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돌이 우리 형
존 D. 피츠제럴드 지음, 하정희 옮김, 정다희 그림 / 아롬주니어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우리네 부모 세대들이 하는 얘기가 있다. 어렵고 힘들었어도 옛날이 좋았고 그립다고. 모내기 철이 되면 품앗이를 하기 때문에 동네 모내기가 전부 끝날 때까지 근 한 달간 힘들게 일을 하고, 저녁에 늦게 돌아와서 빨래며 집안 일을 했는데도 말이다. 원래 사람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진짜 힘들었던 일을 제외하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게 기억된다지만 그립다면 몰라도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마 힘들게 일 하는 것이 좋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과 사람 사는 것처럼 지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내 기억에도 당시는 마을이 하나의 공동체처럼 느껴졌으니까. 우리 옆은 아이가 많았는데 우리 엄마가 먹을 걸 만들면 그 집 아이들이 우르르 왔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엄마는 일부러 넉넉하게 만들었었지. 마치 존의 엄마처럼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치 잃어버린 추억을 되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씌어진 연도를 보니 1967년이란다. 장소만 미국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정서는 모두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으로 풍부하진 않더라도 서로 돕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이며 아이들도 집안일을 나름대로 자기 몫의 일을 하는 것이 그렇다. 상당히 너그럽고 공정하고 아이들을 위하는 존의 엄마가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방식을 보고 내심 놀랐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당시는 모두 그랬겠지만.

 

  존이 바로 위의 형인 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이지 톰은 못말리는 개구쟁이다. 그러나 무조건 말썽만 부리는 게 아니라 아주 의로운 일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견한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면 지나치게 영악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는 게 문제다. 그러니까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는 얘끼다. 이민자인 바실리우스를 위하여 방패막이가 되어 주고, 열심히 영어를 가르쳐주고 싸움에서 이기게 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러나 사실은 바실리우스 아빠가 제안한 '돈'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껴진다. 그런 식의 사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리를 절단하고 좌절한 앤디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도 역시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뭔가 댓가를 요구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 때는 진짜로 톰이 변해서 속에서 뭔가 좋은 느낌이 일어나는 경험을 하며 개과천선하게 된다.

 

  톰이 꾀가 많고 영리하긴 하지만 그건 모두 뭔가 대가가 있을 경우에만 그렇다. 아무런 대가가 없는 경우에는 꾀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밉기도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미워할 수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존도 속은 것 같아서 항의하다가 결국 형의 설득에 넘어가서 오히려 사과를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그게 어디 존 뿐인가. 독자도 존과 같은 입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중간중간 위트가 넘친다. 처음에 바실리우스에게 삼형제의 이름을 가르쳐 주는 장면과 영어를 잘 하는 바실리우스 아버지에게 가서 이름을 제대로 말해 달라고 하는 장면, 앤디가 자살하겠다고 하자 존이 진지하게 도와주지만 결국 실패해서 오히려 존이 미안해하는 장면, 톰한테 불합리한 점을 따져보지만 형의 설득에 넘어가 사과하는 장면 등 읽으면서 혼자 비실비실 웃었다.

 

  어렵고 사는 게 힘든 시절이지만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놀며 지내는 모습이 유쾌하게 그려지는데, 문득 우리 아동문학에서 70년대를 그리는 어린이는 어떤가 생각해 본다. 대개 일하는 아이들, 힘겹게 문제를 헤쳐가는 아이들이 나오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하다가 현덕의 글에 생각이 미친다. 맞다, 현덕의 글에 나오는 노마와 기동이, 영이(이름이 맞는지 모르겠다.)가 노는 모습이 마치 톰과 존이 노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에게도 그런 작품이, 그런 작가가 있었지. 순수하게 어린이다운 이야기, 현덕의 이야기를 다시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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