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 농장의 노예, 엠마 이야기
줄리어스 레스터 지음, 김중철 옮김, 김세희 그림 / 검둥소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작가를 보는 순간 알았다. 앗, 이 작가는 인권 문제, 특히 흑인들의 인권 문제에 대한 책을 주로 썼던 작가잖아. 그렇다. 전작인 <자유의 길>에서도 <인종 이야기를 해볼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천착하는 문제는 바로 인권이었다. 인종이 다르다고 본질까지 다르진 않다는 것을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비록 아직도 완전한 성공을 거두진 못했더라도. 

이 책은 어린이 책에서는 드물게(사실 어른을 대상으로 하는 책에서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시나리오로 되어 있다. 다른 면에서는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나도 이런 부분에서는 보수적이 된다. 주로 보았던 소설 형식이 아니라서 선뜻 내용에 빠져들지 못할 것 같았다는 얘기다. 새로운 형식을 일단 배척하는 보수적인 생각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그러나 웬걸. 읽으면서 대사는 그냥 일반 소설(동화)의 대화문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중간중간 등장인물의 입으로 서술되는 부분이 있어 극본이라는 생각이 훨씬 덜 들었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이건 그냥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막연히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노예 경매를 자세하게 묘사하는 장면도 그렇고 일일이 사건을 나열하는 부분에서도 그랬다. 뒤에 작가의 말에서 밝히듯이 1859년에 있었던 미국 역사상 최대의 노예 경매를 기록한 논문이나 책에서 상당부분 차용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사실과 허구가 혼합되어 있지만 주요 인물은 사실에 가깝다. 이야기를 읽으며 느꼈던 것들보다 뒤에 작가의 말이 더 흥미진진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엠마는 비교적 마음씨가 좋았던 주인 덕분에 고생을 덜 하며 지냈지만 예고도 없이 주인이 자신을 팔아버리고 만다. 덕분에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엠마가 캐나다로 도망 가서 정착한 후에 자신의 이야기를 손녀에게 들려준 것이 바로 버틀러 농장의 노예 이야기다. 노예 제도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제도지만 당시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제도였다. 그렇다면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나중엔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이었다고 회고될 만한 일은 없을까. 분명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거기까지 생각이 나아가는 것이 바로 작가가 원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다시(종종 들었던 생각인데 리뷰를 쓸 때는 까맣게 잊곤 했다.) 든다. 유럽의 소설들, 그러니까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르는 책들을 보면 대부분 지배계급의 이야기다. 그 당시에 그들에게 수많은 하인들이 있었지만 하인들의 고뇌를 다루거나 힘든 삶을 다룬 이야기가 있었던가 싶다. 그들의 책 속에는 하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더라도 단순히 자신들의 삶을 지속시켜 주는 하나의 도구로 존재할 뿐이다. 비록 미국에 있었던 노예와 유럽에 있었던 하인을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유럽인들에게서 피지배계급의 고통을 외면한 자신들의 잘못을 이야기하는 책은 아직 못 만났다(그래서 톨스토이가 더 위대해 보인다. 톨스토이는 비록 자신들의 잘못된 행동을 이야기한다기 보다 피지배계급의 힘든 삶을 보여주긴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존재하지만(당연히 그럴 것이다!) 협소한 내 지식의 한계 때문에 못 만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그동안 서구의 고전을 읽으며 들었던 의문이 문득 생각나서 연관 없는 리뷰에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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