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패티의 초록 책 ㅣ 사계절 중학년문고 20
질 페이턴 월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박형동 그림 / 사계절 / 2010년 11월
평점 :
모 개그 프로그램(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익명으로 해야 뭔가 있어 보인다.)에서 '옛날에 여자들은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요즘 세대들이야 말도 안 된다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 부모 세대(이젠 이렇게 말하니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4,50대를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내가 말하는 부모 세대란 6,70대를 의미한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들은 충분히 공감할 이야기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인간적으로도 그렇고. 몇 십 년 전의 과거에 비하면 나빠진 것보다 좋아진 게 많은데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몇 십 년 후에야 지금과 완전히 다를 것 같진 않으나 몇 백 년 후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변해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꿈꾸는데 왜 자꾸만 디스토피아 쪽으로 기우는 것일까.
그러나 디스토피아처럼 보여도 약간 다르게 접근하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지구는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미지의 행성으로 떠나지만 거기서 또 다른 삶을 일구는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여기도 엄연히 신분에 따른 차별이 있어서 그저 그런 사람들은 연료도 시스템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우주선을 타고 가지만 그렇다고 그런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4년 동안 우주를 떠돌며 정착할 곳을 찾는 동안 사람들은 각자 가지고 온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딱 한 권의 책만 가지고 가라고 하니 사람들은 각자의 기준으로 소중한 책을 챙긴다. 그런데 패티는 아무것도 씌어있지 않은 초록색 책을 챙겼다. 이야기를 하도 읽어서 더 이상 흥미있는 이야기가 없을 때 사람들은 패티의 결정을 특히 아쉬워한다. 그럴 때 책 한 권이라도 더 있었으면 무료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야기가 항상 그렇듯이 '무'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때로는 새로운 출발이기도 하다. 처음은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하는 법이니까. 이제 그들이 정착한 곳에서의 이야기는 패티의 책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종이가 없었지만 그곳에서 종이를 대신할 만한 뭔가를 발견하겠지.
전혀 낯선 곳에 여러 가족이 정착하는 모습은 흡사 우리 조상들도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를 절로 연상케 했다. 바닥의 돌들이 꿈틀거리며 깨어날 때 혹시 공룡이 아닐까하는 진부한 생각도 해보았으나 역시 작가는 나처럼 진부하지 않았다. 인간의 얼굴과 비슷한 모습의 거대한 나방이라. 게다가 서로 소통을 하기도 한다. 새로운 정착지의 이름을 정할 때 가장 나이 어린 아이에게 이름을 짓도록 하는 그들은, 현명하다. 가장 순수하고 가장 맑은 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을 함께 보고자 하는 그들의 현명함에 놀랐다. 모든 사람들이 유리구슬같은 밀알을 보고 도저히 먹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지었을 때 아이들은 시도했다. 과거의 풍부한 경험이 때로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새로운 행성에서의 주역은 바로 어린이들이 아닐까. 그렇기에 이름도 어린이에게 짓도록 한 것일 테고. 유리구슬 같은 밀알이 반짝이는 밀밭과 커다란 나방 인간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모든 것이 잘 된 지금이야 아름답게 연상되지만 읽을 당시는 조마조마했다. 과연 그들이 밀을 수확할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무언가를 재배하지 않으면 정착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니까. 그나저나 후세의 인간들이 선조들은 미래를 예측하는 뛰어난 사람들이었다는 말을 하는 날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