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속의 문맹자들 - 한국 공교육의 불편한 진실
엄훈 지음 / 우리교육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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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남매가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아빠 혼자 아이들을 키우고 있기 때문에 가장 걱정되는 게 '먹는' 문제일텐데 다행히 학교에서 아침을 주고 저녁까지 준다. 물론 큰 아이는 고학년이라 종일돌봄에서 제외되지만 학교측의 배려로 돌봄교실에서 아침을 먹는 것으로 알고 있다. 셋째가 이제 일학년인데 처음에 봤을 때 다들 놀란다. 키가 너무 작아서. 아무래도 먹는 게 부실하다 보니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흔히 아빠 혼자 키우는 집 아이를 보면 가장 먼저 걱정하는 부분이 먹는 것일 테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어른과의 상호작용이 부족해서 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 글을 읽을 줄 모를 뿐더러 어렸을 때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연계학습이 전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엄마나 아빠 손을 잡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 숫자를 세는 모습, 솔직히 전에는 아무 생각없이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누구다 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그 아이들을 보면서 그게 아주 중요한 '공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렸을 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아이와의 상화작용들이 실은 굉장히 의미있는 행동이었으며 차후에 영향을 많이 주는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정작 내 아이들은 다 컸을 때 알았다. 물론 나는 무의식중에 그런 행동을 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루는 1학년이 셋째 아이가 책을 빌리려고 하는데 이미 상당 기간 연체가 되어 빌릴 수가 없다. 글도 많지 않고 내용도 재미있어서 그 아이에게 딱 맞는 그림책이건만 정작 그 아이는 필요할 때 빌릴 수가 없다. 그동안 틈만 나면 책 갖고 오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건만, 책을 어디에 뒀는지 모른단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책을 빌릴 방법은 없어 보인다. 원래 처음에 글을 배울 때 흥미있어 하는 그림책을 자꾸 반복해서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거기에 있는 글자들이 유의미하게 다가오는 경험을 한 적이 있기에 내가 괜히 안타까웠다. 도저히 안 되겠기에 며칠 후에 그 아이에게 빌리고 싶어했던-사토 와키코의 <집보기>였다.-책을 선물했다. 집에서 하루에 한 번씩 꼭 읽으라는 이야기와 함께. 다음날 도서관에 오더니 다짜고짜 어제 책 읽었단다. 처음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내가 준 책을 읽었다는 얘기였다. 일단 칭찬해 주고 매일 읽으라고 다시 한번 얘기한 다음 첫째에게도 동생 책 읽는 것 좀 도와주라고 일렀다.(하지만 큰아이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 눈치다.) 방학 하기 얼마 전에 위의 그 아이가 오더니 책을 읽겠단다. 그러마고 말하고 열심히 책을 정리하고 있는데 내게 오더니 언제 읽을 거냐고 묻는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그림책을 읽자는 얘기였다. 책을 대충 정리하고 함께 앉아서 읽는데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헌데 책에 어려운 글자들이 조금 나오니까 금방 싫증을 내는 눈치였다. 그래서 서가를 돌아다니며 아이가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들어간 책 제목을 읽었다. 조금 있으니 담당 선생님이 오셔서 공부하러 가기에 여쭤봤더니 부쩍 글자에 관심이 많아졌으며 꽤 늘었다고 한다. 그럴 때 집에서 조금만 신경 써 주면 한글 익히는 건 시간문제일 텐데 참 안타까웠다. 게다가 방학이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 아닌가.

 

  세 아이는 모두 방과 후에 공부 지도를 받는다. 둘째 아이도 2학년까지 한글이 안 돼서 담당 선생님을 참 애먹였었다. 그런데 셋째 마저 한글이 안 되고 첫째는 한글은 되지만 학습 의욕이 없어서 소수 정예로 지도하는 공부방에 참여하는 실정이다. 나는 그 아이들을 볼 때마다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양육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솔직히 학교에서 지도하는 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니,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가정과 연계가 되지 않으니까 효과가 너무 미미하다. 1학년 아이의 경우 조금만 집에서 봐주면, 하루에 한 권이라도 책을 읽어주면 또래 아이들을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래도 지금 시작이니 격차를 줄이는 시간이 훨씬 줄어들 것 아닌가. 현재 1학년 아이를 그냥 방치할 경우 첫째의 전철을 밟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다행히 여기 학교에서는 그런 아이들을 어떻게든 구제하기 위해 담임 선생님이든 따로 선생님을 붙여서든, 노력을 하고 있다.

 

  다른 모든 책을 제쳐두고 이 책을 먼저 읽은 이유는 이처럼 많은 부분 공감이 되기 때문이다. 6학년이 되어도 학습의욕이 없어서 문제를 읽지도 않고 답을 체크해서 한 문제도 맞히지 못하는 아이, 학습 수준이 3학년에 머물러 있어서 넓이의 단위를 처음 보았다는 아이, 그러나 정작 부모는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환경에 처한 아이를 보며 안타까웠다. 그 아이는 책은 곧잘 읽는단다. 그런데 국어 문제를 풀지 못한다. 그야말로 해독은 되지만 독해가 되지 않는 전형적인 경우다.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중학교 가서 어떨까 걱정이다. 교실에 앉아 있지만 전혀 다른 세계에 혼자 있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을런지. 저자가 만난 창우 같은 아이가 되지는 않을런지.

 

  그림책에 빠져 살면서 그림책의 위력을 실감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그림책을 활용해서 읽기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교정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여건만 된다면 처음에 이야기한 1학년짜리 아이에게 저자가 한 것처럼 적용해 보고 싶었던 차였다. 물론 마음만 그렇지 현실은 아니지만. 아니, 언젠가는 지금 내가 구상하고 있는 방식으로 아이들과 교류하며 도움을 주고 싶다.

 

  그림책 작가 중에 페트리샤 폴라코라는 작가가 있다. 그녀의 자전적인 이야기인 <고맙습니다, 선생님>을 보면서 내용 자체에도 감동을 받았지만(그래서 읽을 때마다, 읽어 줄 때마다 울컥한다.) 그 나라의 시스템에 감탄을 한다. 주인공 트리샤가 5학년이 되어도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안 선생님이 방과 후에 따로 글을 가르치고(물론 학습의 형태가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상담의 형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독서 선생님을 따로 붙여서 읽기 지도를 하는 걸 보며 제대로 된 시스템이 가동되는구나 생각했었다. 우리도 그런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저자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로 보고 함께 해결해 나가려는 모습, 우리가 나아갈 길이 아닌가 싶다. 저자가 직접 학교 현장에서 학생과 교사들을 보고 때론 겪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하나같이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정말이지 학교 현장을 가까이에서 보니 선생님들이 공문 처리하느라 보내는 시간이 상당히 많다. 나도 어떤 때는 똑같거나 비슷한 내용을 두세 군데에서 보내라고 해서 동일한 일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비효율적인 업무 시스템 자체도 문제다. 그러나 시스템이 변하기 위해서는 인식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먼저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많다면 그것이 시작점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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