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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문제 : 한 소년이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소년은 곧 응급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응급실 담당의사가 그 소년을 보더니, 놀라서 외쳤다. "내 아들이에요!" 어찌된 일일까?
추리소설은 탐정역과 범인의 싸움을 다루고 있지만, 사실 책 밖에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은 바로 작가와 독자이다. 그 주제의식이나 목적은 수 가지일 수 있어도, 추리소설의 외피를 입은 소설들을 읽는 재미의 상당부분은 작가가 내놓은 기상천외한 트릭을 푸는 데 있을 것이다. 추리의 형식이 잘 쓰였으면 쓰였을수록 독자는 작가가 낸 문제게 쉽게 빠져들어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는, 보통의 경쟁자들과는 달리, 자신이 승리하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더더욱 능동적이고 더더욱 이기는 것을 두려워한다. 나는 한 번도 추리소설의 작가가 되어 본 적이 없지만, 작가들의 고충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좋은 추리소설 작가들은 대개 독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기상천외한 트릭을 고안하고, 명쾌하고도 창조적인 해결책을 내어 놓는다. 여기서 트릭은 물리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정신적인 영역의 문제인 경우도 있다. 또한 대개의 트릭은 책 속에 위치하지만, 가끔은 책 밖에 숨은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 작가는 탐정이라는 좋은 방패막을 어느정도 포기하고 독자와 정면대결하는 셈이다. 그래서 위험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무척 인상적으로 독자들 각자의 마음에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나'라는 독자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책이다. 책 속에서, 그리고 책 밖에서. 진짜 놀라운 것은, 패전의 원인은 바로 내 자신에 있었다는 점이다. 내 속에 존재하는편견과, 인식의 구멍. 작가는 정말 교묘한 솜씨로 이 둘을 조종하고 이용한다. 작가가 어떤 정보들을 누락시킴으로서 독자와의 싸움에서 무기평등의 원칙을 어기고 있다는 느낌이 살짝 들지만, 내가 손에 쥔 칼의 끝을 바로 내 자신에게 돌려버리는 그 교묘한 솜씨에는 입 딱 닫고 백기를 흔들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더 이상 이야기하다가는, 책의 반전에 대한 힌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추리소설 리뷰는 이것이 힘들다.) 그리고 또한, 반전의 예측에 전력을 다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작가가 책 속에 만들어놓은 이야기 역시 매혹적일 정도로 탄탄하기 때문에 그 재미를 놓치기는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또 책의 내용 자체가 그 속의 재미를 따라가야 책 밖의 재미도 만끽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므로 편안한 마음으로, 거미줄처럼 촘촘히 엮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히 작가가 만들어놓은 반전과 그 속에 숨은 자신의 인식의 구멍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때로는 나처럼 책을 두 번 읽는 수고, 아니 재미도 마다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영향이 엿보이는 내용 자체가 주는 재미나 깨달음도 크기 때문에 미스테리의 해결에 집착하느라 그것을 잃는 일 또한 아깝다. 특히 서양의 스릴러물에 비교해 볼 때,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들에서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 소설 역시 그렇다. 이 소설에서 탐정과 대결하게 되는 외로운 노인들을 현혹시켜 의료기기나 건강식품등을 비싼 값에 팔아먹는 사기꾼 조직은 우리 나라에서도 현실로 존재하며, 그들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여러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때문에 우리가 처한 비슷한 현실이 소설을 읽는 내내 오버랩되어, 단순히 범죄를 추적하고 범인을 쫓는 것을 넘어서 주인공과 함께 분노하고 작가와 함께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작가가 숨겨놓은 '회심의 반전'은, 단순히 독자에게 뒷통수 맞은 재미를 선사하는 걸 넘어서 책 속 내용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독자의 마음에 각인시키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 몇 번을 생각해봐도, 참으로 대단한 솜씨라 아니 할 수 없다.
나는 간만에, 작가에에 완전히 졌다. 그리고 동시에 졌기 때문에, 무척 기분이 좋다. 독자로서 좋은 책을 만난다는 것, 특히 추리소설 독자로서 좋은 속임수를 만난다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다. 솔직히 처음엔 내 편견을 뻔뻔히 이용하는 작가가 밉기도 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좋은 '한 판'이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