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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살의 특별한 여름 - 국제독서협회 아동 청소년상, 뉴베리 영예상
재클린 켈리 지음, 김율희 옮김 / 다른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시간은 그냥 흐를 뿐인데 우리는 거기에 커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아니, 흐르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대로 규정지어 놓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1999년과 2000년의 차이는 숫자상의 차이일 뿐 시간은 전과 다름없이 흐르는데도 전 세계가 호들갑을 떨었다. 물론 당시는 컴퓨터로 처리되는 일이 상당히 많아서 그에 대한 오류를 걱정한 것이라 해도 지구가 종말을 하네 마네하는 얘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1899년과 1900년은 어땠을까. 1999년과 2000년의 차이 정도는 아니어도 세기가 바뀌는 시기이므로 약간의 두려움은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당시 현재의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는 나라에서만 그랬겠지만). 그보다 훨씬 전, 그러니까 999년과 1000년은 현재 계산법대로만 존재하는 것이니 당시는 혼란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1899년이다. 그리고 1900년이 시작되는 날에 이야기는 끝난다. 사람들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하는 부분을 읽다 문득 2000년을 맞이하던 때의 호들갑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이제 책으로 돌아가서 캘퍼니아가 살던 시기의 미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먼저 알아봐야겠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얼마되지 않았고 대공황이 오기 전이니 그럭저럭 괜찮은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여성들은 아직 투표권이 없었고(1920년에 처음 투표권이 주어졌다고 한다.) 사회 활동이 상당히 드문 때(전화 교환원을 우러러 보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였다. 캘퍼니아의 엄마가 딸을 사교계에 진출시키고 요리와 바느질을 가르치려고 애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여자들의 최대 목표는 남편을 잘 만나서 가정을 꾸리는 것, 곧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시대에 보편적인 가치관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캘퍼니아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되기 충분하다.
남자 형제들만 있는 집의 여자 형제는 대개 천방지축이기 쉽다. 환경이 그런데다가 성향까지 그러니 누가 말리겠나. 게다가 그것을 은근히 부추기는 할아버지까지 있으니 캘퍼니아의 미래는 당연히 시대를 앞서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가정교육을 중요시하는 때였기 때문에 겉으로는 예의를 갖추는 척한다. 식사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하고, 밥 먹기 전에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며 백인 여자 아이는 절대 들일을 해서는 안 되는 등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정확히 구별되던 때였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보면 여자들이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부채질 하며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옷이 왜 그리 입고 싶던지. 그러나 그런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칼렛처럼 해야하며 때로는 기절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또한 여자가 남자의 부속품처럼 취급받던 시절이었음을 알고 차라리 지금이 낫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숙녀로 키우고 싶어하는 엄마의 바람과 달리 캘퍼니아는 들로 뛰어다니며 곤충을 채집하고 식물을 관찰한다. 그러나 시대적인 벽을 완전히 뛰어넘지는 못한 면을 볼 수 있다. 엄마가 반대할 것을 뻔히 알기에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못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을 의식해 예의바른 척한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벽을 넘고자 시도한다. 또한 할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한다. 개인적으로 캘퍼니아 같은 아이를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으로 그린 점이 의아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력이 독특하다. 의사에 변호사이면서 과학적인 이야기를 쓰다니. 사실 그래서 과학적인 부분은 약간 못미덥긴 하다. 게다가 뒤에 감사의 말에 오류가 있으면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하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개발되지 않은 대자연의 모습을 세세하게 그리고 있어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또한 등장하는 인물이 많은데도 모두 애정을 갖도록 따스한 시선으로 묘사했다. 커다란 사냥개 에이젝스까지도 나름대로 비중을 차지하니 말이다. 우리가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당시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듯 이 책도 일종의 역사동화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역사동화는 대개 피지배자가 주인공이라 아프고 울분을 토로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있는 집'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지 낭만적이다. 캘퍼니아가 차별을 받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조차 덤덤하고 심지어 재미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진보는 너무 진지하고 유머가 없다는 말이 왜 생각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