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대 50 라임 청소년 문학 11
S. L. 파월 지음, 홍지연 옮김 / 라임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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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선과 악으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며 옳은 선택이란 과연 무엇인지, 혹은 옳다고 단정할 근거가 무엇인지 애매한 경우가 있다. 일례로 고기를 좋아하는 나는 채식주의자를 존경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특별한 의지와 신념을 가지고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사람에게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참으로 생각없고 야만적인 사람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내 기준에서 보자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채식주의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일 뿐이다.

 

한때 한창 이슈가 되었던 동물 실험도 나로서는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화초를 기르다 보면 가지가 너무 위로 자라기 때문에 제대로 균형이 안 잡혀서 예쁘질 않아 화원에 물어보면 가지치기를 해 줘야 한단다. 그래서 큰 맘 먹고 가지치기를 하려다 문득 깨닫는다. 과연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가지를 마음대로 잘라도 될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한 것을 뿐이지 않을까라는 생각 말이다. 이처럼 식물에 대해서도 배려(?)를 하면서 동물에 대한 것은 잘 모르겠다. 그것으로 인해 과학과 의학이 발전했기 때문에. 이것은 다분이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이라는 것도 잘 안다. 그것이 또한 내 한계라는 것도 잘 안다.

 

이 책은 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길버트가 사춘기라서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고, 그래서 사사건건 반대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길버트의 부모는 지나치게 자식을 온실 속에서만 키우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라 이 나라도 그렇구나라며. 어느 나라나 부모 자식간의 갈등은 비슷한 모양이라는 생각도 들면서.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방향은 좀 다르게 나아간다. 길버트가 순전히 반항으로 시내에 나갔다가 환경보호론자인 주드 형을 만나면서 길버트의 반항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길버트가 주드 형을 만났을 때는 공원에 있는 나무를 못 베게 하는 것이었지만 그 다음에는 동물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자 한단다. 실험실에서 고통받으며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동물들을 다음 목표로 하고 마침 길의 아버지가 그 실험실 연구원이었던 것이다. 길이 처음에는 주드 형을 돕는 일이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일이자 자신도 어떤 큰 일을 해낸다는 뿌듯함에 적극 협조하지만 마침 부모님에게 자신이 태어나게 된 경위를 듣고는 갈등한다.

 

소설은 작가가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해 가든 옳고 그른 방향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작가가 지지하는 방향은 정해져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질 수는 있지만 보편적인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길버트는 처음에 동물이 학대받으며 실험에 이용되고 있다는 주드의 이야기를 듣고 그 현장을 고발하고자 적극 가담하지만 직접 그 현장을 본 후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주드가 그 동물들을 풀어주려고 한다니까 자기 아버지가 실험하는 동물은 빼돌리려고 한다. 주드의 말대로 자기 한테 적용할 때와 남에게 적용할 때가 달랐던 것이다. 물론 주드의 말이 곧 작가의 말이기는 하지만 작가가 여기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고 생각한다. 주드의 편도, 길버트의 편도 들지 않음으로써 딜레마 상황을 잘 빠져 나갔지만 다른 실험용 동물은 사라진 반면 아버지의 쥐만 남도록 하면서 길버트의 생각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즉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내가 하는 건 괜찮고 남은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길버트의 행동들이 분명 잘못된 것이고 책임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셋은 그냥 덮고 만다. 그에 대해서는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해결책일까. 잘못을 해도 아버지가 그늘이 되어주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듯해서 영 불편했다. 길버트의 온갖 반항과 동물에 대한 일시적인 감정은 단지 가족의 화합을 위한 도구였던가. 뭐,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하지만 그것이 길버트의 변화를 이야기 하기에는 부족했다. 작가가 좀 더 소신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작가는 사회문제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가족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기 위해 제목도 이렇게 지은 것이겠지만 책이란 그 당시의 사회를 담고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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