다가 그 명탐정 나으리는 꽤 발이 느리다... 마치 그의 외손자 킨다이치 하지메 군처럼 말이다)

하지만 킨다이치 탐정의 다소 실망스런(?)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요코미조 세이시의 또 하나의 걸작으로 추앙받는 데에는, 이 소설의 모험적인 요소가 킨다이치 코우스케의 공백을 훌륭히 메워주고 있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주인공 '나'가 본격적인 모험을 하는 부분의 묘사는 너무나 치밀하고도 독특해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동시에 시험하기도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작품이 가장 많이 영상화된 이유를 알 수 있을 듯 하다. 눈앞에 잡힐 듯이 그려지는 그 광경을 '육체의 눈'으로라도 제대로 한 번 보고 싶다라는 욕망을 느끼는 건 나 뿐만이 아닐테니.

개인적으로는 일인칭을 선택한 점이나 소설의 전개가 많은 부분 모험적인 요소에 할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통 추리물로서의 전개에도 소홀해지지 않는 점에서 요코미조 세이시의 거장적인 풍모를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추리소설 리뷰라 자세히 밝힐 수 없음이 아쉽지만, 피해자들의 관계에 관한 트릭은 기존 추리소설에서도 접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 트릭이 '현재진행형'으로서 사건에 복합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이 무척 인상깊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점은, '팔묘촌'이라는 사건의 무대였다. 지난 번에 출간되었던 요코미조 세이시의 또 다른 걸작 '옥문도'에서도 그렇지만, '팔묘촌'역시 하나의 거대한 밀실로서 작용한다. 특히, 섬이라는 물리적 밀실을 창조해냈던 '옥문도'와는 달리 '팔묘촌'은 외지와 통하는 시골 동네일 뿐이지만 '정신적인 밀실화'는 그 이상이라고 생각된다. 기존의 가치나 질서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과정 중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악몽처럼 남아있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편견에 가까운 가치들이 맞물리면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두는 자신들의 '마음의 감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소설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으스스한 분위기는 단순히 살인사건의 연속이나 소설 첫머리에 소개되는 과거의 사건에서만 연유되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갇힌'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광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도 고이면 썩고, 돌도 구르지 않으면 이끼가 끼듯이 사람의 마음도 과거나 한 가지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머물다 보면 뒤틀려 버리는 것이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특히 전쟁에 패배한 뒤의 섬나라 일본인의 뒤틀리고 무너진 정신에 '살인사건'이라는 메스를 대어 그 속을 냉정하게 해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코미조 세이시 작품의 무대는 단순히 도시보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시골 마을이나 외부와 단절된 섬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가두고 있는 감옥이며, 그는 살인 뿐만 아니라 연속되는 사건이 불러온 극한의 공포와 불신, 그리고 나아가 그런 경험 중에 어쩌면 필연적으로 맞닥뜨릴 수 밖에 없을 우리 안의 악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전통적인 퍼즐 미스테리 처럼 보임에도 그의 소설에서 거칠게 말해 어떤 '일본적인 으스스함' 혹은 사회파 미스테리 이상의 '무거운 분위기나 씁쓸한 뒷맛'을 느낄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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