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레이스키, 끝없는 방랑 푸른도서관 53
문영숙 지음 / 푸른책들 / 201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젠가부터 소설에 대한 매력을 잃었다.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소설 속으로 빠져 들었던 시기가 지나서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사회과학쪽 책(그렇다고 전문적인 책들은 아니고!)을 읽다 보니 허구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의미없게 느껴졌던 게 사실이다. 그러면서 동화는 푹 빠져 드는 자신을 보며 도대체 이유가 뭔지 스스로 의아해하곤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시기에는 소설을 읽으며 삶을 간접체험했고 아이를 키우면서는 동화를 읽으며 내 아이를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더 나아가 내 어린 시절을 만나기도 했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 허구적 요소를 꾸준히 만나고 있었던 셈이다. 이제야 소설을 읽는 이유 내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닫는다. 난 그동안 내가 납득 가능한 범주의 이야기들에만 마음을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내면에서는 비록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소설의 힘을 체험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면에서 <압록강은 흐른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책이 독일에서 엄청난 인기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엄청 기대를 갖고 읽었으나 당시 우리의 상황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들려주고 있을 뿐 새로울 게 없다고 여겨졌다. 나는 과연 소설에서 무엇을 읽길 바랐던 것일까. 새로운 기법이나 시도에 대해서는 지식이 없기에 판단할 수 없을 테고, 그냥 획기적인 뭔가를 얻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만주로 이주한 사람들의 애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문득 예전에 읽었던 단편소설(헌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기껏 땅을 농사지을 수 있게 만들어 놓았더니 빼앗는 이야기였는데)이 떠오르는 걸 보며 이런 게 바로 소설의 힘이구나 싶었다. 특히 시대적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소설의 경우 또 다른 역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리얼리즘이 이래서 필요한 것인가 보다. 그런 견지에서 보자면 <압록강은 흐른다>가 아주 소중한 소설이며 그 연장선상에서 이 책 또한 같은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러시아로 이주한 조선인(고려인)을 부르는 명칭인 까레이스키. 식민지 시절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다. 아직 풍습이나 언어는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엄밀하게 따지면 다른 나라 사람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탓할 게 아니라 그들을 잊고 사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의 잘못이 더 크다고 본다.

 

  여하튼 동화가 살고 있던 마을의 조선인을 전부 이주시키는 정책에 의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기차를 타고 가면서부터 그들의 방랑은 시작된다. 글로 간단하게 써서 그렇지 실제로 그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단순히 소설이 아니라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게 더 가슴 아프다. 게다가 아버지를 제외한 네 가족이 출발했는데 살아남은 건 동화 뿐이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 당시 모습을 그린 소설들을 보면 사람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실험하는 듯한 생각마저 든다. 그나마 동화는 기차에서 만난 태석 오빠 덕분에 의지할 곳이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푸른책들에서 나온(게다가 이 작가의 전작이기도 하다.) <에네껜 아이들>을 통해 멕시코로 이민간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알게 되었고, <우토로의 희망 노래>를 통해 일본의 우토로라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제 까레이스키들의 삶도 알게 되었다. 작가가 말하듯이 해방 이후에 아직도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만나기를 기대한다. 동화네가 러시아로 간 것은 과거의 일이지만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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