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지 위에 평화를 그리다 - 세계의 작곡가 윤이상 우리 인물 이야기 24
김바다 지음, 이상권 그림 / 우리교육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윤이상을 알게 된 때는 그가 타계하기 전이었다. 모 시사주간지에서 그가 죽기 전에 고향을 방문하고 싶어한다는 기사와 함께 그에 대한 개략적인 이야기가 실렸다. 작곡가라면 당연히 유럽인들을 떠올리는데 그런 가운데 한국인이 있다니 신기했다. 그러나 더욱 놀랐던 사실은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윤이상이라는 인물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외국에서는 대단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정작 본인의 나라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사람이 비단 윤이상만은 아니겠지만, 이데올로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다. 윤이상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다가 갑론을박 끝에 입국을 허락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너무 노쇠해서 장거리 여행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가 타계해서 안타깝다는 마음에 앞서 모든 잣대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사람들에 대해 화가 났다. 지금은 윤이상의 이름을 딴 상도 있고 그가 어렸을 때 살았던 통영에서 음악제도 열리는 등 그를 기리는 행사가 많이 열리는 걸 보며 진작 좀 그렇게 관심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윤이상(1917~1995)은 완고한 아버지 때문에 처음에는 서당에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나중에서야 보통학교에 다니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처음 풍금소리에 반해 음악과 인연을 맺었단다. 풍금소리를 듣고 반한다고 모두 음악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소리가 윤이상을 음악의 길로 가게 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서양의 문화가 싫어서 아들을 서당에 보낼 정도로 한국적인 것을 중시했던 그의 아버지가 풍금과 바이올린을 배우도록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까지 가서 음악이론을 배우고 통영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윤이상이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 유학을 간 때는 결혼 후다. 사십의 나이(1956년)에 가족을 한국에 두고 혼자 독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독일에서 성실하게 공부를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북한을 다녀왔다는 사실 때문에 납치되다시피 본국으로 송환되어 고문을 받았다. 사실 마지막으로 고국을 돌아보고 싶어한 윤이상의 귀국 허가를 내주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남한, 북한이 아니라 한국으로 존재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봐주지 않았다. 시대적인 상황이 그렇기도 했다면 조금 위안이 될까. 

어린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펴낸 책이라 윤이상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한국(남한이 아닌)에 대한 사랑을 엿보기에는 충분하다. 무조건 한국적인 것만을 고수하기 보다 어울림을 지향하되 한국적인 맛을 살리는 것이 바로 윤이상이 추구하던 음악이 아니었을까 싶다. 조금 있으면(2010년 9월 12일) '2010 윤이상 콘서트'가 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고 한다. 윤이상의 삶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았지만 그의 음악은 잘 모른다. 이 기회에 윤이상의 음악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지. 선선한 가을에, 20세기를 대표하는 다섯 명의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윤이상의 음악을 듣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언젠가는 윤이상 평전을 한번 읽어봐야겠다. 분명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노력, 재능에 감탄하기 보다 시대적 상황과 우리의 정치적 상황에 분개할지라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