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네껜 아이들 푸른도서관 33
문영숙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에네껜이 뭘까. 몇 년 전에 멕시코 이주민의 삶을 다룬 방송이 있었다는데 그걸 보지 못했기에 에네껜의 뜻을 몰랐다. 원래 에네껜은 용설란에 속하는 식물인데 멕시코로 이주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겉표지에 있는 사진 속 식물이 바로 에네껜인가 보다. 마치 알로에처럼 생겼다. 가시에 찍혀서 상처투성이였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대충 짐작이 간다.(책에서는 에네껜이라는 말이 잠깐 나오다가 줄곧 어저귀로 나온다.) 

살고 있는 땅에서는 희망이 없어서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이민. 그렇게 떠난 이민이 장밋빛이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게다가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그것도 속아서 떠난 이민이라면 더욱 더 비참할 것이다. 그럴 듯한 광고에 속아 있는 돈 없는 돈 모아 뱃삯을 마련해서 떠나지만 노예나 다름없다는 것을 도착해서야 안다. 더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들이 팔려가다시피 했다는 것조차 현지에 도착해서야 알게 되는 것이다. 하긴 글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거기에 걸맞는 속임수를 썼으니 꼭 글을 몰라서 당했다고 볼 수는 없겠다.

이렇듯 고향을 떠난 사람들에게 멕시코에서의 비참한 생활이 시작된다. 새벽 네 시부터 밤 늦게까지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돈도 벌지 못한다. 아니, 버는 건 고사하고 빚이나 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이미 떠나올 때 이런저런 경비가 빚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비단 100여년 전에만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가끔 지금도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이와 비슷하다. 그리고 그들이 현지(즉 우리나라)에서 겪는 고통 또한 그 옛날의 그것과 비슷하다.

역사는 과거를 거울 삼아 조금씩 나아간다고 했던가. 만약 과거에 우리가 겪었던 것에 대해서 억울해하고 안타까워 하면서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결코 제대로 역사를 알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작가도 그런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저귀 농장에서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하나가 되어 서로 도우며 살았다는 점이다. 못된 로페즈 감독에게 대항하기 위해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할 때 혹 누군가가 배신하면 어쩌나 괜한 걱정을 했다. 대개 그런 경우도 많으니까. 만주나 간도 쪽으로 이민간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조마조마했다. 다행히 여기서는 원주민인 마야인과도 잘 지내서 마음이 놓였다. 

조선에서는 아무 역할도 할 수 없었던 덕배 아버지가 그곳에서는 솔선수범하고 모든 일을 이끄는 반면 조선에서는 황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모두가 굽신거렸던 옥당대감이 거기서는 너무 무기력하다. 아버지로서도 남편으로서도. 오히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더 좋았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윤재도 그토록 무시했던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일 게다.

책을 읽고 에네껜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상당부분 일치했다. 즉 등장인물의 세세한 부분은 작가가 창작했더라도 큰 줄기는 모두 사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동화는 조선 이전 시기에 여기서 있었던 일을 다루거나 아니면 아예 현대를 다루는데 이 책은 그 사이를 다루고 있다. 열강들에 의해 불평등한 조약을 맺고 일제강점기가 막 시작되기 전 그 불안정한 시기를 다루고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가 아닌, 만주나 간도도 아닌 아주 먼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모두가 외면하고 돌아보지 않았던 곳에서 살았던, 그리고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다룬다는 사실만으로도 읽을 이유가 충분한 책이다. 아니,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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