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험 왕 커드
앨런 길리랜드 지음, 김율희 옮김 / 다른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다른 때보다 특히 이럴 때 영어를 잘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동화책 이야기하는데 웬 영어 타령이냐고? 만약 이 책을 원서로 읽으면 번역된 것보다 훨씬 맛이 살지 않을까 해서 하는 얘기다. 한 권의 책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문화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기도 했다. 분명 이게 언어유희 같긴 한데 옮긴이의 설명으로는 아주 세세한 느낌까지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원서로 읽으면 어떨까를 내내 생각했다. 또 하나. 이 책을 읽다가 그동안 대충 읽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다시 읽었다. 둘이 뭔가 비슷한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이 책은 어른의 기준으로 보면 객관적으로 설명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 아니, 하나 있긴 하다. 엄마와 쌍둥이 형제에 관한 이야기. 그 외에는 모두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은근히 매력있다. 내용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헨리와 헨리에타의 장난감 인형들이 브로치를 찾으러 가는 도중 만나는 갖가지 모험담이다. 헌데 넷이 함께 떠나지만 그 안에서 패가 나뉜다. 하지만 흔히 생각하듯 그러한 갈등은 나오지 않는다. 이들의 관계를 보면 끈끈한 정이 있는 듯하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쿨하다.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스위니와 오플래터리가 대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사실을 알았을 때 기존의 대장과 한판 승부가 벌어지리라 예상하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다. 커드의 경우 배신감을 느낄 법도 한데 그런 기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필그림은 정확히 중간에서 상황을 잘 조율하는데 그 능력이 대단하다.
서로의 이야기가 약간씩 어긋나지만 그러다 어느 순간은 만나는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도대체 얘네들이 이러다 브로치를 찾으러 갈 수는 있을까 잔뜩 걱정하게 만든다. 그러나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듯이 우연히 간 길이 제대로 간 길이고, 수수께끼 내기에 휘말렸어도 어찌어찌 하다보니 정답을 맞췄단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게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진짜 수수께끼를 못 푼 것인지. 하지만 이러한 것을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작위적인 게 아니라 풍자와 위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의 속성을 은근히 꼬집는다. 갑옷을 벗은 미노보어는 아기에 불과하지만 갑옷을 입고 자신의 정체를 숨겼을 때는 무시무시한 미노보어로 돌변한다. 가면을 썼을 때와 벗었을 때의 상반된 모습은 가면 뒤에 숨어서 악한 짓을 하고자 하는 인간을 그린 듯하다. 그 밖에도 풍자와 위트가 많이 나온다. 오죽했으면 원서에는 뭐라고 써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고 싶었을까.
벌루나퍼스는 또 어떻고. 분명 달이라고 했는데 이들 모험에 합류할 때 보면 절대 달이 아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풍선이다. 하긴 등장인물 소개에서 연못에 빠진 달 그림자가 열기구로 떠올랐다니 달은 아닌가 보다. 객관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책을 읽다 보면 그냥 다 이해가 간다. 그런데 벌루나퍼스가 하는 이야기도 상당히 재치있다.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상당히 많은 의미가 숨겨 있곤 한다. 여기서는 올드 코비가 가장 못된 역인데 그렇다고 아주 나쁘게 생각되지 않는다. 스위니와 오플래터리를 몰래 꾀는 장면에서는 교활하게 느껴지지만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원래 성격이 그래서인지 판타지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정신없는 이 책을 읽으니 처음에는 더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정리도 되지 않아 헷갈렸다. 그러나 읽다 보니 언어유희가 상당하고 재치가 있어서 은근한 매력이 느껴졌다. 아쉬운 점이라면 우리는 이런 식의 풍자와 유머에 익숙하지 않고, 이 나라의 문화와 언어습관을 잘 모르기 때문에 풍자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가끔 있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